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론(4) -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아야 할 다른 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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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론(4) -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아야 할 다른 복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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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된 생애”는 정상적인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어느 누구나가 다 소원하는 이상적인 삶이다. “죄짓지 않고 죄 없는 삶”은 재림성도라면, 누구든지 그날이 오기를 소망하면서 살아 갈 것이다. “예수님과 같이 생각으로까지 범죄치 않는 생애”는 경건한 성도들이라면 누구든지 바라고 그것을 목표로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죄없는 완전한 삶”을 원하기에 죄의 영향과 결과에서 영원히 건지실 재림의 아침을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그리스도인의 온전한 삶을 말할 때 그 ‘온전’이 우리의 행위와 관계가 있다고 믿으므로 우리가 무엇을 먹고 안먹고 하고 안하고의 여부에 따라 온전이 좌우된다고 믿는 완전주의와 '온전‘하신 분은 오직 예수밖에 없으시며 우리를 완전케 하실 분은 오직 주밖에 없고 우리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과 거저 나눠주시는 은혜를 통해서만 그 온전이 영원하다고 믿는 것에는 천지간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칭의도 구원이다 성화도 구원이고 영화도 구원이다 구원의 방법은 창세 이래로 동일하다 ‘오직 예수 믿음으로’ ‘오직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오직 예수를 통하여’ ‘오직 예수님 때문에’ ‘오직 예수 안에서’이다. 칭의는 오직 예수이지만 성화는 거기에 우리의 행위가 포함된다고 하는 것이 바로 다른 복음이다 그러한 오해는 성경에서 말하는 칭의와 성화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다 세상에 "죄악이 관영함“과 사람들의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창6:5,6)일 때, 오직 유일하게 의롭다고 인정된 자가 바로 노아이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창7:9) 노아가 의인이며 완전한 자라고 했는데, 그 뒤로 성경 두어장만 넘겨 보면 "노아가....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창9:10,11)고 기록되어 있다. 완전한 자, 세상이 모두 물로 몰살 당하여 멸망 받을 때 유일하게 택함 받은 한 가족의 수장 그것도 120년동안 사악한 세상을 향해 의의 기별을 전했던 사람 게다가 죄 때문에 세상이 완전히 멸망당하는 모습을 친히 목격한 그 완전한 사람이 어떻게 술에 취해 벌거벗고 있을 수 있을까? 완전히 알콜 중독자 수준이 아니던가? 하나님이 코 앞에 있을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하시어 노아를 당세의 의인이요 완전한 자라고 하진 않았을 것 아닌가? 하나님이 노아가 홍수 직후에 그런 '실수'를 할 것을 아시고도 그를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로 인정하신 것은 왜일까? 중요한 것은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창7:8)는 사실이다 은혜를 입었기에 그가 연약하여 행위로는 불완전하고 생애로서는 불의한 일을 행하여도 '예수 안에서' 완전한 자로 여김을 받고 인정을 받은 것이다. 이러한 성경의 사실은 우리의 의로움과 거룩함과 완전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주시고 허락하시는 선물이지 우리가 행위를 통해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노아가 인간적인 실수와 연약함이 있었을지라도 당대 완전한 사람으로 그를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똑같은 방법이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어진다.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눅 17:26) 칭의된 사람은 거룩한 사람이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고전 6:11) 칭의를 받는 동시에 우린 성화 중에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이렇게 성화 중에 있는 사람은 정말 죄를 지을 수 없고 범죄하면 그 즉시로 칭의에서 떠나버리고 처음부터 새롭게 다시 시작해야 하는가? 노아의 경우는 결코 그렇지 않았다. 아니 성경에 믿음으로 산 모든 사람들의 경우를 보더라도 결코 그런 사실이 없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설명할 때 대표적인 인물로 성경이 내세우는 아브라함의 생애를 살펴 보면 칭의와 성화 문제에 대한 확실한 해답을 얻을 수 있다.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그 믿음을 의로 여겨 주“셨다. 즉 칭의된 것이다. 그러면서 성경은 아브라함이 성화중에 자라나면서 겪는 인간적인 실수와 잘못들을 적나라하게 우리에게 공개해 준다. 그는 두 번씩이나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잃고 아내를 누이라 속이고 자신이 믿어 의에 이른 엄연한 사건을 망각한채로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약속된 아들을 낳아 보려고 시도하여 이스마엘을 낳는 등의 실수를 하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이미 칭의된 아브라함의 생애속의 인간적인 실수나 죄 때문에 하나님이 그에게 약속한 이삭에 대한 약속이 변경되거나 취소되지 않았으며 또한 믿음으로 받은 칭의가 취소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마음으로는 원치 않지만 육신이 약하여 실족하는 아브라함을 하나님은 무한한 인내로 참으시면서 아브라함의 믿음이 자라나고 성장하도록 도우시고 섭리하시고 역사하셔서 긍극적으로 모리아 산에서의 놀라운 변화를 이끌어 내셨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기록은 우리에게 무엇을 깨닫게 하는가? 아브라함은 우리 믿는 자의 조상이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 자들의 표본으로 이러한 기록은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롬 4:16) 해당이 되는 것이다.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롬 4:23-24) 예수를 믿는 우리들에게도 동일한 하나님의 은혜가 적용이 된다. 우리가 예수 믿음으로 의롭게 된 이후 화를 내거나 단 한번만이라도 죄를 범하면 칭의에서 떠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다함이 없는 사랑의 품성을 오해하고 우리 죄를 그 몸에 담당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우리를 위해 죄없는 생애를 대신하신 예수님의 구속의 사역의 본질을 곡해한데서 오는 잘못된 칭의론인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한번 실수하면 즉각적으로 칭의에서 떠난다면 그는 순간 마귀의 자녀이며 사망이며 없는 자에 불과한 것이다. 그게 사실이라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합하여 침례를 받음으로 입게 된 의의 옷 두루마기를 빨아야 할 이유도 없고 점과 흠과 주름잡힌 것이 없게 해야 할 이유도 없다. 범죄하여 이미 벗겨진(없어진) 옷을 어떻게 빨고 흠없게 할 수 있겠는가? “너희가 악할찌라도...”라고 하시면서 인간의 부모보다 더 지극한 사랑으로 우리를 돌보신다고 하신 하나님이 우리가 한번 범죄하였다고 예수님의 그 고귀한 희생을 댓가로 하여 입혀주신 선물을 가차없이 빼앗아 버린다는 것은 얼마나 잘못된 하나님에 대한 오해인가? 한번 범죄하면 옷을 벗겨 버리고 다시 회개하면 또 입혀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범죄하거나 연약하여 넘어지면 그 그리스도의 옷은 더럽혀지고 구겨지고 흠이 생기고 점이 생겨난다. 그 즉시로 침례시에 선물로 주어져서 구속의 날까지 우리를 인치신 우리 안에 내재하신 성령께서 우리 양심에 죄를 깊이 인식하게 하시고 회개하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신다. 우리가 범죄하여 절망속에서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롬 8:26)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는 것이다. “너희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뇨”(약 4:5) 그 성령의 세미한 음성을 듣고 내가 지은 죄를 자복하면서 회개하는 사람의 옷은 다시 점과 흠이 없는 깨끗한 옷이 된다 그래서 성경은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계22:14)라고 한 것이다. 아브라함이 칭의된 이후 지속적인 불신과 믿음의 연약함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더뎌지게 했지만 그 때마다 다시 나타나셔서 언약을 굳게하시고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아브라함은 겸손히 그 말씀들을 다시 신뢰하는 가운데 믿음 안에 굳게 섰고 그러한 아브라함을 하나님은 모리아 산에서의 최종적 시험을 통해 믿음의 정상에 우뚝 서게 하신 것이다. 아브라함의 인간적인 실수와 연약함이 결코 그의 아들된 신분의 변화를 가져오지 않았으며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변경시키지 않았다. 아브라함은 칭의된 이후 성화 중에서 넘어지고 자빠지면서 하나님의 지속적인 은혜를 입어 점 점 충만한데까지 자라나게 된 것이다.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 알지어다”(갈 3:7)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갈 3:9)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 3:29) 우리가 처음 예수 믿을 때 얻는 칭의는 우리 전 생애의 죄에 대한 것이다 침례 받을 때까지만의 죄가 아니라, 우리가 죄중에 출생하면서 가지고 나온 신분적이고 본질적인 죄와 우리가 삶을 통해 짓는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들을 망라하여 용서받고 씻음받는 것이다. 나의 전 생애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새생명으로 부활함을 상징하는 의식이 바로 침례식이다. 내가 미래에 긍극적으로 신령한 몸으로의 변화와 부활을 경험할 것에 대한 확실한 증거가 침례식인 것 동시에 나의 전 생애의 죄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과거, 현재 뿐 아니라 미래의 것들까지 모두, 전부 물속에 장사되어 용서받고 칭의된 것에 대한 보증이 바로 침례식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침례 이후에 짐짓 범죄하거나 부지중에 죄를 지으면 회개를 하는데 그때의 회개를 통해 그날 죄를 용서 받는 것이 아니고 실상은 침례시 이미 내가 믿어 버려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영원히 못 박혀 버린 용서받은 죄를 확인하는 것 뿐이다. 다시말하면 매일의 삶속에서의 회개의 경험은 이미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경험인 침례시에 처리된 죄였음을 다시한번 예수 믿음으로 확인하는 절차에 불과한 것이다. 예수님은 목욕한 자는 발만 씻으라고 하셨다 우리가 자주 세족예식을 하면서 우리는 매일의 삶속에서 우리의 연약함으로 더럽혀지고 구겨진 그리스도의 옷을 흠없고 주름잡힌 것이 없는 것으로 만들면서 그 세족예식(침례의 기념예식)의 ‘죄 용서 영수증’을 통해 다시한번 침례시 영원히 못박힌 나의 죄를 보면서 바로 나의 죄가 무흠하신 어린양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한 것임을 인식하면서 눈물로 아파하고 나의 그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어린양 예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이들이 무흠했던 아담이 선악과를 먹는 동시에 의의 옷이 벗겨진 것처럼 오늘 우리도 한번만 범죄하면 그 즉시로 칭의된 옷이 벗겨진다는 것은 억설이다. 아담은 범죄하여 죽은 것이고 우리는 침례시에 이미 일생의 죄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못박힌 것을 믿고 새생명 가운데로 들어와 있기 때문에 연약하여 범죄하였을 때 이미 그 죄악까지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죽은 것임을 확인하고 그 순간에 나의 죄를 위한 대언자 예수께서 바로 나의 그 죄 때문에 하늘 지성소에서 대제사장으로 서 있음을 확인하면 되는 것이다. 이런한 삶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삶이며 그러한 사람에겐 결코 정죄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성도들이 진정 율법에서 벗어나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는 아들로서의 자유스러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연약하여 실족하였을 때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의 회개를 요청하는 음성을 지속적으로 거절하고 성령을 좇아 살지 않는 삶을 계속하여 영적 양심이 무뎌져서 결국 성령께서 떠나버리고 화인 맞은 양심이 되어 버렸을 경우이다. 그것이 바로 용서 받을 수 없는 성령 훼방죄로 [사망에 이르는 죄]를 범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는 절망적인 최후의 상황을 막기 위해 성령께서 우리안에서 시기하면서까지 우리를 위해 우시며 간원하시는 것이다 예수 믿고 침례 받을 때 하늘 생명책에 녹명된 우리의 이름들이 흐려지거나 지워지지 않도록 말이다(계3:5). 그리스도인이 한번 범죄하면 칭의에서 떠난다는 말은 곧 하늘 생명책에서 그 이름을 지워 버린다는 것과 같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다. 그 이릉들이 도말되지 않도록 흐려지지 않도록 성령의 사역이 연약한 우리를 도우시는 것이다. 얼마나 감사하고 감격스러운 하나님이 자비이신가! 그리스도 안에 날마다 믿음을 활용하여 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연약함으로 짓는 죄들은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들]일 뿐이다. 왜냐하면 이미 그 죄들은 침례시에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힌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를 죽게 만든 신분적인 죄와 우리가 짓는 전 생애의 죄를 용서받는데는 우리의 행위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우리의 무엇을 먹고 안먹고, 어떤 선한 일을 하고 안하고 무엇을 지키고 하는 것 등은 이 단계에서 전혀 영향을 줄 수 없다. 오직 예수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나의 전 생애의 죄가 용서받고 한번도 죄 짓지 않은 사람처럼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자격은 ‘오직 예수 믿음’이며 ‘오직 믿음의 법’이며 ‘오직 은혜’일 뿐이다. 그 어떤 것도 여기에 게재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일생의 죄들을 오직 예수 믿음으로 용서받고 의롭게되고 거룩하게 되고 씻음 받은 우리들이 그 다음 그리스도인의 생애를 살 때는 그 ‘오직’에 그 무엇인가를 자꾸 붙이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골로새 이단들이 그랬다. 갈라디아 교인들이 그랬다 그들은 자신들의 일생의 죄들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를 믿음으로 용서된 것을 경험하고도 칭의된 이후의 성화의 삶은 율법의 행위로 해야 한다고 하고 먹고 마시는 것, 절기, 월삭, 안식일을 지키는 것, ‘일부러 겸손’과 천사 숭배 등의 [행위적인 것들]로 거룩을 유지하고 그래야만 온전해지고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오직 믿음인데 거기에 어떤 인간의 행위와 율법의 준수, 도덕과 선행과 공덕의 결과들이 의로움과 거룩함의 조건인양 제시되어지는 당시 현실 앞에서 바울은 단호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 3:1-3) 그러면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갈 1:6)고 한탄하였다. 그리고 “믿음에 굳게 서서”(골2:7) 있지 못하고 우리 의로움이신 그리스도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골2:19)고 세상 초등학문에 불과한 그러한 행위적인 것들로의 거룩과 의로움을 추구하는 것들에 대해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골2:21)고 강력하게 권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인간적인 먹고 마시고 입고 하고 안하고의 방식으로 성화를 주장하고 의로움을 얻고 그렇게 해야 완전해진다고 생각하는 교리나 가르침은 “쓰는대로 부패에 돌아가리라”고 하면서 성경이 아닌 “사람의 명과 가르침을 좇”지 말라고 강권하고 있다. 또한 그러한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데 지혜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를 좇는 것을 금하는데는 유익이 조금도 없“다고 결론을 짓고 있다(골2:20~23참고). 칭의가 전적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였다면 성화도 전적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롬 5:1-2)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은 칭의 후에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성화의 단계도 “믿음으로 서있는 은혜”라는 것이다. 오직 믿음이 아니면 서 있을 수 없는 은혜가 바로 성화인 것이다. 우리가 흔히 성화의 표징이라고 말하는 안식일를 생각해 보자. 우리가 안식일을 지켜서 성화되는 것이 아니다 안식일 자체가 우리를 성화시켜 주는 것이 아니라 그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해 주시는 것이다. "나는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 인줄 알게 하려 하여 내가 내 안식일을 주어 그들과 나 사이에 표징을 삼았었노라"(겔20:12) 위 성경절에서 확연히 드러나듯이 안식일이 기능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를 알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대개 우리가 지키는 안식일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줄 착각한다. 다른 말로 완전주의자들은 자신들이 행하는 어떤 특별한 행위나 구별된 생애 등이 자신들을 거룩하게하고 성화케 하고 완전케 하는 수단인 줄 착각하는 것이다. 성화의 주체는 [의] 자체이신 "오직 예수"밖에 없으며 그분만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고 완전하다고 하실 수 있으시다. 칭의나 성화에 대한 올바른 견해를 상실한 경우를 들어보자. 어떤 교인들에게서 우린 가끔 황당한 이야기들을 불쑥불쑥 듣게 된다 자신들이 교회에 충실하지 못했거나 어떤 실족한 일이 있으면 '내가 아직 거듭나지 못해서...' 혹은 '내가 아직 성화가 덜 되어서...'라고 머리를 긁적거리면서 말하곤 한다. 신앙 생활을 몇년 혹은 몇십년 하고 있는데도 자신의 작은 실수들을 보면서 자신이 아직 거듭나지 못했거나 아직 성화되지 못한 사람이라고 자책하는 것이다 사실 이 말은 엄격하게 따지면 아직 그는 그리스도인도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도 아니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자도 아니라는 것이다. 거듭나지 못하고 의롭게 되지 못하고 거룩하게 되지 못한 자가 어찌 '성도'일 수 있으며 '교인'일 수 있겠는가? 여기에 우리의 착각이 있다. 많은 교인들은 우리가 처음 예수 믿을 때는 예수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는데 살면서 착한 일 많이하고 선행을 쌓고 교회에 헌신하고 기도 많이 하고 해야만 '성화'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칭의의 결과가 곧 성화임을 망각하고 칭의는 값없이 받았지만, 성화는 우리 몫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무엇을 하고 안하고의 행위 문제가 결부되어 때로는 극단주의로, 또 율법주의로 광신적으로 되어 버리는 경우도 허다한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점점 성화되어지는 것이 아니고 성화 중에서 더욱 온전한 표준인 그리스도를 향하여 자라나고 성장하는 것이다. 우리가 처음 예수 믿고 의롭다함을 얻을 때 이미 우린 "단번에" 거룩해졌고 그래서 '성도'가 되었고 성화 가운데 들어서게 된 것이다. 우리의 신분이 마귀의 아들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바뀌었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것이고 죄인에서 의인으로 된 것이다. 선지자의 글을 읽고 순종하면서 재림교인들이 사는 독특한 삶과 우리의 변화된 생애와 구별된 삶은 칭의의 결과이며 열매이지 성화를 위한 조건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렇게 그날 당장 죽어도 구원과 영생이 보장된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을 획득하고도 아들답게 살지 못하고 종처럼, 삯군처럼 일한 댓가대로 그 무엇인가를 얻으려는 시도들을 우리 생애 가운데 얼마나 많이 했었는가? 우리는 아직도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때의 종 기질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종과 삯군의 기질이 농후한 사람들일수록 재림하실 예수님 보다는 어떤 사건들을 기다리고 삯을 받기 위해 얼른 해가 지기를 바라면서 일은 하지 않고 서산만 바라다보는 극단주의적 종말론자들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종]이 아니라 [아들]이다. [종의 기질]을 벗어 버리고 [아들]답게 살아야 한다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요 8:35-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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