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시요! 가시요! 라는 이기심씨 생각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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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줘요! 주시요! 오시요! 말하지 마시요! 가시요! 더 오지 마시요! 혹시 보류...!
이것은 적나나한 이기심씨의 본 모습이다. 감추인 모습이다.
"못 줘요!" 무엇을 쌓고 무엇을 말하고 무엇하게 사는 속에도 이것이 도사려 있음은 스스로에게
자증한다. 못 줄 것 많다. 자신의 심중 은밀한 데로 들어가 보면...
그러나 "주시요!"다. 그것 자체가 내 마음, 내 것이다. 얼마든지이다. 내게 주는 자는 좋은 사람,
호감의 사람이다. 나를, 그리고 나의 말을 액면 그대로 좋게 봐 주는 사람, 참 좋은 사람이다.
주겠다는 사람이 호의를 가지고 오겠다고 하니 "오시요!" 환영! 한다. 왜, 준다니 말이다
두둥실 내 친구이어라 한다. 언제적 우정이더냐 한다.
그러나 속샘 받았으면 되었지! 더 이상은 무엇을 "말하지 마시요!" 라고 한다. 근사하게 스트레
스라는 놈이 있는 법이요 하고 설파한다. 속셈, 이를 챙겼으면 되는 것이지 뭐더냐 한다.
사람은 이렇게 지혜로워야 해! 라고 하면서 돌아서서 웃는다.
그러고 보니 이젠 너의 불필요를 느낀다. 그래서 응석 부리며 "가시요!" 하며 떠민다. 어서 어서
속히 가시요! 안녕! 안녕! 시원하구먼 한다.
철석 문을 닫고는 행여 "더 오지 마시요!" 를 기원한다. 이젠 소용이 더 없으니깐 한다.
그러나 혹시 모를 일이지! 행여 더 오려면 내가 환영할 수 있을 때 오시요 한다. 그러나 환영할
건덕지가 언제 생겨나겠는가 한다. 그렇지만 지혜롭게 여운을 남기면서 "보류..."라고 말한다.
의젔하게 모처럼 관대함을 보인다. 그리고는 인간이란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서... 하고... 이렇
게 호의 섞어 설명을 한다.
이때 그 모습이란 도덕가요, 군자요, 그리고 뭐, 뭐 하는 모습일 것이다.
이럴 수 있어! 아니 이럴게 말할 수 있어!
인간에 대한 이런 해석은 큰 모욕이며 모독일지 모른다. 그래서 속엣 말치고는 자신 만이 아는
속 사람 모습 말이지 한다. 절대 당신 말고 당신 속에 있는 이기심씨란 놈, 그 놈 이야기야! 한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너와 나 속에 어느만치 자리한 적나나한 이기심씨라는 참 모습인 것이다.
아마도 하나님이 보시는 통찰기구로 우리를 볼 수 있다면 이런 것이 다 훤히 보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왜 이런 연구가 필요한 것인가?
그러고 보니 중세기 역사 속에서 "성자"론 발견은 터무니 없는 것이 아니었다. 어쩜 필연이었다.
오늘날 역시 성경이 말하는 "은혜"를 말하는 자는 이 성자와 무지 가깝지 않을까!
바울 사도는 자신의 누추함을 알면서 "은혜'를 60번 말했고 "성도"라는 말을 40번 정도 말했다.
그는 그의 서신들 시작과 끝을 은혜로 장식한다. 모팟은 "그의 서신의 마지막을 은혜를 기원함
으로 그 여운을 남겼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 여운을 가지고 오늘을 사는 우리는 비록 죄인이지만 "성도"가 된다.
하나님이 친히 이렇게 보아주시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한 가지 비결을 말해야만 한다. 굳이 말해야만 한다.
성도며 은혜를 받는 자는 그 은혜에 잠겨 살 것이다. 그리하면 이기심씨라는 그 녀석이 다라나
고 말 것이다. 그 음험하고 흉칙한 그 모습, 그 놈이 깡그리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리고 성자가 될 것이다.
자비로운 주 하나님 날 구원했으니
내 잃었던 귀한 생명 이제야 찾았네
빛나고 높은 보좌 앞 주님만 모시고
영원무궁 찬양하며 주 영광 돌리리
* 지도자의 계속 교육이나 수양이 요구 되는데 일반적으로 이것을 품성변화 라고 일컷는다.
이것은 적나나한 이기심씨의 본 모습이다. 감추인 모습이다.
"못 줘요!" 무엇을 쌓고 무엇을 말하고 무엇하게 사는 속에도 이것이 도사려 있음은 스스로에게
자증한다. 못 줄 것 많다. 자신의 심중 은밀한 데로 들어가 보면...
그러나 "주시요!"다. 그것 자체가 내 마음, 내 것이다. 얼마든지이다. 내게 주는 자는 좋은 사람,
호감의 사람이다. 나를, 그리고 나의 말을 액면 그대로 좋게 봐 주는 사람, 참 좋은 사람이다.
주겠다는 사람이 호의를 가지고 오겠다고 하니 "오시요!" 환영! 한다. 왜, 준다니 말이다
두둥실 내 친구이어라 한다. 언제적 우정이더냐 한다.
그러나 속샘 받았으면 되었지! 더 이상은 무엇을 "말하지 마시요!" 라고 한다. 근사하게 스트레
스라는 놈이 있는 법이요 하고 설파한다. 속셈, 이를 챙겼으면 되는 것이지 뭐더냐 한다.
사람은 이렇게 지혜로워야 해! 라고 하면서 돌아서서 웃는다.
그러고 보니 이젠 너의 불필요를 느낀다. 그래서 응석 부리며 "가시요!" 하며 떠민다. 어서 어서
속히 가시요! 안녕! 안녕! 시원하구먼 한다.
철석 문을 닫고는 행여 "더 오지 마시요!" 를 기원한다. 이젠 소용이 더 없으니깐 한다.
그러나 혹시 모를 일이지! 행여 더 오려면 내가 환영할 수 있을 때 오시요 한다. 그러나 환영할
건덕지가 언제 생겨나겠는가 한다. 그렇지만 지혜롭게 여운을 남기면서 "보류..."라고 말한다.
의젔하게 모처럼 관대함을 보인다. 그리고는 인간이란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서... 하고... 이렇
게 호의 섞어 설명을 한다.
이때 그 모습이란 도덕가요, 군자요, 그리고 뭐, 뭐 하는 모습일 것이다.
이럴 수 있어! 아니 이럴게 말할 수 있어!
인간에 대한 이런 해석은 큰 모욕이며 모독일지 모른다. 그래서 속엣 말치고는 자신 만이 아는
속 사람 모습 말이지 한다. 절대 당신 말고 당신 속에 있는 이기심씨란 놈, 그 놈 이야기야! 한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너와 나 속에 어느만치 자리한 적나나한 이기심씨라는 참 모습인 것이다.
아마도 하나님이 보시는 통찰기구로 우리를 볼 수 있다면 이런 것이 다 훤히 보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왜 이런 연구가 필요한 것인가?
그러고 보니 중세기 역사 속에서 "성자"론 발견은 터무니 없는 것이 아니었다. 어쩜 필연이었다.
오늘날 역시 성경이 말하는 "은혜"를 말하는 자는 이 성자와 무지 가깝지 않을까!
바울 사도는 자신의 누추함을 알면서 "은혜'를 60번 말했고 "성도"라는 말을 40번 정도 말했다.
그는 그의 서신들 시작과 끝을 은혜로 장식한다. 모팟은 "그의 서신의 마지막을 은혜를 기원함
으로 그 여운을 남겼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 여운을 가지고 오늘을 사는 우리는 비록 죄인이지만 "성도"가 된다.
하나님이 친히 이렇게 보아주시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한 가지 비결을 말해야만 한다. 굳이 말해야만 한다.
성도며 은혜를 받는 자는 그 은혜에 잠겨 살 것이다. 그리하면 이기심씨라는 그 녀석이 다라나
고 말 것이다. 그 음험하고 흉칙한 그 모습, 그 놈이 깡그리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리고 성자가 될 것이다.
자비로운 주 하나님 날 구원했으니
내 잃었던 귀한 생명 이제야 찾았네
빛나고 높은 보좌 앞 주님만 모시고
영원무궁 찬양하며 주 영광 돌리리
* 지도자의 계속 교육이나 수양이 요구 되는데 일반적으로 이것을 품성변화 라고 일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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