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론 (5)-욥의 고난과 눈으로 뵙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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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론 (5)-욥의 고난과 눈으로 뵙는 하나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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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완전 문제를 다룰 때 꼭 한번쯤 생각할 인물이 바로 욥이다. 욥에게는 왜 유사 이래 그 어느 누구에게서 그 유래를 찾아 볼 수 없었던 무서운 사단의 시험이 오게 되었는가? 아니, 왜 하나님께서 사단에게 그 시험을 허락하셨는가? 욥이 받은 필설로 묘사하기 힘든 그 시련의 참된 목적은 무엇이었는가? 말이 그렇지... 하나님을 경외하고 순전하고 정직하고 가족들과 단란한 가운데 살던 욥에게 어떻게 그와 같은 무서운 시련과 시험이 올 수 있는가? 어느날 갑자기 소와 나귀를 빼앗기고 종들이 칼로 죽임을 당하고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양과 종들을 사루고 타인에게 약대를 빼앗기고 종들이 죽임을 당하고 대풍으로 인해 자녀들이 몰살 당하고.... 게다가 욥 자신의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악창이 나고 아내까지 저주를 퍼 붓고 친구들마져 온갖 논리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를 공박할 때 욥의 심정은 어떠했겠는가? 아니, 정말 나와 우리가 그와 같은 시험을 어느날 갑자기 당한다면 과연 나는 욥과 같이 견뎌낼 수 있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그가 당한 시련의 백분지 일만 당해도 불평과 원망을 일삼고 “왜....나에게...”라고 의문을 제기하는 나같은 사람으로서는 가히 상상할 수 없고 생각조차 하기 싫은 무서운 시련이다. 그런데 왜 욥에게는 그와 같은 시험과 시련이 혹독하게 이르렀는가? 욥은 누구인가?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욥 1:1) 이러한 객관적인 평가 외에 욥 자신도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너희는 돌이키라 내 일이 의로우니라 “내 혀에 어찌 불의한 것이 있으랴 ”(욥 6:29-30) “의롭고 순전한 자가 조롱거리가 되었구나”(욥 12:4) 욥 자신이 자신에 대해 이렇게 의롭다고 자신했던 근거가 있다. “이는 내가 부르짖는 빈민과 도와 줄 자 없는 고아를 건졌음이라 망하게 된 자도 나를 위하여 복을 빌었으며 과부의 마음이 나로 인하여 기뻐 노래하였었느니라 나는 소경의 눈도 되고 절뚝발이의 발도 되고 빈궁한 자의 아비도 되며 생소한 자의 일을 사실하여 주었으며 불의한 자의 어금니를 꺾고 그 잇사이에서 겁탈한 물건을 빼어 내었었느니라”(욥 29:12-17) “ 내가 내 눈과 언약을 세웠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 언제 나의 행위가 허탄하였으며 내 발이 궤휼에 빨랐던가 언제 내 걸음이 길에서 떠났던가 내 마음이 내 눈을 따라갔던가 내 손에 더러운 것이 묻었던가 언제 내 마음이 여인에게 유혹되어 이웃의 문을 엿보아 기다렸던가 남종이나 여종이 나로 더불어 쟁변할 때에 내가 언제 그의 사정을 멸시하였던가 내가 언제 가난한 자의 소원을 막았던가 과부의 눈으로 실망케 하였던가 나만 홀로 식물을 먹고 고아에게 먹이지 아니하였던가 실상은 내가 젊었을 때부터 고아를 기르기를 그의 아비처럼 하였으며 내가 모태에서 나온 후로 과부를 인도하였었노라”(욥 31:1-33) 너무도 많아 대략적인 것들만 적어 보았다. 정말 욥은 대단한 인물이다. 이 정도면 예수님을 빼놓고는 당연 오늘날 소위 완전주의자들의 완전한 유일무이의 표본이 아니던가? 나같은 사람은 목회자이지만 가히 욥을 흉내내는 수준도 못된다. 자신들의 의로움을 포장하고 과장하여 나타내는 일반 사람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경지임에 틀림이 없다. 욥은 정말 도덕적으로 완전하고 윤리적으로 완전하고 참으로 성경의 기록 그대로 정직하고 순전하고 의로운 인물임에 틀림이 없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성경은 한 사람의 이야기를 갖고 42장의 장을 할애하면서 우리에게 그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을까? 하나님이 그 기나긴 장들을 통해 오늘 우리가 깨닫기를 원하시는 기별은 무엇일까? 욥은 자신의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완벽하고 온전한 생애가 곧 [의]이며 [거룩]이며 [구원]이며 [완전]인줄 알았다. 그렇게 자신이 무엇을 하고 무엇을 안하고의 [행위적인 것들]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영원한 생명의 보장인 줄 알았다. 그의 변박의 글 곳곳에서 그러한 욥의 자신만만함을 엿볼 수 있다. “내가 스스로 의로운 줄 아노라”(욥 13:18) “내가 의로 옷을 삼아 입었으며 나의 공의는 도포와 면류관 같았었느니라”(욥 29:14) 이러한 욥의 변박함에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 가운데로서 욥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욥 38:1-3) 우주에서 먼지같은 이 작은 지구에서 그것도 우스 땅이라는 자그마한 한 곳에서 거기에서도 지극히 작은 한 사람 욥이라는 사람이 선을 행하고 어려운 자들을 도와주고 마음으로나 생각으로 죄를 짓지 아니하고 범죄치 않았다는 사실 등이 우주 만국을 통치하시고 온 세계 만민을 다스리시고 지구의 모든 생명체와 생물체들을 창조하시고 그것들의 생존과 생명을 위해 보이지 않는 손길을 통해 역사하여 붙드시는 그 하나님 앞에... 그리고 의 자체이시며 거룩 자체이시며 완전하신 그분 앞에.... 욥의 그 모든 의로움과 선한 행위들은 도대체가 무엇이란 말인가? 은하군속에 보이지도 않는 먼지보다 못한 이 지구 모습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하나님은 "네가 의로우므로 나를 악하다고 하느냐?"고 욥을 꾸짖으셨다. 하나님의 차근차근한 모든 말씀을 듣고 욥은 겸손히 머리를 조아려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주께서는 무소불능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42:2~5). 그리고 욥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욥 42:6)였다. 누가 봐도 정직하고 순전하고 의롭게 살았던 욥 성경의 인물들 중 타의 추종을 불허할만큼의 선한일을 하며 생각으로까지 범죄하지 않았던 욥! 그리고 자신의 모든 의로운 행위들을 곧 [의], [거룩], [완전]이라고 자부하면서 살았던 욥은 그와 같은 길고도 모진 시련과 고통의 연단이 아니고서는 하나님만이 우리의 의이고 주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거룩함이요 온전함임을 깨달아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그 어느 누구도 이룰 수 없는 의로움과 거룩한 경지에 올라선 욥에게 그 어느 누구도 겪지 못한 시련과 고난이 있어야만 했던 그 충분한 이유와 섭리를 우리는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욥은 유래없었던 그와 같은 혹독하고 무서운 시련이 아니었다면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썼”(롬10:3)던 이스라엘과 다를 바 없는 “하나님께 열심”만 있었던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의 필설로 묘사하기 힘든 시련의 과정은 바로 귀로만 듣던 하나님을 친히 눈으로 뵈옵는 은혜를 그에게 가져다 주었다. 우리도 때때로 우리들이 이 땅에서 행하는 모든 의로운 행위들, 선한일들, 죄짓지 않는 순전함, 정직함과 헌신의 생애 그 모든 것들이 곧 의, 거룩, 완전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가? 완전주의자들의 착각은 바로 눈으로 주님을 친히 뵙기 전의 욥과 같은 [자기 의]에 대한 자부심과 같은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완전을 인간 영역안에서의 상대적인 완전이 아닌, 하나님과 같은 절대적인 완전인양 백성들에게 제시하고 우리가 이 땅에서 무엇을 하고 안하고의 [행위]들이 마치 그 완전을 이루어가는 수단인 것처럼 말한다 단 한번만이라도 범죄하면 하나님이 당신의 독생자의 고귀한 희생을 근거로, 그리고 믿는 자의 믿음을 통해 선물하신 [칭의]가 순간 날라 가 버리는 것으로 제시하면서 거듭난 사람은 전혀 죄를 지을 수 없으며 죄 짓지 않는 완전에 이르러야만 구원에 이르고 144000인같은 특별한 무리들로 인침을 받아 살아서 구원을 얻고 영원토록 우주에서 칭송을 받을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자신들 스스로 믿는 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문제는 자신들이 그러한 행위적인 것들로 완전의 높은 영적 경지에 올라서 있다고 착각하고 그렇게 믿지 않는 사람들은 ‘죄 짓는 것이 당연하다’ ‘우리는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고 단정지으면서 그러한 그리스도인들은 죄를 조장하고 죄짓는 것을 즐겨하는 사람들로 비난하고 비평하는 것이 더욱 큰 그들의 문제인 것이다. 과거에 ‘시골생활’ 혹은 ‘개혁’하면 떠 오르는 인물이 K.T.B씨였다. 그분은 철저한 시골생활에 철저한 음식물 개혁을 부르짖으면서 자녀들 모두 초등학교도 안 보냈다. 그리고 그 자녀들은 학교 문턱도 안 가보았지만 악기를 다루고 왠만한 것들은 스스로 할 수 있는 기술들을 연마시켜 그 자부심이 대단하였다. 그 아들 중 한분이 과거 J목사가 주도했던 개혁파에서 당시 번역이 안되었던 예언의 신들을 번역도 하고 출판하고 했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산에서 나무를 하다가 [옻나무]에서 [옻]에 올랐다 약을 쓰면 간단히 치료 될 수 있는데 화잇 부인이 약을 쓰지 말라고 했다고 그냥 버티다가 결국 그 일로 목숨을 잃고 말았다 선지자의 권면을 대단히 잘못 인식하고 오용한 사례라고 본다 그런데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남들은 극단주의자들이 결국 미련하게 구원도 받지 못하고 죽었다고 비아냥 거렸지만, 그 스스로는 얼마나 자기 나름대로 하나님을 사랑하였으면 미련할 정도로 ‘글자’ 그대로 순종하였을까하고 생각하면서 구원 문제는 하나님만이 결정하실 수 있는 것이기에 훗날 주께서 그를 긍휼히 여겨 주실 것이라고 혼자 생각을 해 보았다. 좀 극단적인 예를 들었지만 완전론주의자들이나 극단주의자들이 자신들 혼자 그렇게 잘못된 생각에 빠져 있는 것은 이해하나 위의 예처럼 간단한 약을 사용하면 너무도 쉽게 나을 수 있는 것을 예언의 신의 문장과 단어를 극단적으로 이해한 나머지 아까운 생명을 잃을 정도로 무식하고 미련한 짓을 하면서 남들에게 그렇게 가르치고, 그럴 경우 약을 사용하는 이들을 향해 비난하고 정죄하는 것은 아주 큰 문제라는 것을 지적하고 싶은 것이다. 다시말하지만, 완전주의자들이 단상에만 서면 기성 교회들을 예를 들면서 늘 상 비난하는 것처럼, 나를 비롯하여 대개의 목사들이 성도들을 향하여 ‘우리는 연약하여 어쩔 수 없이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존재들이다’라고 가르치지 않는 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목사들과 지도자들이 우리들도 연약에 쌓여 있는 존재들이고 혹 실수하고 넘어지는 경험속에서도 언제나 성도들에겐 ‘죄 짓지 않는 성결의 생애’ ‘예수님의 아름다운 품성을 닮아가는 경건한 생애‘ ’그리스도에게까지 날마다 성장하고 자라나면서 영화에 이르는 삶‘을 강조하고 가르치고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예수님처럼 생각으로까지 범죄하지 않는 긍극적인 푯대를 제시한다는 사실이다. 중요한 것은 완전주의자들처럼 우리가 이 땅에서 의롭게 행하고 선을 행하고 정직하고 순전하게 사는 구별된 그리스도인의 행위적인 것들은 그것 자체가 곧 우리의 의, 거룩, 완전이 아니며 그렇게 살 때 완전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고 우리는 믿는 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무엇을 하고 노력하여 완전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예수를 구주로 믿어 침례를 받는 사람은 그 순간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며 의롭게 되며 완전한 자로 여김을 받는 다는 것이다. 우리의 그리스도인의 첫 발걸음은 완전한데서 시작하는 것이지 칭의받은 우리가 불완전하여 성화의 단계에서 노력하고 애를 쓰고 죄를 짓지 않고 범죄치 않을 때에만 완전에 이르른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야말로 주께서 자신을 십자가에 단번에 드려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는 히브리서의 말씀을 부인하는 것이다 칭의된 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무흠한 자로 인정되며 거룩한 자는 완전하 자이며 예수 안에 있는 자는 한번도 범죄치 않은 완전한 자로 여김을 받는 것이다. 칭의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의 이름은 하늘 생명책에 기록되며 그에겐 영원한 몸의 구속의 날까지 성령께서 내재하시고 그를 주장하신다 그래서 그가 연약하여 범죄하거나 실족하면 즉시 성령은 세미한 음성으로 우리의 죗된 모습을 적나라하게 느끼고 깨닫도록 역사하시고 회개를 머뭇거리거나 미루는 이들을 위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시면서 때로는 시기하시기까지 간구해 주시는 것이다. 이렇게 칭의로 완전한 자들이 바로 우리같은 죄인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그 예수님을 진정 사랑하는 마음으로 순종하여 주님이 육신을 쓰시고 이 땅에서 보여 주신 아름다운 죄없는 생애를 흠모하면서 날마다 영의 양식과 신앙 생활의 다양한 경험을 통해 예수님에게까지 자라나고 성장하는 과정이 바로 우리가 평생 과업이라고 하는 성화중에 자라나는 과정들인 것이다. 우리가 어떤 경지에 올라서고 어떤 선한 행위들을 본 받아야 칭의된 자가 완전케 되는 것이 아니고 온전한 중에 더욱 온전한 푯대를 향해 자라나는 것이므로 그러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 과정 과정마다 완전한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를 온전케 하시기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과 거저 주시는 은혜 가운데 서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성화 중에 자라나면서 넘어지고 자빠지는 실수를 거듭하면서 점점 그리스도의 품성을 닮고 그리스도와 같은 생애를 모방하는 것도 우리의 힘이나 노력이나 행위의 댓가가 아닌 우리속에 거주하시면서 능력을 주시고 우리를 위해 시기하면서까지 우시면서 간구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가능한 것이며 우리가 일상적인 작은 죄들을 이기고 승리하는 것도 여전히 우리에게 능력주시는 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우리가 1년동안 한번도 죄를 짓지 않다가도 단 한번만 죄를 지으면 우린 죄인일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유일의 안전은 우리가 제일 처음 예수님을 믿고 받아 들일 때의 그 믿음을 잃지 않고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마귀의 자녀의 신분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옮긴 바로 그 믿음을 활용하여 언제나 늘 예수 안에 있을 때 우린 항상 [완전한 자]로 여김을 받는 것이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3-34) 이제, 완전주의자들이 성품변화의 대표적인 무리들로 묘사하고 죄짓지 않는 완전의 표본으로 제시하는 14000인으로 통칭된 마지막 세대가 겪는 경험을 선지자의 글을 중심으로 생각해 보면서 그들이 과연 완전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그러한 무리들인지를 알아보자. 먼저, 144000인이 누구인가? 간단히 정리하면, 예수 재림시까지 살아있어서 개국이래 없었던 대환난 기간을 통과하고 살아있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재림을 맞을 자들이다. 그렇다면, 야곱의 환난이라 일컫는 대환난기에 처한 그들의 상황을 묘사한 선지자의 글을 인용해 보자 “하나님의 백성들이 범죄한 것에 대하여 사단이 비난함으로 주님께서는 그들을 끝까지 시험하도록 사단에게 허락하신다. ..... 과거를 회고할 때 그들의 희망은 사라진다. 왜냐하면 그들의 온 생애에서 선을 거의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의 연약함과 무가치함을 완전히 깨닫는다. 사단은 그들의 상태가 절망적이며 그들의 오점은 영원히 씻어 버릴 수 없다는 생각을 갖게 함으로 그들을 위협하고자 노력한다. 그는 그들의 믿음을 파괴시킴으로 그들이 그의 유혹에 굴복하고 하나님께 대한 충성을 버리게 하고자 희망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들을 죽이고자 열광하는 원수들에게 에워싸일지라도 그들이 겪는 고민은 진리를 위하여 당하는 핍박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다. 그들은 아직껏 모든 죄를 다 회개하지 못하지나 않았는가, 혹은 그들의 어떤 결점 때문에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계 3:10)라고 하신 구주의 약속을 성취시키지 못하지나 않을까 하고 두려워한다. 만일 그들이 용서를 받았다는 보증을 얻을 수만 있다면 그들은 고문이나 죽음 앞에서도 위축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만일 무가치함이 입증되고 그들 자신의 품성의 결함 때문에 그들의 생명을 잃어버리게 되면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이 치욕을“그와 마찬가지로 환난의 때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고민과 공포로 괴로워할 동안 만일 아직 자복하지 아니한 죄가 그들 앞에 나타나게 되면 그들은 압도당하고 말 것이다. 절망이 그들의 믿음의 줄을 끊어 버리고, 그들은 더 이상 하나님께 도움을 애원할 확신을 갖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무가치함을 깊이 느끼고 있는 동안 그들의 잘못을 고백하지 않고 숨겨둔 것이 하나도 없다. 그들의 죄는 이미 심판정에서 도말되었다. 그들은 그 죄들을 다시 생각해 낼 수 없다.”(쟁투, 620) 위의 인용절에서 마지막 환난기에 처한 144000인들은 죄없는 완전이나 죄짓지 않는 완전의 생애를 살았다는 기록은 눈을 씻고 봐도 없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면서 연약함으로 넘어지고 실족하여 범죄할 때마다 철저하게 자신의 대언자이시며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를 힘입어 죄를 회개하고 자복하여 모든 죄들을 도말받고 용서받은 의인이요, 거룩한 자요, 온전한 사람들인 것이다 정말 흠없는 그리스도 앞에서 선한 것을 전혀 발견할 수 없는 무가치한 존재들임을 시인하면서 그리스도의 중보가 그친 그 위기에 때에 이전보다 더 큰 믿음을 활용하여 예수를 굳게 의지하고 그리스도와 화친하고자 그들은 더욱 더 주께 야곱처럼 메달리면서 자비와 은혜를 구하는 자들인 것이다. 그래서 144000인을 처음으로 언급한 계시록 7장에 보면, 그 구성원들이 바로 다름이 아닌 야곱의 열 두 아들들로 구성되어 있다 각기 다른 개성과 성격, 경험과 환경속에서 실패와 좌절, 갖가지 험한 경험들 속에서도 결국 믿음으로 승리한 그들의 이름들과 경험들이 뜻하는 그 열 두 이름의 각 지파에서 바로 다름이 아닌 1440000인들이 구성된다는 것이다 흠없는 생애의 모본이었던 요셉 지파같은 이들도 있고 반대로 욕정과 혈기와 보복등을 상기시키는 루으벤이나 시므온, 레위 지파 등도 있는 것이다. 그들의 공통점은 여러가지 환경속에서도 오직 예수 믿음으로 승리한 무리들인 것이다. 그래서 선지자는 마지막 순간까지 남은 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믿음임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우리 앞에 있는 고난과 고통의 시기는 우리에게 피로와 지연(遲延)과 주림에 견딜 수 있는 믿음, 곧 격렬하게 시련을 받을지라도 쇠약해지지 아니할 믿음이 필요하다. ”(쟁투, 621) 그리고 오늘 우리의 완전은 여전히 ‘그리스도 안에서의 완전’임을 확인해 주고 있다. “우리의 대제사장께서 우리를 위하여 속죄하고 계시는 오늘날,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하여지고자 노력해야 한다. ”(쟁투, 623) 그렇다면, 다음의 말씀은 무엇인가? “우리 구주께서는 비록 생각으로라도 유혹의 힘에 굴복당하지 않으셨다. .....그것은 환난의 때에 서게 될 사람들에게 반드시 나타나야 할 상태이다.”(쟁투, 623) 우리는 매일 마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면서 유혹의 힘에 굴복하지 않는 영적 힘을 길러야 한다. 그래서 생각으로라도 범죄치 않는 그리스도와 같은 최종적 단계에 이르는 것이 우리를 향한 아버지의 뜻이며 우리가 도달해야할 푯대인 것이다. 오늘 아직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성소에 머무시면서 우리를 위해 대언하시는 때에 우리는 더욱 철저하게 죄들을 멀리하고 죄에서 떠나야 하며 생각으로까지도 범죄치 않도록 기도하고 말씀을 가까이 하고 시대적인 징조들을 분별하면서 깨어서 경성해야 한다 성도들의 죄짓는 일이 그쳐져야 대제사장의 직무가 끝나게 되고 주께서 드디어 이 땅을 향해 오시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푯대를 향해 매진하다가도 때로는 우리 자신들도 모르게 우리 옷이 더러워지고 구겨지고 주름 잡히게 될 수 있다. 그럴지라도 우리는 낙망하지 않고 자신의 연약함을 철저하게 자복하고 회개함으로 점과 흠과 티나 주름잡힌 것이 없도록 해야 한다 우리 범과들을 온전하게 도말 시켜 주시는 예수께서 아직 하늘 지성소에서 우리를 위한 대제사장직을 마치지 않았기에 그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며 주의 도말시켜 주시는 은혜를 통해 우리는 비록 실족하였을지라도 여전히 예수 안에서, 예수 믿음을 통해 한번도 죄짓지 않은 사람처럼 담대하게 설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이 완전한 사람이다. 이렇게 철저하게 매일의 생애속에서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고 그러면서 죄를 멀리하고 죄를 미워하면서 성화 중에 점점 성장하여 그리스도 예수에게까지 장성한 성도들이 마지막 최후의 환난의 때에 오직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들로 점과 흠없이 하나님 앞에 설 자들이며 온전한 자들이 되어 신랑 예수께서 오실 때 제일 먼저 달려 나가 예수님을 영접하는 처음 익은 열매로 구속받는 무리들이 될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동안 귀로만 듣던 이론적이고 신학적이고 교리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눈으로 친히 뵈옵는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우리가 실제 경험하고 체험하는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오늘 우리에게 여러 갖가지 이설들과 주의들로 우리를 시련하는 것은 어쩌면 욥을 사랑하셔서 주셨던 사랑의 과정들일 수 있다. 나는 실제로 그렇게 욥처럼 자기 의를 세우면서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사는 이들에게 현대 의학도 판정할 수 없는 정체불명의 혹독한 질병에 시달리며 고생하는 분들을 만나본적이 있다. 욥처럼, 그동안 우리 자신들의 인간적인 의와 자기 의속에서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살았던 지난날 우리의 과오들을 한하며 티끌과 재 가운데 앉아 욥처럼 회개하는 겸허한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 그럴때 욥에게 시련 후에 주셨던 풍성하고 다함 없는 축복이 이르게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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