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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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란 "이성을 가진 동물(존재)"이라고 정의한다. 그런 동물(존재)은 유일무이하게 이 세상에 "사람" 밖에 없다고 흔히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람"이란 그 창조 당시의 애당초 의미는 무엇인가? 성경에 처음 나오는 "사람"(창 1:26)에게서 그 뜻을 밝혀볼 수 있다. 하나님은 "사람"을 짖고 "그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었"(창 5:3)다고 하셨으며 "사람"이라고 여기에 쓰여진 "안드로포스"라는 이 70인 역 원어는 "위를 쳐다보는 존재"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한다.
"사람"이 "위를 쳐다보는 존재"라니 무슨 뜻인가? 하나님이 창조한 하늘에서도 무슨 위가 또 있었는가? 있었다. 그 위는 하나님이시다."사람"이 직립하여 머리를 들고 쳐다보고 다닌다는 의미 이상의 창조주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사는 존재였다라는 의미가 더 가능한 것이다. 이것은 하늘의 질서였다.
그런데 하늘의 존재자(천사)였었던 루스벨에 의해 하늘의 존재자 아담과 해와가 타락했다는 것은 참 아이러니 한 일이다. 하여간 사람은 죄의 병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에서 쫓겨난 후에도 그들은 "위를 쳐다 보는 존재"였다. 그들은 당대에 낳은 자식이 구주이기를 바랐(창 4:1 참조)고 소망했다.
처음 세상, 곧 노아홍수 때의 경우다.
그러니까 상당한 역사가 흐른 후 하나님은 "사람"(창 6:5)을 지상에서 멸망시키셨다. 더 이상 "위를 쳐다보는 존재"가 되기를 포기하여 하나님과의 사랑의 교제의 대상이 되기를 거절했기 때문이다. 그 증거는 이 땅을 멸망시켰을 때 "위를 쳐다보는 존재"는 복음 선포자의 가족, 노아의 8식구 외엔 아무도 없었음이 명백하게 자증되었다.
땅 아래를 내려다 보고 사는 사람들의 모습은 하나님을 실망시켰다. 당시의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창 6:5)뿐이여서 하나님은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상동6)하셨다고 했다.
다음은 두번째 세상, 곧 예수님 때의 경우다.
예수님은 "사람"을 사랑하사 구원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 그런데 그는 제자들에게 "사람들"(마 10:17)을 조심하라고 하셨다. 여기에서 "사람들"은 특정인 개인을 지칭하고 있지 않다. 왜 그렇게 하셨는지 의아스럽지 않는가? 그 진의를 다음 성경절에서 찾아볼 수 있다.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요 2:23-25)여기에 나타난 4번의 "사람"은 특정인을 지층하지 않는다.
그 사람에 대하여 "친히 '사람'을 아심"이며 "친히 '사람' 속에 있는 것을 아심"이라고 말했다. "친히 사람을 아심"은 인간학이요 "친히 사람 속에 있는 것을 아심"은 심리학 일 수 있다. 예수님은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인간학도 심리학도 근원적으로 잘 아시는 분이 된다는 말씀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예수님의 지상봉사 생애 동안 늘 많은 꽤를 내는 사람들에 대하여 이런 인식을 가졌음을 살펴볼 수 있다.
그래서 이런 두 세상에서의 경우를 감안하면 부득불 "사람"이란 다른 정의가 필요하게 된 셈이다. 사람은 "위를 쳐다보는 존재"이지만 사람은 근원적으로 죄 때문에 타락하여 "죄의 본성을 가진 존재"이며 "죄로 망가진 존재"(동식물은 그 주체가 아님), 따라서 "땅을 바라보는 존재"라고 표현해서 옳은 말이 된다.
따라서 이 "사람" 곧 "망가진 존재"에 대한 3가지 이해와 처방이 요구된다.
1) 망가진 차를 몰면 낭떠러지로 떨어질 위험성이 있다. 그리고 목적지까지 가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망가진 차는 고쳐저야만 한다. 역시 "망가진 사람"은 고쳐저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은 위험한 존재인 것이 부인못할 사실이다.
이것은 신학적으로 입증된다. 망가짐의 정도와 그 피해는 이미 루스벨에게서 보여졌기 때문이다. 한 예로 한 여자가 공원에서 한가롭게 산책하며 즐기는데 갑자기 아무런 관계가 없는 한 남자가 덤벼들어 칼로 피투성이 하여 죽인 일이 있다. 그 잔인성을 어떻게 해석하겠는가?
2) 그러기 때문에 망가진 불완전한 차가 교통사고를 내고 피해를 입힐 위험성에 대비하여 평상시에 그 차를 조심해야 한다.
역시 "사람"을 조심해야 한다. "사람"을 지나치게 기대해서는 안된다. 많은 "사람"들이 아우성을 대는 것은 이 두 가지 사실을 간과해서 그렇다.
M. 가르신은 "이 세상에서 사람처럼 흉악한 동물은 없다. 늑대는 서로 잡아먹는 법이 없지만 사람은 사람을 산채로 삼켜버린다."고까지 했다.
이것은 인간의 타락을 현미경적으로 살펴볼 때만 그 진상을 이해할 수 있다. 사람이 하늘에 가기 전에는 사람은 죄인이며 의인인 양면성으로 나타난다..
3) 차는 부득불 새롭게 고쳐저야 하는 것처럼 사람은 온전하게 고쳐저야 한다.
"사람"이 고쳐진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에던에서의 "위를 쳐다보는 존재"로 새롭게 회복한다는 뜻이다. 하나님과의 교제의 상대로 다시 회복된다는 뜻이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것을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는 칭의, 성화, 그리고 영화라고 말한다. 이같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삶은 그리스도와 그 사랑이 없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D. 뮤로스에 의하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하나는 자기를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의인, 또 하나는 스스로를 의인이라고 하는 죄인이 있다."
자신은 죄인이라고 하는데 하나님은 의인이라고 보시는 것이며 자신은 의인아라고 하는데 하나님은 죄인이라고 보시는 것이다.(눅 18:10-14 참조) 이것은 성경 전반의 의미이다.
"사람"이 죄에 있는데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그 케티거리를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어떻게?
의인인가? 죄인인가? 어느 것인가이다. 어떤 성질의 의인이며 어떤 성질의 죄인인가이다. 나는 어떻게 생각하며 하나님은 어떻게 생각하는가이다.
"사람"은 모름지기 모든 죄를 회개하고 자복하며주님께 용서를 받고 의로워저야 한다. 이제 예수를 믿는 의인이기 때문에 더욱 다른 "사람"까지를 위해 사랑의 봉사를 나타내야 한다. 그 길은 십자가로 가는 길에서 이루어진다. 하늘 가는 길은 사랑의 곧은 길이다. 사실 자기를 비운 십자가 길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사람"은 아직도 여전히 "위를 쳐다보는 존재"이다. "위를 쳐다보는 존재"는 항상 "위엣 것을 찾고...위엣 것을 생각"한다.(골 3:1-2 참조) 이런 자는 항상 벡투 에덴의 길을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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