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 노트: 목회 이상, 교회 접목 문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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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가 어느 교회로 부임할 때 목회 이상이 있고 그것을 실현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 교회 성숙을 위하여 너무나 당연한 정신이다.
그런데 그것이 수학 공식처럼 "공식 대입"인가? 아니면 "가감수정", 혹은 "포기"인가? 하는 것이다. 목회자의 이 선택에서 신자들을 한 곳으로 모느냐 끄느냐 라는 이견의 불협화가 교회에서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음의 좌초는 흔적이 없어 좋으나 문제의 중도의 좌초는 그리 보기 좋지 않고 목회자의 남은 목회 페턴에 영향이 있는 것이 사실인 경우가 있음으로 어떤 일이 있어도 불협화 라는 경계선에 이르지 않아야 한다.
"좌초"라는 말을 썼지만 목회자가 뭐, 목회자가 할 일을 못해! 따라 주고 협력해 주지 않아...!"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면 첫째 설교가 부드럽지 못하게 되고 둘째 불협화 하거가 심화 되고 셋째 말이 많아진다.
말이란 은혜로우면 좋지만 쓴 뿌리가 섞인다면 사정이 없어지는 것이기에 넷째 사랑이 감소되고 다섯째 분열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여섯째 의도했던 목회 이상은 어디로 사라지고 이런 연고로 부흥은 물론 불편해지고 평화롭지 못한 교회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이것을 경계한다.
평화로운 교회라는 명예스러움을 자랑할 수 있는 교회란 한 교회도 없다. 왜냐하면 사람의 치리로 인해 자칫하면 마치 한란계처럼 무모하게 변하는 수가 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장악되도록 하는 사람의 믿음과 정신은 때때로 매우 허약질하다.
이런 결과는 목회자가 시도하지 않았던 것 보다 훨씬 못한 수가 흔히 있을 수 있다. 목회에 경험이 많지 않을지라도 실패를 경험하지 않는 것이 백번 좋을 것이다.
지금 꽤나 어려운 상항만을 말하고 있는 것 같지만 반드시 집고 넘어갈 문제이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인가? 목회 이상을 접목시키면서 성공하는 목회 이상을 실현시키고 싶은데 말이다. 먼저 이것을 잘 알고 처리해야 한다.
1) 부임 후에 얼마간 교회의 사정, 지도자들, 사업의 자취들을 파악해야 한다. 얼마간 말이다.
교회란 목회적인 단순 사업 갖지만 사람들의 생각과 중의를 모와 처리하는 사업이기 때문에 심사숙고해야 한다. 성도들은 무모하고 대중심리적일 경우가 있다. 좋을 때는 잘 모르지만 헝크러진 실타래 라는 말이 있다.
교회의 지도자들이나 성도들이 마구 털어놓는 이야기나 친절로 선입견을 세우지 말라. 사람들의 마음에는 자신의 인정과 처신을 염두에 두고 말과 친절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정상적 교회 파악의 자료로는 미흡하다. 개인의 불이익이 올 때는 그 상황이나 친절이 바뀌고 심지어 공격적이 될 수 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 나빠서가 아니라 단순하고 더 큰 파장을 몰라서 그렇다.
시간을 두고 목회자 자신이 상황의 정의를 내릴 수 있는 때가 올 것이다. 아마도 작은 교회는 6개월, 큰 교회는 1년 쯤 일 것이다. 나는 600명의 신자가 있는 교회를 담임했을 때 1년 쯤이 걸렸다. 상당히 정확한 정보는 시간이 해결해 준다.
2) 목회자가 교회의 이상이 있는 것처럼 오랜 동안 교회에 몸담은 교회 지도자들도 교회에 대한 애착과 이상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비협력과 의견의 대립으로만 이해하면 아니 될 것이다. 이것은 금물이다. 마음으로 쉽게 완고나 터득하지 못한 진취성 없는 모습이나 비협력으로 생각하는 일에 접근하지 말아야 한다. 이런 생각은 자연 정부족하게 나타남으로 예리하게 서로를 알 수 있기 마련임으로 아주 유해하다. 그리고 아무래도 발설이 되면 문제가 된다.
목회에 있어서 유해는 좀 더 큰 유해로 불어나기 쉽다. 물론의 이야기 이지만 목회자는 항상 은혜스럽고 사랑스런 풍만한 모습으로 보여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
3) 전임 목회자들의 자취 속에서 자신의 할 일과 실현이 잘 조화 되고 연게성을 이루면서 이것이 현실로 가능한지를 숙고해 보아야 한다.
그렇게 하고자 해서 그럴까 만은 때때로 저돌적(?)인 것이, 속빠른 것이, 타협이 없는 것이, 강경한 것이, 심지어 그 좋은 의욕과 담력이 일에 거침돌이 된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하나의 염려를 크게 하고 있다. 단순하게 할 목회를 오히려 말로 복잡하게 해준다 라고 생각할까 싶어서이다. 그러나 나의 대답은 아니다이다. 이전에도 말했지만 아마추어에서 프로로 가는 길에는 장애를 넘고 드디어 수련된 경험에서 단순성을 정리할줄 알아야 한다. 이것들은 하나의 과정 이야기이다.
4) 가령 분교를 하나 개척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한다면 충분하게 검토된 자신의 견해라고 할지라도 사전에 충분한 타합 및 타협이 필요하다.
우선 직원회 이전에 장로 진들에게 개별적으로 혹은 함께 자연스럽게 클리어한 이 계획을 가지고 타진할 수 있다. 때로는 상당한 시간을 두고 자주 토의할 수 있다. 이것이 가능하다는 프로젝트가 될 때 교회직원회에서 수차례 계획하고 타합할 수 있을 것이다. 유의할 것은 급한 처리가 문제를 불러 이르킨다는 사실이다.
5) 중요한 일일수록 후한이 없도록 가능한 만장일치로 가결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이상이다.
사람을 잃으면서, 말썽이 많으면서 일을 처리해 나가는 것이거나 목회자 때문이라는 후문은 바람직하지 않다.
평화로운 교회에서 성도들의 심기가 불편하다는 이야기 만큼 불행한 것이 없다.
목회의 과감성의 문제는 나중에 따로 다루겠지만 중의를 중요시 하는 목회가 어느 때나 바람직 하다. 물론 성도들이 좋게 여겨져야 한다.
6) 이런 과정을 시작하려고 할 때나 진행중에 문제가 발생하여 진척하기 어려울 때의 문제 처리이다.
이것을 강행 할 경우, 지체하며 이해의 기간을 두는 경우, 아직 이 교회의 적용은 너무 이르다고 판단 됨으로 훗날로 미루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의 바로메터 중 중요한 하나는 화합과 성숙을 깰 우려 여부에 대한 판단이다.
7) 원론적인 목회 표어는 화합과 성숙이다.
처음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는 이야기이다. 결론적으로 목회의 큰 이상을 가지고 교회에 부임하였다고 할지라도 화합과 성숙을 깨는 경우가 되어진다면 그것은 그 교회에서 시도하기에는 아직 이른 일이다. 왜냐하면 화합을 깨는 것은 교회의 모든 것을 깨는 비능율의 경우가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목회자를 교회가 반대해서 되는 일이 아닐 수 있다. 다만 반대 되는 의논 때문에 의논이 반대가 되나 심화 되면 성도와 목회자 간에 반대가 될 수도 있다. 이런 일에 어느 선을 넘지 않고 지혜롭게 해결 되는 길을 찾아야만 한다.
이렇게 될 줄을 몰랐다는 말을 할 수 있다. 몰랐던 것을 미리 헤아려 알 수 있는 그것이 프로로 가는 길이다.
그러나 언제나 화합과 성숙을 깨는 여부에 포커스를 맞추는 목회를 하면 대부분 이점에서 성공할 것이 틀림 없다. 기억해 두자!
때로는 경쾌하게 어쩌면 과감하고 확실하게 괴도 수정하는 목회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멋지게 보일 수 있다. 이런 때 성도들의 좋은 반응도 있다. 앞으로를 위한 일이라면 더욱 좋은 일이며 선택이다.
이것이 목회이다!
그런데 그것이 수학 공식처럼 "공식 대입"인가? 아니면 "가감수정", 혹은 "포기"인가? 하는 것이다. 목회자의 이 선택에서 신자들을 한 곳으로 모느냐 끄느냐 라는 이견의 불협화가 교회에서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음의 좌초는 흔적이 없어 좋으나 문제의 중도의 좌초는 그리 보기 좋지 않고 목회자의 남은 목회 페턴에 영향이 있는 것이 사실인 경우가 있음으로 어떤 일이 있어도 불협화 라는 경계선에 이르지 않아야 한다.
"좌초"라는 말을 썼지만 목회자가 뭐, 목회자가 할 일을 못해! 따라 주고 협력해 주지 않아...!"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면 첫째 설교가 부드럽지 못하게 되고 둘째 불협화 하거가 심화 되고 셋째 말이 많아진다.
말이란 은혜로우면 좋지만 쓴 뿌리가 섞인다면 사정이 없어지는 것이기에 넷째 사랑이 감소되고 다섯째 분열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여섯째 의도했던 목회 이상은 어디로 사라지고 이런 연고로 부흥은 물론 불편해지고 평화롭지 못한 교회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이것을 경계한다.
평화로운 교회라는 명예스러움을 자랑할 수 있는 교회란 한 교회도 없다. 왜냐하면 사람의 치리로 인해 자칫하면 마치 한란계처럼 무모하게 변하는 수가 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장악되도록 하는 사람의 믿음과 정신은 때때로 매우 허약질하다.
이런 결과는 목회자가 시도하지 않았던 것 보다 훨씬 못한 수가 흔히 있을 수 있다. 목회에 경험이 많지 않을지라도 실패를 경험하지 않는 것이 백번 좋을 것이다.
지금 꽤나 어려운 상항만을 말하고 있는 것 같지만 반드시 집고 넘어갈 문제이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인가? 목회 이상을 접목시키면서 성공하는 목회 이상을 실현시키고 싶은데 말이다. 먼저 이것을 잘 알고 처리해야 한다.
1) 부임 후에 얼마간 교회의 사정, 지도자들, 사업의 자취들을 파악해야 한다. 얼마간 말이다.
교회란 목회적인 단순 사업 갖지만 사람들의 생각과 중의를 모와 처리하는 사업이기 때문에 심사숙고해야 한다. 성도들은 무모하고 대중심리적일 경우가 있다. 좋을 때는 잘 모르지만 헝크러진 실타래 라는 말이 있다.
교회의 지도자들이나 성도들이 마구 털어놓는 이야기나 친절로 선입견을 세우지 말라. 사람들의 마음에는 자신의 인정과 처신을 염두에 두고 말과 친절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정상적 교회 파악의 자료로는 미흡하다. 개인의 불이익이 올 때는 그 상황이나 친절이 바뀌고 심지어 공격적이 될 수 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 나빠서가 아니라 단순하고 더 큰 파장을 몰라서 그렇다.
시간을 두고 목회자 자신이 상황의 정의를 내릴 수 있는 때가 올 것이다. 아마도 작은 교회는 6개월, 큰 교회는 1년 쯤 일 것이다. 나는 600명의 신자가 있는 교회를 담임했을 때 1년 쯤이 걸렸다. 상당히 정확한 정보는 시간이 해결해 준다.
2) 목회자가 교회의 이상이 있는 것처럼 오랜 동안 교회에 몸담은 교회 지도자들도 교회에 대한 애착과 이상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비협력과 의견의 대립으로만 이해하면 아니 될 것이다. 이것은 금물이다. 마음으로 쉽게 완고나 터득하지 못한 진취성 없는 모습이나 비협력으로 생각하는 일에 접근하지 말아야 한다. 이런 생각은 자연 정부족하게 나타남으로 예리하게 서로를 알 수 있기 마련임으로 아주 유해하다. 그리고 아무래도 발설이 되면 문제가 된다.
목회에 있어서 유해는 좀 더 큰 유해로 불어나기 쉽다. 물론의 이야기 이지만 목회자는 항상 은혜스럽고 사랑스런 풍만한 모습으로 보여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
3) 전임 목회자들의 자취 속에서 자신의 할 일과 실현이 잘 조화 되고 연게성을 이루면서 이것이 현실로 가능한지를 숙고해 보아야 한다.
그렇게 하고자 해서 그럴까 만은 때때로 저돌적(?)인 것이, 속빠른 것이, 타협이 없는 것이, 강경한 것이, 심지어 그 좋은 의욕과 담력이 일에 거침돌이 된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하나의 염려를 크게 하고 있다. 단순하게 할 목회를 오히려 말로 복잡하게 해준다 라고 생각할까 싶어서이다. 그러나 나의 대답은 아니다이다. 이전에도 말했지만 아마추어에서 프로로 가는 길에는 장애를 넘고 드디어 수련된 경험에서 단순성을 정리할줄 알아야 한다. 이것들은 하나의 과정 이야기이다.
4) 가령 분교를 하나 개척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한다면 충분하게 검토된 자신의 견해라고 할지라도 사전에 충분한 타합 및 타협이 필요하다.
우선 직원회 이전에 장로 진들에게 개별적으로 혹은 함께 자연스럽게 클리어한 이 계획을 가지고 타진할 수 있다. 때로는 상당한 시간을 두고 자주 토의할 수 있다. 이것이 가능하다는 프로젝트가 될 때 교회직원회에서 수차례 계획하고 타합할 수 있을 것이다. 유의할 것은 급한 처리가 문제를 불러 이르킨다는 사실이다.
5) 중요한 일일수록 후한이 없도록 가능한 만장일치로 가결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이상이다.
사람을 잃으면서, 말썽이 많으면서 일을 처리해 나가는 것이거나 목회자 때문이라는 후문은 바람직하지 않다.
평화로운 교회에서 성도들의 심기가 불편하다는 이야기 만큼 불행한 것이 없다.
목회의 과감성의 문제는 나중에 따로 다루겠지만 중의를 중요시 하는 목회가 어느 때나 바람직 하다. 물론 성도들이 좋게 여겨져야 한다.
6) 이런 과정을 시작하려고 할 때나 진행중에 문제가 발생하여 진척하기 어려울 때의 문제 처리이다.
이것을 강행 할 경우, 지체하며 이해의 기간을 두는 경우, 아직 이 교회의 적용은 너무 이르다고 판단 됨으로 훗날로 미루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의 바로메터 중 중요한 하나는 화합과 성숙을 깰 우려 여부에 대한 판단이다.
7) 원론적인 목회 표어는 화합과 성숙이다.
처음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는 이야기이다. 결론적으로 목회의 큰 이상을 가지고 교회에 부임하였다고 할지라도 화합과 성숙을 깨는 경우가 되어진다면 그것은 그 교회에서 시도하기에는 아직 이른 일이다. 왜냐하면 화합을 깨는 것은 교회의 모든 것을 깨는 비능율의 경우가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목회자를 교회가 반대해서 되는 일이 아닐 수 있다. 다만 반대 되는 의논 때문에 의논이 반대가 되나 심화 되면 성도와 목회자 간에 반대가 될 수도 있다. 이런 일에 어느 선을 넘지 않고 지혜롭게 해결 되는 길을 찾아야만 한다.
이렇게 될 줄을 몰랐다는 말을 할 수 있다. 몰랐던 것을 미리 헤아려 알 수 있는 그것이 프로로 가는 길이다.
그러나 언제나 화합과 성숙을 깨는 여부에 포커스를 맞추는 목회를 하면 대부분 이점에서 성공할 것이 틀림 없다. 기억해 두자!
때로는 경쾌하게 어쩌면 과감하고 확실하게 괴도 수정하는 목회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멋지게 보일 수 있다. 이런 때 성도들의 좋은 반응도 있다. 앞으로를 위한 일이라면 더욱 좋은 일이며 선택이다.
이것이 목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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