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새주의의 허와 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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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바리새주의를 이해하기 위한 유대인 탄생 이해
먼저 바리새주의를 이해하고 평가하기 전에 유대인이 언제 어떻게 이루어젔는지를 알아보아야 한다.
남방 유다국의 역사는 바벨론 포로 역사로 해서 끝을 맺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 대로 BC 457년을 마지막으로 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본토로 귀환한다. 그러나
더 이상 나라로써의 성립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본토는 페르샤의 장악 아래 있었던 것이고 페르샤는 하나님의 백성은 정치를 하지 말 것이나 자유로
생활을 하고 종교는 자유화 하게 한다고 하였다/
이리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연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었고 BC 331년부터는 헬라, BC 168년
부터서는 로마의 통치를 줄곧 받게 되는 나라 아닌 민족 공동체가 되었다.
특히 헬라시대부터서는 이들 하나님의 백성들의 공동체가 헬라인들의 눈에 "유대인", "유대 사람", "유
데민족"으로 비쳐져서 그렇게 불리면서 오늘날의 "유대인"이라는 명칭이 이루어진 셈이다.
사실 이 "유대인"은 페르샤가 탄생시켜 놓은 셈이며 그 유대인의 탁월한 정신은 "바벨론 포로 당시
에스겔 선지자의 교육 영향이 크다 하겠다.
2. 경건파인 하시딤 이해
특히 BC 167년 경에 헬라의 강경정책을 시도한 안티어커스 에피파네스(Antiachus Epiphanes) 헬라정책
에 대한 유대의 마카비 반란이 있었는데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이때 하시딤(Hasidim) 이라 일컸는 경건
파 지원의 영향이 컸다.
그러면 또 "경건파"란 무엇인가? 이들은 헬라정치를 밀고 나가는 이방롱치와 다른 종교사상을 받아들
일 수 없을 뿐 아니라 야웨가 주시는 모세의 5경 율법을 생명을 내놓고 지키겠다는 신앙사상을 가진
무리들이였다.
이들 사상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당연하고 올바른 신앙 정신 아니겠는가!
일 예를 들면 페르샤의 종교인 배화교를 무차별 받아들이겠는가! 아니다.그들의 외초에 가진 신앙사상
은 당연하고 지지할만한 것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3. 바리새주의의 탄생과 그 이해
그런데 이들 사상이 하나로 유지되지 못한 것은 지극히 만족스럽지 못한 것이 되었다. 이들은 바리새
파, 바리새파의 좌파가 될만한 엣세네파, 사두개파, 정치에 가까운 열심당으로 분열되었다.
나중에 BC 18년에 유대인 분봉왕으로 즉위한 후에는 헤롯당이 첨가되었는데 이들은 종교당이라고 하
기 보다는 정치하는 당에 가까웠다.
4. 바리새주의의 분리주의와 과격주의 이해
여기서부터는 바리새주의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그런데 경건주의는 사상이 좋고 그 신앙정신이 좋았지만 여기서부터 어쩔 수 없이 바리새인의 자세가
흩틀어지는 것 같다. 자연 이교와 정치까지 반대를 하려니 유대 종교 내지 유대인만으로 뭉쳐지는 온건
파인 분리주의와 그 사상이 더하여 과격한 배타주의로 나누어지게 된다.
그래서 바리새 라는 뜻이 분리주의 라는 뜻이고 분리주의자들을 연상케 했다.
말하자면 무엇과 분리해야 하는 것인가?이다. 이방인의 죄스런 생활, 헬라문화적 종교사상과 생화방식
동화에 대한 분리이며 심지어 배타주의였다. 특별이 이들 과격주의자들은 이렇게 살지 못하는 동족 유
대인들과도 분리를 주장했고 그렇게 하였다. 이것이 과연 바람직한 것이었겠는가!
그래서 "구별되게 말하라", "구별되게 말하는 자"로 나타나게 되었다.
5. 결론
우리는 여기에서 이들의 진로가 부득불 동화 아닌 구별이며 분리였었겠지만 과격한 길을 택했을 때부
터서 세월이 지나감에 따라 이탈의 길을 걸었고 사실상 하나님의 대변자이며 사명자로써의 올바르고
바람직한 신앙 사명을 저버리게 된 것이 확실해진 것이다.
먼저 바리새주의를 이해하고 평가하기 전에 유대인이 언제 어떻게 이루어젔는지를 알아보아야 한다.
남방 유다국의 역사는 바벨론 포로 역사로 해서 끝을 맺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 대로 BC 457년을 마지막으로 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본토로 귀환한다. 그러나
더 이상 나라로써의 성립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본토는 페르샤의 장악 아래 있었던 것이고 페르샤는 하나님의 백성은 정치를 하지 말 것이나 자유로
생활을 하고 종교는 자유화 하게 한다고 하였다/
이리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연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었고 BC 331년부터는 헬라, BC 168년
부터서는 로마의 통치를 줄곧 받게 되는 나라 아닌 민족 공동체가 되었다.
특히 헬라시대부터서는 이들 하나님의 백성들의 공동체가 헬라인들의 눈에 "유대인", "유대 사람", "유
데민족"으로 비쳐져서 그렇게 불리면서 오늘날의 "유대인"이라는 명칭이 이루어진 셈이다.
사실 이 "유대인"은 페르샤가 탄생시켜 놓은 셈이며 그 유대인의 탁월한 정신은 "바벨론 포로 당시
에스겔 선지자의 교육 영향이 크다 하겠다.
2. 경건파인 하시딤 이해
특히 BC 167년 경에 헬라의 강경정책을 시도한 안티어커스 에피파네스(Antiachus Epiphanes) 헬라정책
에 대한 유대의 마카비 반란이 있었는데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이때 하시딤(Hasidim) 이라 일컸는 경건
파 지원의 영향이 컸다.
그러면 또 "경건파"란 무엇인가? 이들은 헬라정치를 밀고 나가는 이방롱치와 다른 종교사상을 받아들
일 수 없을 뿐 아니라 야웨가 주시는 모세의 5경 율법을 생명을 내놓고 지키겠다는 신앙사상을 가진
무리들이였다.
이들 사상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당연하고 올바른 신앙 정신 아니겠는가!
일 예를 들면 페르샤의 종교인 배화교를 무차별 받아들이겠는가! 아니다.그들의 외초에 가진 신앙사상
은 당연하고 지지할만한 것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3. 바리새주의의 탄생과 그 이해
그런데 이들 사상이 하나로 유지되지 못한 것은 지극히 만족스럽지 못한 것이 되었다. 이들은 바리새
파, 바리새파의 좌파가 될만한 엣세네파, 사두개파, 정치에 가까운 열심당으로 분열되었다.
나중에 BC 18년에 유대인 분봉왕으로 즉위한 후에는 헤롯당이 첨가되었는데 이들은 종교당이라고 하
기 보다는 정치하는 당에 가까웠다.
4. 바리새주의의 분리주의와 과격주의 이해
여기서부터는 바리새주의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그런데 경건주의는 사상이 좋고 그 신앙정신이 좋았지만 여기서부터 어쩔 수 없이 바리새인의 자세가
흩틀어지는 것 같다. 자연 이교와 정치까지 반대를 하려니 유대 종교 내지 유대인만으로 뭉쳐지는 온건
파인 분리주의와 그 사상이 더하여 과격한 배타주의로 나누어지게 된다.
그래서 바리새 라는 뜻이 분리주의 라는 뜻이고 분리주의자들을 연상케 했다.
말하자면 무엇과 분리해야 하는 것인가?이다. 이방인의 죄스런 생활, 헬라문화적 종교사상과 생화방식
동화에 대한 분리이며 심지어 배타주의였다. 특별이 이들 과격주의자들은 이렇게 살지 못하는 동족 유
대인들과도 분리를 주장했고 그렇게 하였다. 이것이 과연 바람직한 것이었겠는가!
그래서 "구별되게 말하라", "구별되게 말하는 자"로 나타나게 되었다.
5. 결론
우리는 여기에서 이들의 진로가 부득불 동화 아닌 구별이며 분리였었겠지만 과격한 길을 택했을 때부
터서 세월이 지나감에 따라 이탈의 길을 걸었고 사실상 하나님의 대변자이며 사명자로써의 올바르고
바람직한 신앙 사명을 저버리게 된 것이 확실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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