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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21세기에 무디, 빌리 그래함, 한경직이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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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21세기이다.

첨단의 출현이며 폭발시대이다.

그런데 찾고 찾는 이들은 말한다.

왜 무디가 없을까?

왜 빌리 그래함이 없는가!

왜 한경직이 없는가! 하고.

군중은 그들의 설파는 마음을 

조아리게 했다고 증언한다.

그들 영상의 메아리가 남는다 한다.

아쉬워 운다 라고도 말한다.

왜 현대는 그것이 없을까? 한다.




아마도 그것을 무디로 답해 봄직 하다.

19세기를 불지른 사람이 있다.

드와이트  L. 무디(Dwight L. Moody)이다.

1857년 당시 20세였던 젊은 청년이었다.

그는 미 중서부 에서 장사에 손을 댔다.

그러나 그에게 소명이 이르렀다.

전도자가 되겠다는 적중한 결심이었다.

별로 배우지 못한 사람이 대단했다.

별로 배우지 못 했음이 순수로 옷 입었을까.

하여간에 선풍적인 데가 없었다.




군중은 마음을 드리고 머리를 조아렸다.

주님 정신의 출현 이었을 것이란 설이다.

이 시대의 이 결과로 거국적인 영적각성

운동이 일어났다.

케스윅(Keswick)운동의 영향이 그것이다.

이 결과로 성령충만의 사람들이 엮어진다.

맺는 열매는 성령의 사람으로 였다.

사람들은 통한하며 예수의 길을 따랐다.

그러하다!



성령이 직조해 낸 전도자!

자아의 치부가 죽고 예수의 사람으로 성령이  

고동치는 기별이었다.

아무리 세속의 사람마저 감칠맛을 알았단다.

거리에서 길을 멈추고 혼돈의 세계를 벗어나 

기별 앞에 머물었다.

두 손을 모 울 줄 알았다.




이 시대의 매마름과 결핍은 무엇인가? 

바로 이것이다.

가장 낮은 데서의 출발을 잊었다.

순수무구함의 하늘조화를 잊었다.

성령의 직조해 낸 두루마기 여야 하거늘…

가장 높은 데서의 짜아맞춤이다.

성령감각을 잊은 채이다.

빛살 아닌 영혼의 감칠맛이 그리운 것이다.

21세기의 가난은 이것이다.

그래서 무디 이며, 빌리 그래함, 한경직의 

드리운 진한 향수가 그리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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