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죽임 당하신 하나님 아버지 > 신학

사이트 내 전체검색

신학

십자가의 죽임 당하신 하나님 아버지

페이지 정보

작성자 서경덕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2008.08.20 22:49 조회수 4,443
글씨크기

본문

download.blog?fhandle=MDQ1OHdAZnMzLmJsb2cuZGF1bS5uZXQ6L0lNQUdFLzIvMjk5LmpwZy50aHVtYg==&filename=299.jpg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 눅23:46

『인류의 죄악의 검은 구름이 아버지와 아들 사이를 가로막았다. 하나님과 그 아들간의 교
통이 차단된 것은 인간의 언어로는 묘사할 수 없는 하늘 궁정에 있는 사물들의 상태가 그
원인이었다. 천연계는 인류의 죄악의 형벌을 당하시고 그리스도께서 고통 가운데 죽어 가는
그 장면을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하나님(아버지)과 천사들은 어두움을 둘러 띠고 그리스도
를 숨기사. 그가 하나님의 진노에 잔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마시는 동안 호기심 많은 군
중들에게서 그를 가리우셨습니다.  편지 139. 1898』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의 죄짐을 지시고 십자가상에서 7시간을 고통을 하시다가 심장의 파열
로 인하여 서기 30년 4월 7일 오후 3시경 금요일에 운명하시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인간들
이 죽을세라 어두움의 장막을 가리시고 예수님과 함께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죄의 형벌에서 죄의 권세에서 구원하려 오셨다. 그분이 세상에 오신
것은 아버지께서 실제로 어떤 분이 신가를 보여주기 위함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배역한
자들이 돌아오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당신의 사랑의 품성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 (아버지의)사랑이야말로 자석이 잡아당기는 것과 같은 죄의 이기심의 매력에서
사람을 끌어오고도 남을 온 우주 가운데 유일한 힘이라는 것을 그분은 알고 계셨다. 이 큰
사랑을 보여주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아버지의 품에 있는 독생자 예수님을"(요1:18) 보내
주셨다. 예수께서는 그(아버지 하나님)분을 나타내셨다. 1986년 제3기 안식일 학교 과정 -이
땅에 오신 하나님- 18.19』
오늘 날 기독교인들은 예수 예수 합니다만 진정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아는 이들
은 거의 없습니다. 그분은 하늘 아버지를 잊어버리고 탕자된 우리를 하늘아버지와 결합시켜
행복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셔서 희생을 치르신 것입니다.
『십자가가 없었다면 인류는 아버지와 연합할 수가 없었다. 거기(아버지)에 우리의 모든 소
망이 달려 있다. 십자가로부터 구주의 사랑의 빛이 비쳐 나오므로 십자가의 발 아래에서 죄
인이 그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돌아가신 분을 쳐다볼 때에, 그는 충만한 기쁨으로 기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그의 죄가 사함을 받은 까닭이다. 죄인이 십자가 곁에 믿음으로 무릎을
꿇을 때, 그는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장소에 도달한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우
리는 하늘 아버지께서 무한한 사랑을 가지고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배운다 행적 209,
210』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1:1
왜 요한은 그리스도를 "말씀"으로 부르고 있는가? 우리말 성경에 "말씀"이라고 번역된 말은
원래 헬라어 "로고스"란 말입니다. 그러면 왜 요한은 그리스도를 "말씀"(로고스)이라고 불렀
을까요?
유대인에게 있어서 "말씀"은 무엇을 의미했는가?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는 말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는 말씀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말씀"은 단순한 음성보다 훨씬 더 풍부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이미 하나님의 입에서 말이 나가면 이미 그것은 이루어
진 것과 같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그 말씀은 즉시 그 말을 현실로 만들었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시는 순간, 말씀은 즉시 그 빛이 존재하게 만
들었습니다(창 1:3).
이러한 말씀은 단순한 음성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원동력이며, 살아 움직이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을 잘 아는 유대인들은 "말씀"을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매
개체와, 하나님의 뜻을 현실로 만드는 살아있는 존재로 이해했습니다.
헬라인에게 "로고스"는 무엇을 의미했는가?
헬라인들에게 로고스란 단어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 단어였습니다. 헬라인들은 "로고스
"란 말을 종교적이기보다는 철학적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들은 로고스가 사람의 마음에 빛과 깨달음을 주고, 그들이 자기 생각을 질서 있게 표현할
수 있게 해준다고 생각했습니다. 헬라가 아테네에서 황금기를 맞았을 때에
플라톤은 자기 주변에 모여든 작은 무리의 학생들과 철학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집
니다.
"어느 때가 되면 신으로부터 한 말씀, 즉 한 로고스가 올지 모른다. 그리고 그 로고스[logos]
가 모든 신비를 밝혀주고 모든 것을 분명하게 드러낼 것이다"
요한은 이러한 의미를 가진 "로고스"가 헬라인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하기에 매우 적절한 단
어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헬라 문화에 젖은 이방인들에게 그리스도라는 말 대신, 말씀"(로고스)이란 단
어를 사용해서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요한이 그의 독자들에게 "태초에 그리스도께서 계셨다"고 말하지 않고, "태초에 말씀(로고
스))이 계셨다"고 말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말씀 하나님이신 예수께서는 아버지 곁에(NIV) 혹은 아버지 품속에(KJV) 계셨다고 요한은
설명합니다. 지금까지 어떤 사람도 예수님만큼 아버지 하나님을 잘 나타낼 만한 자격을 갖
추거나 아버지 하나님을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말씀 하나님 되시는 그분 곧 예수님만이 아버지 하나님을 나타낼 수 있었다고 요한은 설
명하고 있는 것이다. (요1:1-3) "아버지 품속에 있었던 그분만이 아버지를 나타내실 수 있으
셨다. 하나님의 사랑의 높이와 깊이를 아는 사람만이 그것(아버지의 사랑)을 드러나게 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SC 14』
오! 의로우신 아버지! 세상은 아버지를 알지 못하나 나는 아버지를 압니다.  그리고 이 자녀
들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아버지를 알려 주었
습니다.  그리하여 나를 사랑하신 아버지의 크신 사랑이 그들 안에도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도록 하려 합니다. 요17:25,26 현대인의성경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셨다. 2보감 339』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됨으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사랑하신 것같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보증을 받게 된다. 2보감 338』 

그리스도를 통하여 계시된 하나님의 지식은 구원받은 모든 사람이 반드시 소유해야 할 지
식이다. 그것은 품성을 변화시키는 일을 하는 지식이다. 이 지식을 받아들이면, 심령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재창조될 것이다. 그것은 신령한 영적 능력을 전신에 공급해 줄 것이다. 치
료 425』 
하늘에서 인간의 가치를 평가하되 하나님을 아는 능력에 따라 평가한다.  COL 354) 
여러분!! 갈바리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제 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더니 제 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
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거기 섰던 자 중 어떤이들이 듣고 가로되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그 중에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융을 가지고 신 포도주를
머금게 하여 갈대에 꿰어 마시우거늘 그 남은 사람들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엘리야가 와서
저를 구원하나 보자 하더라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막15:33-37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는 고난의 절규였습니다.
『고통의 부르짖음이 그분의 입술에서 나오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그분은 하나님으로부터
죄인을 분리시키는 무서운 죄의 흉악성을 느끼셨다. 죄의 무게가 그분의 심장을 찢어 놓았
다. 정로 13』
심장의 고통은 당해본 사람만이 압니다. 우선 공포심이 옵니다. 얼굴이 창백해집니다.  팔다
리까 끊어지는 것 보다도 더 고통스럽습니다. 숨을 쉴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의 고통보다도
심장의 고통으로 인해서 벌거벗김의 수치도 십자가의 고통도 느낄 수 없는 고통을 당하셨습
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고통 중에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고 부르짖으셨습니다. 이것은 인간으로서의 고통스러우심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이때에 과
연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께서 사랑하는 아들 예수님을 버리셨다고 당신은 생각하십니까? 
여기에 대해서 오해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아래의 글은 어느 유명한 전도목사님이 저술에서
발취한 글입니다.
『아버지에게서 버림을 받으셨다.  SDA 사명 72 전도 설교집 164』
이는 하나님의 사랑을 오해한데서 빚어진 내용입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하셨다. 구주의 주위에 짙
은 어두움이 머물러 있을 때에 많은 사람은 다음과 같이 부르짖었다. 천벌이 그에게 내리고
있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주장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분노의 화살이 그를 공격하고
있다. 그분을 믿는 많은 사람이 그분의 절망적인 부르짖음을 들었다. 희망은 그들을 떠나갔
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버리셨다면 그분을 믿는 자들은 무엇을 믿을 수 있겠는가? 3소망
754』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결코 예수님을 외면하거나 버리신 적이 없습니다. 다만 너무나도 처참
한 모습을 참아 보실 수 없으시어 머리를 잠깐 외면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리셨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아버지와 하나이셨기
때문이다.  SDA주석 5:1108』
사랑의 아버지께서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수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과 함께 고통을 당하셨다. 3소망 693』
아버지께서 우리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아들과 함께 십자가에 달리시어 함께 고통을 당하
셨다는 이 사실을 그 누가 꿈엔들 알았겠습니까?  저는 이 말씀을 찾아 읽고 너무도 놀랍고
감격스러워 여러 시간을 눈물을 흘렸습니다. 지금도 이 장면을 생각하면 눈시울이 뜨겁습니
다. 아버지와 아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그토록 희생하신 것을 생각한다면 설사 천국이
없다하더라도 결코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짓은 해서는 안 된다고 다짐하게 됩니다.
인간 부모님의 사랑을 아는 자녀들은 부모님이 가난하여 유산을 하나도 남겨 주지 않았을
지라도 부모의 사랑에 감하시고 효도를 합니다. 유산이 있고 없고가 문제가 되지를 않습니
다. 천국이 없다는 것이 아니고 설사 없다고 하더라도 그 큰사랑만 생각해도 하나님을 실망
시켜 드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표면상으로는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 같으신 그리스도께서는 무서운 암흑 중에서 인간이
마셔야 할 고통의 잔을 남김없이 마셨다. 이 무서운 시간 동안 그분은 이제까지 그분에게
주셨던 아버지의 가납하심의 증거에 의지하였다. 그분은 아버지의 품성을 잘 알고 계셨으며
그분의 공의와 자비와 크신 사랑을 이해하고 계셨다. 그분은 자기가 즐겨 순종하던 그분을
믿음으로 의지하셨다. 그분이 순종하는 마음으로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맡겼을 때에 아버지
의 은총을 잃어버렸다는 생각은 없어졌다. 믿음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승리자가 되셨다. 3소망
756』
이제 나는 사람이 아니라 벌레에 불과하며 내 백성에게까지 멸시를 당하고 모든 사람에게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나를 보는 者 마다 머리를 흔들고 "너는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가
아니냐? 그런데 어째서 너를 구해주지 않느냐? 만일 여호와가 너를 좋아하신다면  어째서
너를 돕지 않느냐?" 고 말합니다. 시22:6-8 현대인의 성경
우주를 창조하신 창조주시며 만주의 주시며 만 왕의 왕이신 우리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시여 한 인간으로서의 대접은 고사하고 극악한 죄인으로 또는 사람의 발에 발펴 죽는 벌
레 취급을 받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당하신
수모였습니다. 모욕과 비난과 부끄러운 참소와 능욕을 가져야 하셨습니다. 그가 자기 땅에
오셨을 때에 그분에게 안전한 곳은 한곳도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그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하여 이곳 저곳으로 도망을 다녀야 하셨습니다. 그의 제자들 중 한 사람이 그를 팔아 넘
겼고 그의 가장 열성적 제자 중 한사람은 그를 저주하고 부인하였습니다. 조롱을 받으시고
가시관을 쓰셨으며 채찍에 맞으셨고 십자가를 지고 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이와 같
은 멸시와 천대를 못 느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떤 사람도 느낄 수 없는 비애를 그는 느
끼시었습니다.  그는 순결하고 거룩하고 흠이 없으셨지만 범죄자로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숭
배를 받으시던 구주께서 지극히 높은 존귀의 자리에서 걸어 내려오셨습니다. 한 걸음 한 걸
음 자기를 낮추시고 희생하신, 이 얼마나 끔직한 죽음입니까!  가장 수치스럽고 가장 잔인
한 죽음, 곧 범죄자로서 십자가에서 죽는 죽음 이였습니다. 그는 전쟁터에서 명예를 걸머지
고 세상이 보는 앞에서 영웅으로 죽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정죄를 받는 죄인으로 하
늘과 땅 사이에 매달려 죽었습니다.  천박하고 죄가 많고 방탕한 무리들의 조롱과 험담 속
에서 수치와 모욕을 당하면서 천천히 죽는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 마다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이고 머리를 흔들며 시22:6-8
그는 범죄자들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으셨고 사람의 조롱을 받으며 숨을 거두셨습니다.  그
리고 육체를 따라 그의 친척된 자들은 모두 그를 다 버렸습니다. 그는 십자가를 참으시고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작은 세계의 거민들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그가 창조하신 온 우주의 모든 거민들을 위해서 이루어질 결과를 생각하며 그가 당하고 있
는 일은 작은 이로 생각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인간을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이것을 생
각한다면 인간이 조금인들 자기를 높이는 마음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의
삶과 그 고난과 치욕을 살펴 볼 때에 우리는 마치 아무런 시련이나 수치나 치욕을 당해서는
안될 사람인 것 같이 교만한 머리를 들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여! 갈
바리를 바라 보십시요.  그리고 자아를 중시하는 정신을 부끄러워할 줄을 알라. 하늘의 지존
자께서 당하신 이 모든 곤욕은 모두 죄 많고 정죄를 받은 인간을 위함 이였습니다. 
『오!  너 하늘이여! 놀랄지어다. 너 땅의 거민들아, 경탄할 지어다. 우리 주님께 그런 식으
로 보답하다니! 이 무슨 멸시이며 이 무슨 악한 짓이며 이 무슨 교만이란 말 이가! 영광의
주께서 자신을 낮추시고 고민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부끄러운 죽음을 당하실
때, 인간을 높이고 자아에게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이 무슨 짓이란 말인가? 리뷰.1900.9.4』
우리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시어 최소한의 인간적인 대우도 못 받으시고 사람에게 짓밟고
새들의 먹이나 되는 벌레(a worm),  혹은 구더기 같은 천덕꾸러기로서 인간들의 조롱거리
가 되시고 비웃음과 입을 삐죽거리는 모욕을 당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벌레>는 ‘메
시아(the Messiah)’인 ‘예수 그리스도’의 은유이며, “벌레가 되어 백성의 조롱거리가
되었다”함은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의 죄를 위해 부끄러움과 조
롱거리가 되기까지 자신을 낮추는 것을 이름이다.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수욕과
침 뱉음을 피하려고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사50:6
수염은 그 사람의 인격을 상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흔히 전쟁터에서 적장을
포로로 하였을 때, 최후의 인격 모독의 행위의 방법 중에 적장의 수염을 뽑는다 든가 까가
버리는 일들이 고사에서 나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와 같은 온갖 조롱과 모욕과 매맞음
과 굶주림과 찔림을 당하셨습니다. 그는 힘이 없으셔서 당하신 것도 아닙니다.
왜 그분은 이렇게 당하고만 계셔야만 했던가요?
나를 조롱한 자가 내 원수였다면 내가 그것을 참을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그는 바로 너였
다. 나의 동료요, 나의 동무이며 나의 가까운 친구가 아닌가!  우리는 함께 다니며 재미있는
이야기도 나누고 성전에도 함께 드나들었다. 시55:12-14 현대인의성경
요즈음 패륜아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자기를 낳고 길러준 부모를 학대합니다. 제주도에 관광
시켜준다고 하고는 관광지에서 버리는 일도 종종 있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버림을 당한 부
모의 심정이 어떠하겠습니까? 그런데 자식에 대한 사랑이라는 게 참으로 묘합니다. 관에서
나와서 주소를 묻고 집 전화를 대라고 하면 그 부모는 그 패륜아도 자식이라고 모른다고 잡
아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모의 심정인가 봅니다. 예수님께서 당하신 것은 인간 자녀들에
게 당한 것입니다. 원수라고 하지를 않고 친구에게 당했다는 것입니다. 원수에게 당했다면
참을 수 있었겠는데 친구에게 당한  것이니 참을 수 없는 것을 참았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눈물겨운 사랑입니다. 저는 이 글을 대할 적마다 눈시울이 뜨겁습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자꾸 납니다. 너무나도 엄청난 사랑을 입었습니다.
나의 신뢰하는바 내 떡을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고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
다.(나를 배반하였나이다.) 시41:9
우리 주님께서는 이 배역한 인간들에게 얼마나 다정다감한 분이 신지, 당신의 둘도 없는 친
구로 간주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셨고 우리 인생을 신뢰하셔서 흉허물없이
사귀시며 가장 친한 친구로 여기시어 함께 식사를 나누고 힘께 다니며 함께 재미있는 이야
기도 나누고 성전 출입도 함께 하였더니 그 사랑하던 친구는 정신이상자 되어 원수처럼 달
려들어 피할 여유도 없이 그 사랑하는 친구에게 죽음을 당하실 수밖에 없으셨다는 것입니
다. 둘도 없는 친구에게 배신당한 배신감!  우리 주님께서는 친구처럼 신뢰하였던 우리들에
죄로 인하여 타살을 당하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을 죽인 장본인이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너였다."고 하십니다.  너무나도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초림시대까지 죄를 지으면 양을 잡아서 제사를 지낸 것을 여러분들은 기억하실 것
입니다. 제사장은 앞에서 양의 머리에 손을 얹고 모든 죄를 자백한 후 그 죄인은 양의 목을
칼을 찌릅니다. 양은 소리 없이 죽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죽였습니다. 우리가 하늘 아버지를 죽였습니다. 매일의 죄는 그분들을 우리 손으로 죽이는
것입니다. 그렇게도 우리를 신뢰하셨는데 그분을 죽이는 일을 계속하다니!  무엇으로 변명
하랴!  하늘도 땅도 눈뜨고 볼 수 없는 인생들이여! 그래도 친구라고 끝까지 참으시고 죽임
당하신 주님이시여!  입을 벌려 무어라 변명 할 수 없나이다. 나야 말로 죄인 중에 죄인이
로소이다.
"많은 황소가 나를 에워싸며 바산의 힘센 소들이 나를 둘렀으며 내게 입을 벌림이 찢고 부
르짖는 사자 같으니이다.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초밀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이틀에 붙었나이
다. 主께서 또 나를 사망에 진토에 두셨나이다.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저희가 나를 주목하여 보고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시22:12-18
개와 소는 동물 중에서도 사람과 가장 가까이 지내는 동물입니다. 개는 사람과 함께 한 지
붕 밑에서 함께 잠을 자기도 하고 함께 음식를 합니다. 특히 애완견이라 하여 사람과 함께
한 이불 속에서 지내는 일도 허다합니다.  이렇게 사랑 받는 애견은 그 주인에게 가진 재롱
을 떨며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충성을 합니다.  소는 사람에게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유용한
동물이지요. 농번기가 되면 논과 밭을 갈고 짐을 날라다 주기도 하고 사람에게 영양 많은
우유를 제공해 줍니다. 그뿐인가?  그는 주인을 위하여 자신을  온전히 희생하여 온 몸의
살과 뼈까지 주인의 식탁에 오르고 자신의 가죽까지 남김없이 주인의 옷으로 또는 구두로
쓸 수 있게 완전한 희생하는 동물입니다.
예전에 어떤 농부가 저녁 늦게 소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던 중에 범을 만나 위험 중에, 소는
범과 싸워 주인을 구출해 준 일이 있었다고도 합니다. 이렇게 개와 소는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가깝게 지내 왔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유용하게 기르던 동물들이 어느 날 미쳐서 날
뛰며 사자같이 주인에게 달려들어 물고 뜯고,  뿔로 받고 하여 주인을 죽였습니다. 이는 은
유적인 표현이나 여기에 나오는 소나 개는 바로 나와 여러분들임을 지적합니다. 사단에게
이용당한 정신병자로서 우리 주님과 하늘 아버지를 죽였습니다. 시편 22편은 하나님의 자녀
들이 정신질환으로 마치 미친개나 소처럼 우리 주님께 달려들어 조롱과 야유와 침 뱉음과
주먹질과 발길질 그것도 부족하여 "겉옷" 과 "속옷" 까지 벗기움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겉옷은 4 조각으로 나눠 같고 속옷은 제비 뽑아 가져갔습니다. 이렇게 우리 주님께서는 나
와 여러분을 위해서 벌거벗김을 당하시어 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못하신 알몸으로, 치
욕스러운 십자가에 못 박히시어 돌아 가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주님을 대한 자들은
바로 다름 아닌,  그가 사랑하는 귀염둥이 자녀들이 였습니다. 그들은 원수 마귀에게 쇠뇌와
정신이상이 걸려 우리 주님을 이렇게 대하였던 것이다. 차라리 원수에게 당한 것이라면 도
리어 견디기 쉬우셨으리라 그러나 사랑하는 자녀들이었기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염
둥이 자녀들이 미쳐서 날뛰는 광기에 의한 수난이었기에 십자가의 고통을 느낄 수 없을 정
도의 마음의 고통을 더 겪으셔야 하셨습니다. 너무도 고통스러워 심장이 파열되시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자녀들에게 당하는 곤욕스러움이 너무도 커서 그의 마음은 양초가 불을 켰을
때 녹아 흐르듯 하였고 힘은 말라 "혀가 이틀에 붙"음바 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주
님은 자녀들을 위하여 치욕스러움을 당하셨습니다.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았나이다. 시22:18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도 너무도 황송한 일입니다. 왜 옷까지 홀랑 벗겨지는
망신을 하셨어야 했겠습니까?  이 또한 우리를 위함이었습니다.
여자가 그 과실을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자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 지라 이에 그들이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 나뭇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 이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
님의 낮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 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네가 어디
있느냐 가로되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창3:6-10
『아담과 해와는 범죄 이전에 하나님께서 지어 주신 "죄없는 하늘 사람들이 입는 빛의 두루
마기" 리뷰 1904.3.17』
를 입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범죄 함으로 빛의 옷은 잃어버린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수치를
가리려고 무화과 나뭇잎을 두른 것입니다. 이것은 품성의 옷 세마포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잃어버린 하나님의 품성의 옷을 입혀주시기 위해서 대신 벌거벗김의 수
치를 당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녀들이 잃어버린 "빛의 옷"을 찾아 주시기 위해서 사람을 대신하여 십자가의 벌
거벗김을 당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게 한 것은 창에 찔렸기 때문도 아니고 십자가의 고통도 아니었다. 죽음의 순
간에 "큰 소리로"(마 27:50; 눅 23:46) 부르짖으신 것과 그분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흘러나
온 것은 그분이 심장 파열로 죽으셨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분의 심장은 정신적 고통에 의
하여 파열되었다. 그분은 세상 죄를 인하여 죽임을 당하셨다. 3소망 772』
예수님의 죽음은 외형적인 것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십자가의 고통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십자가의 고통이 그를 죽게 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정신적인 압박과 괴로
움이 그의 심장을 찢어 놓은 것입니다. 이는 심장병을 알아보지 않는 사람은 결코 이해되되
안는 부분입니다. 심장질환이 있는 사람은 심장이 발작하면 우선 호흡이 어렵습니다. 심장이
찢어지는 고통과 함께 공포심이 엄습합니다. 인간의 죄짐에 눌리신 예수님 심장의 파열을
받으셨습니다. 이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시는 아버지께서는 아들의 죽음을 보시는 그 심정이
어떠하졌겠습니까?
예수님은 육체를 쓰셨으니 7시간 동안 십자가에 매달리셨다가 죽음으로 모든 고통을 잊으실
수나 있으셨으나 영체를 갖고 계신, 죽으실 수도 없으신 채로 영원히 심장이 찧기는 고통을
하셔야 하셨습니다. 하늘이 3시간 동안 어두웠고 번개와 천둥 속에 땅이 갈라지는 사건이
있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이는 우리 아버지 탄식소리가 천둥번개를 대신 하신것이요. 땅이
갈라짐은 우리 아버지의 영의 심장이 찢기심의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재판정과 갈릴리에서 연출된 장면들에서 우리는 사단의 감화 아래 있을 때 인간의 마음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봅니다. 천군들이 그리스도를 구원해 낼 수도 있었지만 그리스도는
십자가형에 순복하셨습니다. 천사들도 그리스도와 함께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께서도 친히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이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는 하나
이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단은 하나님의 품성을 이해하고 그분의 선하심을 알면서도 자기 자신의 이기적이고 독
자적인 생각을 따르기로 선택했던 것이다. 이 선택은 그에게 결정적인 것이었다. 더 이상 하
나님께서 그를 구원하기 위하여 하실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인류는 속임을 당했으며
사단의 궤변에 의하여 그들의 마음이 어두워졌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의 높이와 깊이를
알지 못했다. 인간에게는 하나님(아버지)의 사랑을 알 수 있는 희망이 있었다. 하나님의 품
성을 바라봄으로 인류는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었다. 3소망 762』

인간은 하나님(아버지)을 사랑하는데 희망이 있었다. 하나님의 품성을 바라봄으로 인류는 다
시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성경은 흑암이 땅을 덮었고 땅이 흔들렸다고 말한
다.(마27:45,41) 하나님의 무재의 상징처럼 보이는 것이 실제로는 그분의 임재의 상징이 다.
그분께서는 거기에 계셨습니다. DS 3:301
『십자가 없이는 사람이 아버지와 연결될 수 없습니다. 죄인들이 십자가에 이르러 자기들을
위하여 돌아가신 그분을 바라볼 때에 자신의 죄가 용서받았다는 사실 때문에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SDA주석 5:1133』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 다 형용 못하네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낮은 땅위에  
죄범한 영혼 구할 그 아들 보내사
화목제로 삼으시고 죄용서 하셨네

 

괴로운 시절 지나가고 땅위의 영화 쇠할때   
주 믿지 않던 영혼들은 큰 소리 외쳐 울어도   
주 믿는 성도들에게 큰 사랑 베푸사 우리의   
죄 사했으나 그 은혜 잊을까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하나님 크신 사랑 그 어찌 다 쓸까 저 하늘    
높이 쌓아도 채우지 못하리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Copyright © KASDA Korean American Seventh-day Adventists All Right Reserved admin@kasd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