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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들에게 냉대 받은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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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서경덕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2008.07.25 19:16 조회수 4,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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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스님의 경험담이다. 스님은 시주를 받으려고 어느 집의 문턱을 들어서려니 주인되는
여인이 나와 쌀쌀스러운 표정으로
"우리는 예수를 믿어요."
하고 문전박대를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 중의 항변인즉 불쌍한 사람 동냥을 보태준다는 생
각을 한다면 되지 않겠냐? 돌부처가 먹을 리는 없고 어차피 사람이 먹을 것인데 지나치다
는 내용입니다. 또 어느 날. 필요한 물품을 구하려고 어느 백화점을 들렸는데 점원으로부터
"우리는 예수를 믿어요."
하더랍니다. 예수를 믿으니 시주를 못한다는 것, 스님은 씁쓸함을 느끼면서
"물건을 사러 왔습니다."
고 하니 그제야 반기더라나?  종교야 어떠하든 인간적으로 대할 수 없느냐는 것이 스님의
항변이였습니다. 그의 주장인즉  기독교는 사랑을 주장하고 불교는 자비를 주장한다. 사랑이
나 자비나 결국 같은 의미가 아니냐? 나도 머리맡에 성경을 놓아두고 보는데, 불경이나 성
경이 공통점이 많아 성경을 읽는지 불경을 보는지 모를 정도라고 합니다. 스님님 기독교인
들이 사랑은 주장하면서 성경과는 다르게 왜 편협한 마음이냐는 것입니다.
내 경험으로는 나 자신부터가 기독교인들 대부분이 너무도 편협적이라고 느끼고 있습니다.
자기가 믿는 신조와 다를 때에는 이단이니 삼단이니 하면서 서로를 적대시합니다. 교파가
다른 사람을 만나면 서로가 자신의 교파로 이끌기 위하여 제법 친절한 척 하다가 말이 먹혀
들지가 않으면 원수시 합니다. 참으로 한심한 족속들입니다. 그렇게 하라는 말씀이, 성경 어
디에 있는 듯이 가관들입니다. 우리의 원수는 사람이 아니고 사단일 뿐입니다. 
스님의 글인데 "자비와 사랑과 애정"이라는 제목으로
『세속의 사랑은 어디까지나 자기 본위로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남녀간의 사
랑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자가 장가가는 것도 욕심 채우려는 것이지, 처녀 욕심 채워 주려고
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첫날 저녁부터 싸우고 일평생 싸웁니다. 서로 제 욕심만 채우
려고 하니 아이들 여러 명 낳고 살아 봐도 개성이 안 맞고 욕심이 안 맞아서 싸우게 됩니
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가령 갑이란 남자가 을이란 여자를 사랑해서 연애를 한다면, 갑은
을에게 이런 요구를 합니다.
"너는 내 것이야! 다른 사람하고는 이야기도 하지 마라. 쳐다보면 안돼. 꼭 나만 기다리고
있어."
사회 정의상 이렇게 말을 할 수가 없어서 그렇지, 마음의 요구는 그렇게 됩니다. 이것은 여
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는 내 것인데 다른 여자하고 교재하면 안돼."
이런 식입니다.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점령입니다. 남의 생명의 자유라는 것은 손끝만큼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곧 도둑입니다. 자비를 가진 남자라면 장
가를 가더라도 남이 데려가지 않는 아주 못생긴 쳐녀를 하나 얻어다가,
"호강시켜 줘야겠다. 하루 백만원을 벌어서라도 다 맡기고. 잘 살든지 못 살든지 저 여자 뜻
대로 하게 해야겠다."
이런 태도를 가지고 언제나 상대를 존중하고 쥐해 주는 이런 생활을 할 것입니다. 잃게 상
대편 본위로만 하고 자기는 조금도 내세우지 않는 남편 앞에서는 아무리 악녀라도 보살이
됩니다. 그렇게 하면 그 여자 마음엔 그 남자뿐이고 우리 남편이 제일이라는 생각만이 있을
것입니다. 남편이 보살로 보이고 부처로 보입니다. 그러면 보살이 됩니다. 중생들은 조건부
로 상대를 상대편을 사랑해 주려 하니, 상대도
"내가 하는 것만큼 주겠다."
그러는 것입니다.
"네가 나한테 부족하게 해준 만큼 나도 섭섭하게 해주겠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내외간에 날마다 싸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나쁜 심리로
남을 점령하려는 것이고 남을 구속사려는 것입니다. 반대로 자기는 남을 해방하려는 마음이
고, 남을 이해하려는 마음입니다. 박애(주= 기독교가 주장하는 사랑) 라고 하는 것도 절대로
사랑이 못되고 자기 중심으로 하기 때문에 안 믿든 사람하고 만나면 내외간이나 부자간에도
서로 38선이 생깁니다. 자기는 전혀 잊어버린 사랑, 어떤 한계를 두지 않는 사랑, 그것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공자의 유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의 주의와 맞지 않는 사람이나 환
경을 초월해서 상대방을 전적으로 사랑하는 인(仁)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불교에서만 가
능합니다. 불교에서는 기독교를 믿고 착한 일해도 천당 가고, 유교를 믿고 착한 일해도 천당
가고, 아무 것도 안 믿고 착한 일해도 천당 극락 간다는 인과설에 입각한 윤리관이 확립되
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교의 사랑만 해도 한계가 있는 사랑이고 자기한테 국한되어 있는
사랑이지 한계밖에는 한 치도 못 나가는 사랑입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하고 예수 믿는 사
람하고 만나면 부부간이나 부자간에도 서로 38선이 생깁니다. 종교가 다르면 한 집안에 살
면서도 며느리하고 서로 원수가 되어서 불화가 생기는데 이것은 전적으로 기독교의 잘못입
니다. 불교는 그래도 그렇게는 안 합니다.
"정 그렇거든 너는 예배당에 가거라."
이런 태도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다른 것은 다 마귀(魔鬼)다. 그래 가지고 조금도 용서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말이 박애(博愛)지 좁은 박자 박애입니다. 공자의 인의(仁義)도
마찬가지입니다. 공자도 자기주의와 맞지 않는 사람하고는 상종하지 말아라. 거래하지도 말
아라 그럽니다. 불교는 안 그렇습니다. 아무다 다 평등하게 상대하여 주라. 예수교 사람도
목사도 상대해 주고 신부도 상대하여 한계를 두지 말라는 태도가 불교입니다. 기독교를 믿
고 착한 일을 해도 천당 가고, 유교를 믿고 착한 일 해도 천당 가고 아무것도 안 믿고 착한
일 해도 천당 간다는 것이 불교의 인과설입니다.』

위에 기록대로 불교인들이 실제로 그러한 마음을 갖고있는지 나로서는 자못 의문이 가는 대
목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생각할 점은 있다고 느껴져 마음의 양식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민족이나 계급, 또는 신조에 있어서의 차별을 인정치 아니하셨다. 복음 46』
『구주께서는 신분과 계급, 세상의 명예와 재물을 무시하신다. 하나님께서 높이 평가하시는
것은 품성과 목적을 위한 헌신이다. 교권 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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