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장로는 교회의 수호의 사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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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의 교회 수호의 사명이라니 그것이 무엇일까? 성경은 "이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
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딤 전 3:15)가 된다고 말씀 했다.
교회의 장로로 부름을 받은 사람은 이점에 대한 양면성적인 수호의 사명이 있다. 하나는 진
리의 기둥과 터가 되는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생명을 다해 지키는 정신이요 또 하나는 주님
을 사랑하고 진리를 사랑하여 이 교회의 복음의 선교정신으로 유형 무형의 교회를 지키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유의할 것은 우리가 언뜻 미쳐 생각하지 못한 것은 둘째 내용을 간과하거나 상실할
위험이 항상 있다는 것이다. 지난번에 "장로는 선교의 사명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 그 선교
가 다분이 이름만의 선교에 머물을 위험성에 대하여 고찰했었다.
오늘 셋째로 연구 되는 진리의 수호는 사실상 선교를 위한 수호정신을 이름이다. 이것이 유
득 장로가 가져야 할 현대의 진보 정신이다. 이것이 중요하다.
이 사명 정신이 희박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직책적인 사무에 전락하고 만다. 일상적인
직무에 한하고 만다. 이것을 비극으로 생각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그러나 믿음의 노독들의
교회의 수호란 곧 선교였음을 인지하고 충격을 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
1) 교회수호의 사명
교회는 설명적으로 말하면 진리의 샘이요, 생명의 도피성이요, 영혼의 안식처가 된다. 지극히
평화스러운 표현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천해 가는 세계 속에서 하나님의 종들은 이 보
루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쳐서 교회를 수호하며 악의 영들을 대항하여 싸워야 했
었다.
장로의 교회에 대한 수호의 사명이란 번영하며 평화로울 때나 어지럽고 위급할 때를 막론하
고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힘을 다하여 수고하고 끝까지 수호하는 것을 말한다.
사도 바울은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고 후 11:28).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내가 교회의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경륜을 따
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골 1: 24-25)고 했다.
사도 바울의 교회를 위한 이같은 헌신은 그의 순교로 말미암아 인친 바 되어 더욱 확고하게
확인 되었다. 오늘날 장로도 그 바울 장로의 정신을 본받고 이어 받아야 한다. 오늘날 교회의
장로들은 바로 그가 갔던 그 길을 선택할 각오로 살아야 한다.
그렇지 아니하면 쉬 낙심하거나 포기하게 되고 그렇게도 중한 중임에도 불구하고 대수롭지
않는 것으로 허다히 생각하는 경향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매일 장로는 목사처럼 장로로의
사명정신에 깨어있고 충일하도록 따로 겸손하게 기도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연약하
여 이 직임을 분별하거나 감당하기 어렵다. 신도들의 신뢰에서도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이 사
실이다.
2) 교회 선교 수호의 사명
역사를 되돌아보면 교회를 수호한다는 차원은 선교를 위해 전진하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믿음의 노독들은 선교로 교회 수호의 적극적인 자세를 항상 취했다. 여기에는 시련들이 많
았다. 이런 시련들은 생명을 각오하기까지 하였다. 오늘날인들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환난이
나 시련이 있으랴!(롬 8:35-39 참조)
장로는 목사 못지 않게 그 부부가 동역하여야만 한다. "반이 허물어진 떡은 젯상에도 못 올라
간다". 장로 부부가 한 사명을 갖지 못할 때 사업은 적잖게 그리고 보이지 않게 손해를 본다.
교회에 대한 주인 의식으로부터 모든 면에서 그러하다.
그러나 또 하나의 손해를 보는 것이 있다. 유의할 것은 장로의 부인이 장로와 같은 직분을 행
정적으로 같이 행사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극히 조심해야 한다. 이것이 많은 요인을 낳고
장로의 하는 일의 감화가 감소 되기도 한다.
그러나 장로의 교회 수호와 선교적인 일에 함께 활동하고 함께 성장하며 함께 관심을 기울여
야 한다는 점은 좀 더 강조하고 좀 더 장려할 일이며 보람을 같이 느낄 마땅한 일이다..
장로는 교회의 파숫군으로 교회의 이중 수호의 사명자가 되어야 할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다.
"교회는 반역 세상에서 하나님의 보유하시는 당신의 요새요 당신의 도피성이다. 교회에 대한
어떠한 반역이든지 당신의 독생자의 피로 인류를 사신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다....모든 시대
에 있어서 여호와께서는 당신의 파수군들을 가지고 계셨는데 그들은 저희가 살앗던 시대에서
정확한 증언을 전하였다. 이 파숫군들은 경고의 기별을 전하였다.
그들이 갑옷을 벗도록 요청을 받을 때에는 다른 사람들이 그들을 대신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이 증인들에 대하여 당신과 언약의 관계를 가지고 계셨고 지상의 교회를 하늘의 교회와 연합
시켰다."(사도행적 13)
오, 주님 우리로 하여금 2중의 교회수호의 사명을 다하게 하소서! 매일의 오늘을 그렇게 살게
하소서!
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딤 전 3:15)가 된다고 말씀 했다.
교회의 장로로 부름을 받은 사람은 이점에 대한 양면성적인 수호의 사명이 있다. 하나는 진
리의 기둥과 터가 되는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생명을 다해 지키는 정신이요 또 하나는 주님
을 사랑하고 진리를 사랑하여 이 교회의 복음의 선교정신으로 유형 무형의 교회를 지키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유의할 것은 우리가 언뜻 미쳐 생각하지 못한 것은 둘째 내용을 간과하거나 상실할
위험이 항상 있다는 것이다. 지난번에 "장로는 선교의 사명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 그 선교
가 다분이 이름만의 선교에 머물을 위험성에 대하여 고찰했었다.
오늘 셋째로 연구 되는 진리의 수호는 사실상 선교를 위한 수호정신을 이름이다. 이것이 유
득 장로가 가져야 할 현대의 진보 정신이다. 이것이 중요하다.
이 사명 정신이 희박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직책적인 사무에 전락하고 만다. 일상적인
직무에 한하고 만다. 이것을 비극으로 생각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그러나 믿음의 노독들의
교회의 수호란 곧 선교였음을 인지하고 충격을 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
1) 교회수호의 사명
교회는 설명적으로 말하면 진리의 샘이요, 생명의 도피성이요, 영혼의 안식처가 된다. 지극히
평화스러운 표현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천해 가는 세계 속에서 하나님의 종들은 이 보
루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쳐서 교회를 수호하며 악의 영들을 대항하여 싸워야 했
었다.
장로의 교회에 대한 수호의 사명이란 번영하며 평화로울 때나 어지럽고 위급할 때를 막론하
고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힘을 다하여 수고하고 끝까지 수호하는 것을 말한다.
사도 바울은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고 후 11:28).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내가 교회의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경륜을 따
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골 1: 24-25)고 했다.
사도 바울의 교회를 위한 이같은 헌신은 그의 순교로 말미암아 인친 바 되어 더욱 확고하게
확인 되었다. 오늘날 장로도 그 바울 장로의 정신을 본받고 이어 받아야 한다. 오늘날 교회의
장로들은 바로 그가 갔던 그 길을 선택할 각오로 살아야 한다.
그렇지 아니하면 쉬 낙심하거나 포기하게 되고 그렇게도 중한 중임에도 불구하고 대수롭지
않는 것으로 허다히 생각하는 경향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매일 장로는 목사처럼 장로로의
사명정신에 깨어있고 충일하도록 따로 겸손하게 기도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연약하
여 이 직임을 분별하거나 감당하기 어렵다. 신도들의 신뢰에서도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이 사
실이다.
2) 교회 선교 수호의 사명
역사를 되돌아보면 교회를 수호한다는 차원은 선교를 위해 전진하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믿음의 노독들은 선교로 교회 수호의 적극적인 자세를 항상 취했다. 여기에는 시련들이 많
았다. 이런 시련들은 생명을 각오하기까지 하였다. 오늘날인들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환난이
나 시련이 있으랴!(롬 8:35-39 참조)
장로는 목사 못지 않게 그 부부가 동역하여야만 한다. "반이 허물어진 떡은 젯상에도 못 올라
간다". 장로 부부가 한 사명을 갖지 못할 때 사업은 적잖게 그리고 보이지 않게 손해를 본다.
교회에 대한 주인 의식으로부터 모든 면에서 그러하다.
그러나 또 하나의 손해를 보는 것이 있다. 유의할 것은 장로의 부인이 장로와 같은 직분을 행
정적으로 같이 행사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극히 조심해야 한다. 이것이 많은 요인을 낳고
장로의 하는 일의 감화가 감소 되기도 한다.
그러나 장로의 교회 수호와 선교적인 일에 함께 활동하고 함께 성장하며 함께 관심을 기울여
야 한다는 점은 좀 더 강조하고 좀 더 장려할 일이며 보람을 같이 느낄 마땅한 일이다..
장로는 교회의 파숫군으로 교회의 이중 수호의 사명자가 되어야 할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다.
"교회는 반역 세상에서 하나님의 보유하시는 당신의 요새요 당신의 도피성이다. 교회에 대한
어떠한 반역이든지 당신의 독생자의 피로 인류를 사신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다....모든 시대
에 있어서 여호와께서는 당신의 파수군들을 가지고 계셨는데 그들은 저희가 살앗던 시대에서
정확한 증언을 전하였다. 이 파숫군들은 경고의 기별을 전하였다.
그들이 갑옷을 벗도록 요청을 받을 때에는 다른 사람들이 그들을 대신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이 증인들에 대하여 당신과 언약의 관계를 가지고 계셨고 지상의 교회를 하늘의 교회와 연합
시켰다."(사도행적 13)
오, 주님 우리로 하여금 2중의 교회수호의 사명을 다하게 하소서! 매일의 오늘을 그렇게 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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