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 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요5:18 우리 재림청년들 가운데 군대에 입대하여 신앙문제로 많은 고통을 당합니다. 즉 집총(執銃) 과 안식일(安息日)입니다. 이로 인해 형을 받고 보통 3개월 내지 3년 6개월까지 감옥살이를 하였습니다. 이들 청년들은 하나님이 주신 양심대로 살고자 하여 다른 모든 일에는 충실하 였으나 군당국은 그들의 양심적인 요구에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죄명은 안식일 준수 또는 양심에 의한 집총거부한 것은 헌법에 위배된다가 아닙니다. 상관명령 불복종이라는 것 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죄명은 인류를 구원하려 왔기 때문이다라고 하지 않습니다. 소요 죄라던가 국가를 전복하려는 혐의라는 것이지요. 위의 성구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게 한 진짜 죄(?)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라고 하는 것이 유대인들은 눈꼴사납게 여긴 것입니다. 율법주의 바리세인들의 눈에는 예수 님은 안식일 범법자였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서 "저가 세상을 활보하면서 참람스럽게도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고 그러더니 결국 천벌 을 맞는 것이다." (요5:18참고) 참람죄의 결과라고 주장을 한 것입니다. 사단은 그렇게 억지 누명을 씌웠습니다. 그리고 인 간의 손을 빌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입니다. 그러나 사단은 안심이 되지 않았습니 다. 『사단과 그의 천사들은 인간의 모양으로 십자가 곁에 나타났다. 3소망 746』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방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삼 층천에서 이 광경을 내려다보고만 계셨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과 그의 거룩한 천사들은 십자가 곁에 계셨다. 3소망 754』 우리 아버지께서 팔짱끼고 하늘 보좌에 눌러 앉으실 분이 아니십니다. 독생자 예수를 죽이 느냐 지구 막둥이를 살리느냐 하는 매우 대한 사건입니다. 그런데 어찌 보좌에 가만히 앉아 계실 수 있을 수 있습니까? 『장례식 휘장 같은 칠흑같은 어두움이 십자가를 뒤덮었다.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 시까지 계속하였다. 일식이나 다른 자연 현상이 없었는데도 달도 없고 별도 없는 한밤중의 짙은 어두움과 같았다. 그것은 후세 사람들의 믿음을 굳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기 적적인 증거였다. 그 짙은 어두움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임재가 가리워졌다. 3소망 753』 예수님이 칠흑같은 어두움이 십자가를 뒤덮었습니다. 이 어두움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아 무도 없습니다. 생각도 안 합니다. 기껏해야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니 천연계에 이변이 생겨서 십자가를 중심해서 어두움이 짙게 끼였대, 하는 정도입니다. 우리 하늘 아버지께서 어두움의 보자기로 자신을 가리고 나타나신 것입니다. 얼마나 답답한 그리스도인들입니까? '그 짙은 어두움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임재가 가리워졌다.' 이 사실을 똑똑히 기억하시길 바 랍니다. 『하나님(아버지)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경험으로 우리들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믿고 의지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의 대속자 시요. 보증인이 되시는 그리스도깨서 고민하시고, 투쟁하실 때 아버지 하나님은 그 아들 곁 에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용기가 꺾이어 어려움 가운데 몸부림치는 모든 영혼들 곁에 계십니다. 편지 106. 1896』 위에 문장을 눈여겨 보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을 처움부터 의지하신 분이십 니다. 그가 아버지를 의지하십같이 우리도 우리의 하늘 아버지를 의지하여야 합니다. 『광야에서부터 갈바리까지 사단의 분노의 폭풍이 그분에게 휘몰아쳤으나 그것이 무자비하 게 치면 칠수록 하나님의 아들은 더욱더 굳게 하나님의 손에 매달리셔서 그 피로 물든 그 길을 헤치고 나아가셨다. 3소망 759』 우리도 그렇게 아버지를 의지해야 합니다. 『제 구시에는 어두움이 백성들에게서는 걷혔으나 아직도 구주를 덮고 있었다. 그것은 그분 의 마음을 억누르고 있는 고민과 공포의 한 상징이었다. 어떤 사람의 눈도 십자가를 둘러있 는 그 어둠을 꿰뚫어 볼 수 없었으며 고통당하는 그리스도의 영혼을 싸고 있는 짙은 어둠을 뚫어 볼 수 없었다. 성난 번갯불이 십자가에 달려 있는 그분을 맹렬히 공격하는 것처럼 보 였다. 그 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 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하셨다. 구주의 주위에 짙은 어두움이 머물러 있을 때에 많은 사람은 다음과 같이 부르짖었다. 천벌이 그에게 내리고 있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주장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분노의 화살이 그를 공격하고 있다. 그분을 믿는 많은 사람이 그분의 절망적인 부르짖음을 들었다. 희망은 그들을 떠나갔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버리셨다면 그분을 믿는 자들은 무엇을 믿을 수 있겠는가? 억눌렸던 그리스도의 정신으로부터 어둠이 걷혔을 때에 그분은 다시 육체적 고통을 느끼시고 "내가 목마르다"고 말씀하셨다. 3소망 754』 유대인들 가운데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것에 많은 반감을 가졌습니다. 그래 서 그들은 예수를 죽이려고 기회를 엿보았습니다. '어떤 사람의 눈도 십자가를 둘러있는 그 어둠(하늘 아버지의 임재)을 꿰뚫어 볼 수 없었으 며' 십자가를 둘러 있는 그 어둠은 우리 하늘 아버지께서 어두움의 장막을 가리우시고 나타 나신 모습이였습니다. 그렇기에 인간의 눈에는 다만 이상하게 십자가 주변이 왜 이렇게 어 두울까 하는 정도 였습니다. 다음에 '고통당하는 그리스도의 영혼을 싸고 있는 짙은 어둠을 뚫어 볼 수 없었다.' 고통당하는 예수의 영혼을 싸고 있는 짙은 어두움은 고통당하는 예수께 위로와 힘을 주시기 위한 아버지께서 예수를 감싸안은 광경이 였습니다. 영안의 눈이 뜨인다면 아버지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수난당한 눈물겨운 모습니 생생이 보 일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이 세상에 오셨고 함께 예수님과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셨을 뿐 아니라 예수 님의 고통을 덜어주시려고 애를 쓰셨습니다. 어두움의 보자기를 쓰시고 나타나셨고, 예수님 의 고통을 가리우시다가 예수님의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너무나도 보기에 힘겨우셔서 예수 님에게서 잠시 눈을 돌리시기도 하셨습니다. '고통당하는 그리스도의 영혼을 싸고 있는 짙은 어둠을 뚫어 볼 수 없었다.' 고통당하는 예 수님을 감싸고 있는 분은 아버지십니다. 짙은 어두움의 장막으로 가리셨기에 사람들은 단순 하게 어두움이 이상하게도 십자가 주위에 임하였다하는 정도였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두움의 장막으로 임재하셔서 아들의 고통을 덜어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이 아들의 고통을 너 무 처참하여 참아 보실 수 없으셔서 잠시나마 외면하시고 계시면 아들 예수님은 다시 육체 적인 고통을 느끼시는 것입니다. 어두움의 보자기를 덮어쓰신 아버지께서는 아들 예수를 부등겨 안으신 우리 아버지의 고통 은 어떠하였겠습니까? 『예수님을 죽게 한 것은 창에 찔렸기 때문도 아니고 십자가의 고통도 아니었다. 죽음의 순 간에 "큰 소리로"(마 27:50; 눅 23:46) 부르짖으신 것과 그분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흘러나 온 것은 그분이 심장 파열로 죽으셨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분의 심장은 정신적 고통에 의 하여 파열되었다. 그분은 세상 죄를 인하여 죽임을 당하셨다. 3소망 772』 결국 예수님은 운명하셨습니다. 그가 운명하시게 됨은 로마 병정들의 창에 찔림도 아니며 십자가의 고통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인유를 구원하여야 한다는 생각고 인류의 죄악으로 인 한 정신적 고통이 그의 심장을 파열시켜 죽음으로 몰고갔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아 버지는 어떻게 되셨을까요? 아무런 고통도 없으셨을까요?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과 함께 고통을 당하셨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겟세마네의 고 통과 십자가의 죽음으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한 값을 치르셨다. 정로 13』 우리 아버지께서도 아들과 함께 고통을 당하셨고 뿐만 아니고 십자가의 죽음까지 감내하셨 습니다. 다른 증언을 계속 살펴보시기로 합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과 함께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천사들은 구주의 고통을 바라보 고 있습니다. 인류 106』 『하나님(천부)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아버지와 하나이셨기 때문입니다. SDA주석 5:1108』 여러분! 예수님이 당하신 고통과 우리 아버지께서 당하신 고통을 지금 이순간 처음 알게되 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더 많은 고통을 하였겠습니까? 예수님의 고통도 상상을 초월하 지만 예수님의 고통당하시는 모습을 안쓰럽게 보시면서 그분을 감싸안으시고 고통하시는 우 리 아버지의 고통은 아버지의 심정이 아니고는 가히 짐작도 안되는 고통이 였습니다. 이렇 게 부자 하나님께서 우리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당하신 고통입니다. 아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이여!! 『천사들도 그리스도와 함께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친히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이셨습니다. DS 3:301』 영안이 뜬 천사들이 이 모습을 보니 역시 고통을 안할 수 없었습니다. 해산의 고통을 치룬 것입니다. 목사로부터 평신도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십자가하고 설교하고 이야기 하고 찬양합니다. 그 러나 아쉬움이 많습니다. 십자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말 알아야 합니다. 정작 알아야 할 것은 모르는 것이 오늘의 기독교계입니다. 『태양은 이 무서운 광경을 보기를 거절했다. 세상을 밝게 비추고 있던 한 낮의 태양이 그 때에 갑자기 없어진 것처럼 보였다. 장례식 휘장 같은 칠흑같은 어두움이 십자가를 뒤덮었 다. 3소망 753』 태양이 눈이 있습니까? 이것은 우리 아버지의 참모습을 태양이 묘사한 광경입니다. 고통당 하는 예수님을 참아 볼수 없어 눈을 돌리시기도 하시면서 그를 감싸 안으시는 이중의 고통 을 치루신 사랑의 우리 아버지십니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죄의 형벌에서 죄의 권세에서 구원하려 오셨습니다. 그분이 세상에 오신 것은 아버지께서 실제로 어떤 분이 신가를 보여주기 위함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배 역한 자들이 돌아오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당신의 사랑의 품성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 (아버지의)사랑이야말로 자석이 잡아당기는 것과 같은 죄의 이기심의 매력에서 사람을 끌어오고도 남을 온 우주 가운데 유일한 힘이라는 것을 그분은 알고 계셨 습니다. 이 큰사랑을 보여주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아버지의 품에 있는 독생자 예수님을" (요1:18)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그(아버지 하나님)분을 나타내셨습니다. 986년 제3기 안식일 학교 과정 -이 땅에 오신 하나님- 18.19』 『십자가가 없었다면 인류는 아버지와 연합할 수가 없었다. 거기에 우리의 모든 소망이 달 려 있다. 십자가로부터 구주의 사랑의 빛이 비쳐 나오므로 십자가의 발 아래에서 죄인이 그 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돌아가신 분을 쳐다볼 때에, 그는 충만한 기쁨으로 기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그의 죄가 사함을 받은 까닭이다. 죄인이 십자가 곁에 믿음으로 무릎을 꿇을 때, 그는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장소에 도달한 것이다.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는 하 늘 아버지께서 무한한 사랑을 가지고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배운다. 행적 209, 210』 『아버지 품속에 있었던 그분만이 아버지를 나타내실 수 있으셨다. 하나님의 사랑의 높이와 깊이를 아는 사람만이 그것(아버지의 사랑)을 드러나게 하실 수 있으셨다. SC 14』 『그리스도를 통하여 계시된 하나님의 지식은 구원받은 모든 사람이 반드시 소유해야 할 지 식이다. 그것은 품성을 변화시키는 일을 하는 지식이다. 이 지식을 받아들이면, 심령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재창조될 것이다. 그것은 신령한 영적 능력을 전신에 공급해 줄 것이다. 치 료 4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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