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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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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서경덕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2008.06.05 23:05 조회수 6,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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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
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사 55:7),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 그 때에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하나님께서 회개하는 죄인을 기꺼이 받아주신
다는, 이 얼마나 놀라운 보증인가! 독자들이여, 그대들은 자기자신이 원하는 길을 선택해서
살아오지 않았는가? 그대는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떠나 방황했는가? 그대는 죄악의 열매를
먹으려 하다가 결국에 그것이 그대의 입술에서 재가 되는 것을 발견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지금 그대는 그대의 모든 재산을 다 허비해 버리고, 그대의 일생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그대의 소망이 끊어진 채 외롭고 쓸쓸하게 앉아 있지는 않는가? 오랫동안 그대에게 속삭였
으나 그대가 듣기를 원치 않던 다음의 음성이 다시 분명하고 똑똑한 어조로 그대에게 임하
고 있다. "이것이 너희의 쉴 곳이 아니니 일어나 떠날지어다 이는 그것이 이미 더러워졌음
이라 그런즉 반드시 멸하리니 그 멸망이 크리라"(미 2:10).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라. 그는
그대에게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사 44:22)고 초청하신다. 실물 205

지금 이 말씀은 돌아오면 용서하시겠다는 것입니까? 돌아오기 전에 용서하신 것입니까? 돌
아오기 전에 용서를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생각 하느냐하면 돌아와서 사정사정해야
만 용서해 주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은 돌아오기 전입니다 돌아오기 전에요 죄부터 용서해 놓고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모 자녀간에 가능한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용서하는 것입니다 이 용서를 말해 주기
위해서 탕자의 비유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탕자가 집나갔을 때 아버지는 먼저 용
서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탕자는 죄가 너무 많아 면목이 없어 들어갈 수가 없
었던 것입니다 탕자가 죄가 조금이라면 들어갈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남의 돼지를 치면서
배를 주리면서도 못 들어 간 것은 죄가 많아 못 들어갔습니다 만약 자신이 죄가 정말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벌써 들어갔을 것입니다 죄 때문에 못 들어 간 것이지요 그
런데 그것은 탕자의 마음이고 아버지의 마음은 전혀 다릅니다 나간 날부터 기다리는 것입니
다 기다린다는 것은 죄를 용서해 놓았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죄를 물으려고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죄를 용서해 놓고 탕자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부모의 마음과 탕자의 마음은 다릅니
다 다르기 때문에 탕자는 못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성도들도 탕자와 같이 자기 죄 때
문에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이 마음은 부모가 되어서 아들이 잘못하고
집을 나가 몇 일을 못 들어오고 있는 경험을 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
리를 사랑으로 용서한 것은 탕자가 돌아오기 전에 용서한 것처럼 용서해 주신 것입니다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塗抹:지워 없앰)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치 아니하
리라 이사야 43:25

하나님이 누구를 위해 우리 죄를 도말 하셨다고 하셨습니까?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 입니다.
우리의 죄 값을 독생자의 죽음을 통해 치르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은, 먼저는 하나님 자
신의 영광을 위해서 입니다. 인간을 위하시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그 다음 문제인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는데, 사람이 모두
다 지옥 가면 하나님은 실패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자식을 낳아 길렀는데 그 자식들이 전부
잘못되거나 죽는다면, 그 당사자인 자식들은 물론이거니와 먼저 부모의 마음이 안타까운 것
입니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서뿐 아니라 부모 자신을  위해서도 자녀들에게 모든 것을 다합
니다. 그래서 자식이 잘되면 부모에게 영광이 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다 지옥에 가
면,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 위
함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우선 내 자신이 구원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
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 죄를 도말하시고 기억지도 않으시는 것입니다.   탕자
(蕩子)가 아버지를 떠나 잃어져 있으면 그것이 아버지의 근심이고 슬픔입니다. 아버지께로
돌아가면 기쁘게 맞이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심은 자신의 영광을 위함이므
로 그 구원이 너무나 완전하고 확실한 것입니다. 만일 시계를 산다면, 시계에 대한 값을 확
실히 지불하고 소유로 삼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화재가 났
을 때 자기의 자녀는 필사적으로 건지려고 하는 이유는 자녀 뿐 아니라 자기를 위한 것이기
도 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우리뿐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위해 우리를
구원하시므로 하나님의 구원은 철저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 때문에 “나 곧 나는 나를 위
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조금 잘
하면 천국에 갈 것 같고 조금만 잘못하면 지옥에 갈 것 같은 것은 구원이 아닙니다. 구원은
하나님 편에서 100% 완전하고 철저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 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 같이 도말하였으니 너
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救贖)하였음이니라 이사야 44:22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죄가 빽빽한 구름 같이 막혀 있었습니다. 죄는 사람끼리 지어도 죄
인들이 범한 법은 하나님의 법이므로 죄가 하나님 앞에 가 있습니다. 도말은 지워서 없애버
렸다는 뜻입니다. 또 돌아오면 용서해 주겠다는 것이 아니라 용서했으니 돌아오라는 것입니
다. 우리는 용서해 주신 사실을 믿습니다. 그리고 믿는 것이 바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교회당까지는 돌아오는데 하나님께로는 돌아가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교회당에
가서 기도하고 예수님의 피를 믿는다고 하지만 자신의 죄를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 계속
용서해 달라고 합니다. 항상 죄의식이 있고, 그로 인해 두려워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그 죄를 용서하셨는데도 말입니다.  어느 집 아들이 ‘나도 돈 좀 써 보자’ 하고 아버지의
호주머니에서 돈 천만 원을 가져갔다고 합시다. ‘이 괘씸한 놈, 오기만 해봐라’ 하고 기다
리는데 일 년이 지나고 삼 년이 지나도 소식이 없으면 부모는 돈 때문에 걱정합니까 아니면
아들 때문에 걱정합니까? 시간이 지날수록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그 아들이 지은 죄
는 부모의 마음에서 봄눈 녹듯이 다 사라져버립니다. ‘이놈아 살아서 돌아오기만 해라’는
심정으로 신문에 광고를 냅니다. ‘0 0 아, 아버지가 네 죄를 다 용서했으니 안심하고 돌아
오너라. 네가 돌아오지 않아서 네 어머니께서 병이 났다’ 이런 광고 흔히들 보지 않습니
까? 그것을 보고 아버지께 돌아가면 받아줍니까, 받아 주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그 어느 부모의 사랑보다도 더 큽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이사야 49:15

고 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고도 남습니다. 그래서 다 용서했으니 돌아오
라는 것입니다. 이사야 일보에 광고를 낸 것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신문이라고도 할 수 있
지 않겠습니까? 온 세상 말로 번역되어 모든 사람에게 돌아오라 하십니다. 탕자가 아버지께
돌아가니 그대로 받아 주었습니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
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누가복음 15:22~24)고 하셨습니다. 그 탕자는 우리이고 아버지는 하나님이지 않습니까? 제
일 좋은 옷을 입힌다는 것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구원의 옷을 죄인에게 입히시는 것을 가
리킵니다. 죄를 보시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손에 가락지를 끼운다는 것은 너는 내 아들이라
는 약속의 증표입니다. 발에 신을 신긴다는 것은 다시는 아버지를 떠나지 마라는 것입니다.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는 것은 죄 많은 아들 때문에 죄 없는 송아지가 죽은 것은
우리 같은 죄인이 하나님께 돌아와 하나님과 함께 기뻐하기 위해서 죄 없는 주님께서 죽으
신 것을 가리킵니다. 내 아들은 죽었다가 살았고 잃었다가 얻었다는 말은 하나님을 떠나 영
적으로 잃어졌고 죽어 있었는데 하나님께 돌아옴으로써 살아난 것, 다시 얻은 것을 이릅니
다. 예수님의 피로써 우리의 죄를 다 사해 주신 것을 믿고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께 돌아가
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을 때 하나님께서 그대로 받아 주시는 것입니다. 그 은혜 외에 그
무엇으로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으며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께서 이루신 공
로만 의지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아들이 아버지께서 다 용서하였으니 돌아오라는 광고를 보고서도 자신의 죄만 생각하여 돌
아가지 않는다면 이미 지은 죄가 크겠습니까, 아니면 돌아가지 않는 것이 더 큰 죄가 되겠
습니까? 돌아가지 않는 죄가 훨씬 더 큽니다. 이미 지은 죄는 용서해 놓았습니다. 그런데도
돌아가지 않으면 영영 버린 자식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믿는 사람들의 죄
만 사했습니까?
아닙니다.
이 사실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죄까지도 다 사하셨습니다.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요한
1서 2:2
자신의 죄 때문에 지옥에 갈 사람은 이제 없습니다. 그러면 이제 지옥 갈 사람이 없을까요?
아닙니다. 지옥 갈 죄가 새로 생겼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을 믿지 않는 죄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이 사실을 믿지 않고, 하나님께 돌아가지 않는
죄는 용서받을 길이 없습니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
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요한복음 3:18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자신의 죄를 용서해 주셨음을 믿으면 우리는 심판을 받지 않습니
다. 이미 예수님께서 대신 심판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믿지 않는 자는 믿지 않는 그 죄 때
문에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라 하셨습니다. 벌써 심판을 받았다는 것은 믿지 않는 사람에게
는 사형선고가 이미 내려져 있는 것이고 죽음 건너편에서 집행된다는 뜻입니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
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요 3:36

하나님의 독생자를 희생하셔서 이루신 그 크신 은혜를 믿지 않는 죄는 영원히 사함을 받지
못하고 하나님의 진노가 그 머리 위에 머물러 있으며 머지않아 그 진노와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
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 4:5-8.

아무 공로 없이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의 행복이 얼마나 큰 것인지 다윗도 이미 멀리서 보
고 말했습니다. 그 행복은 이 세상에 있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영원하고 영광스러
운 하나님의 축복이며 참된 행복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한복음 5:24찬송하리로
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
이라  베드로전서 1:3,4

일어나서 그대의 하늘 아버지께로 돌아가라. 그리하면 그는 멀리까지 나와서 그대를 영접하
실 것이다. 만일 그대가 회개하고 그분을 향해 한 걸음만 내디딘다해도 그분은 재빨리 무한
하신 사랑의 팔로 그대를 안아 영접하실 것이다. -- 그대의 천부께서는 죄로 더럽혀진 옷을
그대에게서 벗기실 것이다, 스가랴서의 아름다운 비유적 예언 속에서 여호와의 천사 곁에
선 누추한 옷을 입은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죄인을 대표한다. 주께서 "그 더러운 옷을 벗기
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슥 3:4, 5)히라고 말씀하신다. 이
와 똑같이 하나님께서 "구원의 옷" (사 61:10)으로 그대를 입히실 것이고, 의의 겉옷으로 입
히실 것이다. "너희가 양우리에 누울 때에는 그 날개를 은으로 입히고 그 깃을 황금으로 입
힌 비둘기 같도다"(시 68:13). 실물 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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