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 완전론(2)-누가 과연 갈렙과 여호수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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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 완전론(2)-누가 과연 갈렙과 여호수아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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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믿을 때 우리가 믿음으로 입는 그리스도의 옷은 완전하고 흠이 없는 옷이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고 침례를 받으면 그 즉시로 완전한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 결코 불완전한 아들이 아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는 동시에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다. 그 생명은 불완전한 생명이 아니고 완전한 생명이다 그런데 우리가 거듭난 이후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면서 세속의 물결과 구습들, 선천적이고 조상으로 유전한 망령된 행실들로 인해 이 완전한 그리스도의 옷과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과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생명을 더럽히고 좀먹고 흐리게 하는 수많은 도전과 유혹과 시련과 고난에 직면하게 된다. 구약의 성막을 지을 때 하나님은 성막에 관계된 의식이나 의복, 모든 기구에 이르기까지 만드는 방법과 재료와 장,광,고를 상세히 일러 주셨다. 하나님이 하늘 실체와 원형의 모양과 식양을 다 일러 주셨지만, 유독 성소 바닥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으셨다 그것은 바로 바닥은 그냥 흙이 있는 땅이었기 때문이다. 제사장들이 아무리 발을 물두멍에 닦고 성결하게 하여도 그들의 발에는 성소 바닦으로인해 흙이 묻어났다 흙을 묻히고 싶어서가 아니라, 부지중에라도 그들의 발은 더럽혀 졌었다. 성소 바닥은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살고 있는 지상을 가리킨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이상은 우리가 침례 받을 때 입은 그 옷이 더럽혀지지 않고 구겨지지 않고 깨끗하게 보존되는 것이다.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 5:23)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벧후 3:14) 그러나 살다보면(우리가 범죄치 않으시고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 예수님이 아닌 이상) 우리가 입은 그 옷은 더럽혀지고 구겨지고 우리의 발에는 죄의 흙들이 묻어난다. 묻어날 수 밖에 없는 것이라기보다는 묻어 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딛고 있는 땅이 바로 흙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에겐 물두멍이 필요한 것이다. 침례 받을 때 우리의 모든 죄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새생명으로 부활하여 새롭게 된 그 대로 한번도 죄짓지 않고 살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실상은 어떠한가? 우리 모두는 죄인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어느 누구가 여기서 '나는 죄없다'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살면서 더럽혀지고 구겨지는 우리의 그리스도의 옷을 깨끗하고 주름잡힘이 없도록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요 13:10)고 하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렇게 연약한 우리들 때문에 하늘 “휘장 안으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히6:20)다고 한 것이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의 물두멍이 되어 주셔서 “마음으로는 원치 않지만 육신이 약하여” 짓는 모든 죄들을 씻으시는 샘물이 되어 주시는 것이다. 흠이 없는 삶은 우리가 스스로 노력하여 얻어지는 것도 아니며 우리가 선한 행위와 공덕의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직 흠 없고 점 없는”(벧전 1:19) 분은 ‘어린양’ 예수님 뿐이며 “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히 9:14) 분은 ‘그리스도’ 뿐이시다 바로 그 흠이 없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만이 우리를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골 1:22)실 것이며,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하실 자”(유 1:24)이시다. 칭의의 주체도 예수이시며 성화의 주체도 예수이시고 우리를 긍극적으로 영화롭게 하시는 분도 오직 예수이신 것이다 제일 먼저 사망에 놓였있어던 우리, 죄로 죽었던 우리들이 어떻게 의롭게 되고 거룩하게 되고 완전하게 되었는가를 곰곰이 생각하면 그리스도인 삶이 완전해지는 것에 대한 답이 저절로 나오게 되어 있다. 의롭게 되는 처음 과정은 전적으로 예수님에 의해서이고 그 후 거듭난 사람이 사는 과정은 예수님의 은혜와 우리의 노력이 더해져서 우리가 온전하고 흠없는 생애를 산다고 생각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사고이다. 우리 구속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모두가 오직 예수로 말미암아, 예수 때문에, 예수를 통하여, 예수 덕분인 것이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 1:6)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살면서 겪은 심적인 갈등을 로마서 7장에서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그의 결론은 “내 속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이다.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행하는 자신의 처절한 무능력을 보면서 자신이 ‘곤고한 사람’이며 ‘사망의 몸’임을 시인하고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롬8:25)고 한다. 결론이 예수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유일한 안전과 완전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것임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죄와 사망의 법]이 아닌, [생명의 성령의 법]아래 믿음으로 사는 사람의 생애이며 “율법에서 벗어나” [의문의 묵은 것]이 아닌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는 생애인 것이다(롬8:1,2 ; 7:6참고). K토대 K목사는 그래서 이 로마서 7장을 바울이 거듭남을 경험하기 전의 일이라고 하지만, 로마서 1장부터의 순차적인 내용과 7장의 내용을 상고할 때 로마서 7장은 분명히 사도 바울의 거듭난 이후의 영적 생애에서의 갈등을 묘사하고 있다 로마서 1장, 2장에서는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서 [죄인]들임을 선언하고, 이러한 죄인들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이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롬3:22)임을 3장에서 말씀하고 4장과 5장에서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구체적인 방법을 아브라함의 예를 들어 설명하고, 6장에서는 그러한 믿음으로 거듭난 이들이 예수와 함께 침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하는 경험과 거듭난 이들이 [의의 종]이 되어 ‘거룩에 이르는 열매’를 얻어야 함을 말씀하고 있다. 그러면서 7장에는 그런 거듭난 이들 곧 죄에서 해방되어 의의 종이 된 이들이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므로’ 죄짓지 않으려는 ‘마음의 법’과 우리를 죄로 끌어 당기는 지체속에서의 한 다른법과의 싸움으로 인한 영적 생애의 갈등을 적나라하게 묘사하면서, 결국 8장에서 우리의 영적 삶의 유일한 승리의 방법, 이기는 방법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것”임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7장이 바울의 거듭난 이후의 경험임을 알게 하는 것은 7장의 서두의 ‘남편 있는 여인이 생전에 법에 얽매여 사는’ 비유도 그렇고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4절)다는 것도 그렇고,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5절)라는 말, 그리고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6절)다는 말 등 등 거의 모든 구절마다 바울이 그리스도를 만나고 침례를 받고 거듭난 이후의 자신의 경험을 말하고 있음을 한눈에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거듭난 우리는 [생명의 성령의 법] 아래 다른 말로 [오직 믿음의 법](롬3:27) 아래, 즉 [오직 예수 믿음 안에서] 산다 거듭날 때와 똑같이 ‘오직 예수를 통해’ ‘오직 예수로 말미암아’ ‘오직 예수에 의해’서 사는 삶이 거룩의 생애, 이기는 생애, 의로운 생애, 완전의 생애인 것이다. 그러한 생애에는 언제나 안전함이 있다. 그래서 로마서 8장의 결론이 무엇인가?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7) 우리가 하늘 가나안을 정복하는데 방해가 되는 것들을 이기는 유일의 방법은 바로 이것이다. “예수로 말미암아”인 것이다. ‘우리가 죄를 한번도 짓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을 믿는 것이 갈렙과 여호수아의 믿음이 아니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민14:9)는 믿음이 그들의 넉넉히 이기게 하는 믿음이었던 것이다. 우리가 일상 생애 속에서 육신이 약하여 짓는 작은 죄들이 우리의 원수이거나 가나안 땅의 아낙 자손이 아니고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정복할 수 있다’는 영적 자만심이 우리의 원수이고 아낙 자손인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평생이 소망인 거룩함의 주체는 오직 하나님이시다. “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살전 5:23) 결단코 '우리 스스로의 힘'이 아니다. 갈렙과 여호수아를 제외한 열명의 정탐군들은 여호와가 함께 하시고 여호와로 말미암아 정복한다는 믿음을 상실하고 ‘그들 스스로’ '인간의 힘으로‘ 정복해야 한다는 생각이 아낙 자손을 무섭게 본 것이고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민13:31)고 결론 내린 것이다. 그러나 갈렙은 “여호와께서 ...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민14:8)는 믿음을 가졌고 “오직 여호와”(민14:9)였다. 그래서 갈렙은 아낙 자손을 “우리의 밥”(민14:9)으로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오늘 우리가 완전을 이야기할 때 논점은 바로 이것이다 완전론자들의 그동안의 논리는 분명하다. 그들은 첫째, 성경에 온전하라고 했다 둘째, 예언의 신 곳곳에 우리는 생각까지 죄 짓지 않을 수 있다고 했고 예수님과 같은 죄짓지 않는 완전한 생애를 살 수 있다고 했다 셋째, 이것은 가나안을 주리라고 한 하나님의 약속과 같다 넷째, 그런데도 우리가 죄짓지 않는 완전한 생애를 살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열명의 정탐군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는 믿음 없는 사람들이다. 위에서 살펴 본 것처럼, 가나안에 땅의 아낙 자손은 우리가 일상 생활속에서 마주치고 어쩔 수 없어서 묻혀지는 죄의 흙들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선을 행하고 의를 이루고자하는 인간의 노력‘인 것이다. 우리 힘으로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오직 예수로 말미암고, 오직 예수 안에서만 가능한 이것을 ‘우리 스스로 할 수 있다’고 믿는 신앙 소위 완전론이야말로 우리가 능히 이길 수 없는 아낙 자손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거듭날 때,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길 때 가졌던 동일한 믿음을 행사하여 ‘오직 예수로 말미암아’ ‘오직 예수를 통하여’ 나의 죄를 위한 대제사장으로 나를 위해 지금도 간원하시는 대언자, 중보자 예수를 믿는 믿음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믿는 그 믿음이 바로 가나안을 능히 정복할 수 있고 아낙 자손을 능히 이길 수 있는 갈렙과 여호수아의 믿음인 것이다. 다음의 성경절들이 그러한 우리의 믿음을 명명백백히 드러내 주고 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 15:57) 우리의 영적 생애에서 우리의 촛점이 [예수]가 되지 않고 [죄]가 되면 우린 승리할 수 없는 것이다 완전론주의자들의 말처럼 [죄] 자체를 아낙자손으로 보고 그것에 온 주의력을 빼앗기면 위험천만하다 그래서 성경은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히 12:2)고 한 것이다 물론, 우리의 푯대는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 자라나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최종적인 목적지이며 이 땅에서 그리스도를 힘입어 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매일 소망하면서 달려가고 있는 부름의 상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과 같은 무흠하거나 전혀 죄짓지 않는 완전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예수님의 죄없는 생애를 닮아가고 모방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리스도와 [똑같은] 생애를 살수 있다고 스스로 속여서는 안된다. 만일 우리 인간이 전혀 죄짓지 않는 생애를 살 수 있었다면 전능하신 여호와가 인간이 되어 [예수]가 될 필요가 없었다. 우리가 아무리 1년동안 한번도 죄짓지 않고 실수하지 않았더라도 그 다음날 죄 지으면 [죄인]이 되는 것이다. 우리의 완전과 안전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분으로 말미암아서이지 불신에 빠졌던 열명의 정탐군들처럼 ‘그들 스스로의 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을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빌 3:15)이라는 온전한 사람으로 묘사하면서도 자신이 긍극적으로 도달하여야 할 목표점과 닮아야 할 표본은 죄없고 죄도 범치 않으시고 죄를 알지도 못하시면서 죄에서 승리하시고 흠없는 생애를 사신 그리스도임을 시인하면서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좇아가노라“고 한 것이다. 그러면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하라 했고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빌 3:16)고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무흠하고 죄없고 죄짓는 않으신 온전한 생애는 바로 우리를 위한 것이며 우리가 닮고 모방해야할 끊없는 목표점이요 그것을 향해 오늘도 달려 가야할 푯대인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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