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의 일 - 설교?(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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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가 하는 많은 일이 있지만 "장로의 일" 가운데 수직적으로는 "예배 관장"이 중요하며 수
평적인 관계로는 "설교" 및 "선교"가 중요하며 우선한다.
장로에게 교회요람은 "설교를 할 수 있어야 한다. ...교회의 예배를 인도할 수 있어야 한다.
...교회의 직원들을 선출할 때 선거위원회가 이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라고 제시한다.
어쩌면 이 내용 설명은 미약한 강조인듯이 들린다. 그러나 어쩌면 그렇게 미약하게 강조해
야 할 이유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알고 보면 그 실은 설교를 잘 해야 한다 라는 강력한 강조가 그 속
에 들어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 그럴까? 장로는 목사를 위시하여 함께 교회의 여러 가지
사명을 수행하지만 천성적으로 설교면 만은 다소 미약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설교를 할 수 있어야 한다 라고 강조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사려깊은 표현이다. 사
실상 그 말이 지향하는 목표나 이상은 사실 강력한 설교자가 되는 것이다. 장로는 꼭 이점을
이해해야 한다.
그렇다면 장로가 설교를 잘 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장로가 설교에 경성해야 할 그 이유는
무엇인가?
1) 장로는 설교자이다.
한 교회 안에 있는 목사나 장로는 영적인 지도자이다. 교회의 중심과 지도자의 중심 과제는
오로지 기별이다. 그래서 설교자는 중하다. 그 기별 때문에 제반사는 필요 된다.
목사는 유급 사역자라면 장로는 무금으로 목사와 함께 하는 영적인 지도자이다. 지도자는 무
슨 다른 일 보다 더 설교를 잘 해야 한다. 목사가 주재하지 아니하는 교회에서는 유득 장로가
설교자가 되고 설교 문제를 관장해야만 한다. 담임 목사가 주재하는 교회일지라도 장로는 설
교를 하게 되며 허다히 돌보는 분교를 갖는 교회에서는 장로의 설교 사명이 확대된다.
가능한 이점에 있어서 설교의 원론적인 이야기를 더 해보자!
2) 설교자인 장로는 영혼을 다룬다.
이 이야기는 설교의 본질적인 이야기이다. 설교를 어떻게 정의하겠는가? 영혼에 대한 구원의
손길, 그것이다. 설교가 영혼을 구원한다.
낙망하여 파산의 우려가 있는 사람이나 가정이 설교의 기별로 말미암아 때때로 그 전환점을
이룬다. 이것은 도대체 무슨 능력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시다. 설교자는 다만 하나
님의 손 안에 들려있는 도구일 뿐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하나님이 쓰시기에 가장 합당하게 하나님께 맡겨저야 한다는 것이다. 꼭
웅변이어야 할 것이 없고 논리적이거나 식견적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주의 영이 있게 하는 영
의 과학이다. 겸손하고 온유한 그 설교 보자기 속에 황금빛 나는 보배가 그대로 투영되어 반사
만 되면 좋은 것이며 되어지는 것이다.
듣는 자들은 바로 그것을 원한다. 그것을 원하여 고개를 길게 빼 응시하는 것이다. 아마도 그에
게 있어서 최선의 영감이 제시될 것이다. 바울이 철학자들 앞에 섰을 때도 응당 그랬을 것이다.
설교는 엄숙한 것이다. 설교는 이 설교를 듣는 사람들 중에 자기의 생애 중에 마지막 듣는 기
별일 수도 있다는 정신으로 설교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목회 중에 그런 경험들을 친히
보아왔다. 그 말씀은 사실이었다. 이젠 이 설교를 듣고 가서 마지막으로 이혼을 하리라 생각했
는데 그만 이 설교를 듣고 가서 연합하는 가정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영의 과학이 하는 일이다.
3) 설교자인 장로는 영적인 지도자이다.
"영적인 지도자", 이는 다소 행정적인 의미가 가미 된 이야기이다. 비단 대중을 향한 단순한 설
교이지만 장로는 목회학적인 시야에서 넓은 해안과 통찰력이 필요하다. 그 통찰력이란 은밀하
고 비밀한데 까지 그 사려와 치유가 미쳐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때때로 목양 설교일수록 그 설교는 그런 내용을 노출시키지는 않지만(주의해야 함)
영적, 정신적 지주 역활을 해야 하는 내용이 포함 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치과 의사가 이를
뺀 줄을 몰랐는데 대화 중 어느 새 빼버린 것과 같은 치유가 설교에서 가능하다고 믿는가?
성령으로 기도하고 북돋고 용기를 더해주고 이해시키며 해결해주는 등의 역활이 그 속에 있
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고로 그 기별은 사람으로 하여금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영역의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
다. 이런 때 교회는 보이지 않게 암초를 피하고 열 외에 미칠 위험까지를 경종하기도 하는 것이
다.
그런고로 장로로써 설교에 대하여 유약한 표현을 하는 것은 금물이다. "오늘 부득불 목사님이
안계셔서 이렇게 설교단에 섰지만...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제가 뭐..." 하는 식은 기대와 가능성
마저 그만 설교 전체를 유약하게 만들어버리고 감화를 단 번에 감소시킬뿐 아니라 설교자를
판박히게 유약하게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영적인 것이 이렇게 삽시간에 소실 되는 것이 무척
안타깝다. 이런 과오는 장로의 설교에 대한 위치를 미처 상념적으로 고려하지 못한 탓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설교를 하지 아니하고 편하게(?) 지내려 한다면 이상하게도 그런 영적인 분위기는 자
신을 그렇게 정의하는 것 이상으로 훤히 나타내 보이기 때문에 이런 전근대적인 사고를 떠나
서 오늘날 같은 성숙해 가는 사회와 교회에서 강력한 설교자로 서기 위해 조석 제단에서 기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조심스러운 생각이 든다.
자신 뿐 아니라 기별이 산 교회가되기 위해서도 반드시 그러해야 한다. 양단 간에 지도자가 그
러하면 성도들도 그러해지는 것이다.
4) 설교자인 장로는 S. D. A.의 강력한 "기별자 "(messenger)이다.
이것은 설교에 있어서 진 일보한 이야기이다. 지금까지 이렇게 말해오고 있지만 설교를 장로의
일이라는 하나의 직무로써의 설교 이행을 하는 것이 아닌 사실상 넓은 의미에 있어서 재림교회
의 기별선포자로써의 설교가 무장 되어 있는 정신을 의미하는 말이다.
기별이 선포 되어야 한다. 복음과 함께, 그리고 복음과 조화 되게 교리적인 측면이 강조 되면서
특히 우리의 독특한 기별이 제시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려운 때에 빌리그래함이나 와렌 같은 분이 우리 기별에 대하여 지지해 주는 것은 어찜인가.
우리의 기별을 듣고 읽고 들은 바이기 때문이다. 성서적이기 때문이다. 해외로 가는 청년들 만
이 선교사나 설교자는 아니다. 오랜 기성교회라고 할지라도 여전히 교회는 더 넓은 세계를 위한
선교의 밭이 되고 있는 것이다.
아주 작은 교회인데 밤 예배에 의외의 한 사람이 뒷 자리에 참석했다. 장로님은 열심히 설교를
마쳤다. 물론 참석했던 그 손님은 교회를 떠나갔지만 그는 이사 간 도시에서 재림교회를 찾아
참석했고 세월이 지나 지금은 이 교회의 장로이시다. 그분은 "그래, 예언의 신을 읽게나!"하고
충고도 하시는 착하고 선비 같은 선한 종이 된 것이다. 그의 간증은 "내가 처음 밟은 교회의 장
로님의 설교가 나를 정복했고 나를 재림교회에 맺다!"고 했다.
설교에는 영혼을 살리는 주의 영이 함께 하시는 것이다. 설교 역시 신비의 분야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분야이기 때문에 ... 따라서 신의 과학이기 때문에 ...이런 해석은 설교가 수평적인 관계
이기 보다는 하나님과의 수직관계임을 증명이라도 하는 것 같지 아니한가!
장로는 설교자이다!! 장로는 강력한 설교자이다!!
평적인 관계로는 "설교" 및 "선교"가 중요하며 우선한다.
장로에게 교회요람은 "설교를 할 수 있어야 한다. ...교회의 예배를 인도할 수 있어야 한다.
...교회의 직원들을 선출할 때 선거위원회가 이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라고 제시한다.
어쩌면 이 내용 설명은 미약한 강조인듯이 들린다. 그러나 어쩌면 그렇게 미약하게 강조해
야 할 이유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알고 보면 그 실은 설교를 잘 해야 한다 라는 강력한 강조가 그 속
에 들어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 그럴까? 장로는 목사를 위시하여 함께 교회의 여러 가지
사명을 수행하지만 천성적으로 설교면 만은 다소 미약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설교를 할 수 있어야 한다 라고 강조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사려깊은 표현이다. 사
실상 그 말이 지향하는 목표나 이상은 사실 강력한 설교자가 되는 것이다. 장로는 꼭 이점을
이해해야 한다.
그렇다면 장로가 설교를 잘 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장로가 설교에 경성해야 할 그 이유는
무엇인가?
1) 장로는 설교자이다.
한 교회 안에 있는 목사나 장로는 영적인 지도자이다. 교회의 중심과 지도자의 중심 과제는
오로지 기별이다. 그래서 설교자는 중하다. 그 기별 때문에 제반사는 필요 된다.
목사는 유급 사역자라면 장로는 무금으로 목사와 함께 하는 영적인 지도자이다. 지도자는 무
슨 다른 일 보다 더 설교를 잘 해야 한다. 목사가 주재하지 아니하는 교회에서는 유득 장로가
설교자가 되고 설교 문제를 관장해야만 한다. 담임 목사가 주재하는 교회일지라도 장로는 설
교를 하게 되며 허다히 돌보는 분교를 갖는 교회에서는 장로의 설교 사명이 확대된다.
가능한 이점에 있어서 설교의 원론적인 이야기를 더 해보자!
2) 설교자인 장로는 영혼을 다룬다.
이 이야기는 설교의 본질적인 이야기이다. 설교를 어떻게 정의하겠는가? 영혼에 대한 구원의
손길, 그것이다. 설교가 영혼을 구원한다.
낙망하여 파산의 우려가 있는 사람이나 가정이 설교의 기별로 말미암아 때때로 그 전환점을
이룬다. 이것은 도대체 무슨 능력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시다. 설교자는 다만 하나
님의 손 안에 들려있는 도구일 뿐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하나님이 쓰시기에 가장 합당하게 하나님께 맡겨저야 한다는 것이다. 꼭
웅변이어야 할 것이 없고 논리적이거나 식견적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주의 영이 있게 하는 영
의 과학이다. 겸손하고 온유한 그 설교 보자기 속에 황금빛 나는 보배가 그대로 투영되어 반사
만 되면 좋은 것이며 되어지는 것이다.
듣는 자들은 바로 그것을 원한다. 그것을 원하여 고개를 길게 빼 응시하는 것이다. 아마도 그에
게 있어서 최선의 영감이 제시될 것이다. 바울이 철학자들 앞에 섰을 때도 응당 그랬을 것이다.
설교는 엄숙한 것이다. 설교는 이 설교를 듣는 사람들 중에 자기의 생애 중에 마지막 듣는 기
별일 수도 있다는 정신으로 설교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목회 중에 그런 경험들을 친히
보아왔다. 그 말씀은 사실이었다. 이젠 이 설교를 듣고 가서 마지막으로 이혼을 하리라 생각했
는데 그만 이 설교를 듣고 가서 연합하는 가정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영의 과학이 하는 일이다.
3) 설교자인 장로는 영적인 지도자이다.
"영적인 지도자", 이는 다소 행정적인 의미가 가미 된 이야기이다. 비단 대중을 향한 단순한 설
교이지만 장로는 목회학적인 시야에서 넓은 해안과 통찰력이 필요하다. 그 통찰력이란 은밀하
고 비밀한데 까지 그 사려와 치유가 미쳐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때때로 목양 설교일수록 그 설교는 그런 내용을 노출시키지는 않지만(주의해야 함)
영적, 정신적 지주 역활을 해야 하는 내용이 포함 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치과 의사가 이를
뺀 줄을 몰랐는데 대화 중 어느 새 빼버린 것과 같은 치유가 설교에서 가능하다고 믿는가?
성령으로 기도하고 북돋고 용기를 더해주고 이해시키며 해결해주는 등의 역활이 그 속에 있
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고로 그 기별은 사람으로 하여금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영역의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
다. 이런 때 교회는 보이지 않게 암초를 피하고 열 외에 미칠 위험까지를 경종하기도 하는 것이
다.
그런고로 장로로써 설교에 대하여 유약한 표현을 하는 것은 금물이다. "오늘 부득불 목사님이
안계셔서 이렇게 설교단에 섰지만...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제가 뭐..." 하는 식은 기대와 가능성
마저 그만 설교 전체를 유약하게 만들어버리고 감화를 단 번에 감소시킬뿐 아니라 설교자를
판박히게 유약하게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영적인 것이 이렇게 삽시간에 소실 되는 것이 무척
안타깝다. 이런 과오는 장로의 설교에 대한 위치를 미처 상념적으로 고려하지 못한 탓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설교를 하지 아니하고 편하게(?) 지내려 한다면 이상하게도 그런 영적인 분위기는 자
신을 그렇게 정의하는 것 이상으로 훤히 나타내 보이기 때문에 이런 전근대적인 사고를 떠나
서 오늘날 같은 성숙해 가는 사회와 교회에서 강력한 설교자로 서기 위해 조석 제단에서 기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조심스러운 생각이 든다.
자신 뿐 아니라 기별이 산 교회가되기 위해서도 반드시 그러해야 한다. 양단 간에 지도자가 그
러하면 성도들도 그러해지는 것이다.
4) 설교자인 장로는 S. D. A.의 강력한 "기별자 "(messenger)이다.
이것은 설교에 있어서 진 일보한 이야기이다. 지금까지 이렇게 말해오고 있지만 설교를 장로의
일이라는 하나의 직무로써의 설교 이행을 하는 것이 아닌 사실상 넓은 의미에 있어서 재림교회
의 기별선포자로써의 설교가 무장 되어 있는 정신을 의미하는 말이다.
기별이 선포 되어야 한다. 복음과 함께, 그리고 복음과 조화 되게 교리적인 측면이 강조 되면서
특히 우리의 독특한 기별이 제시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려운 때에 빌리그래함이나 와렌 같은 분이 우리 기별에 대하여 지지해 주는 것은 어찜인가.
우리의 기별을 듣고 읽고 들은 바이기 때문이다. 성서적이기 때문이다. 해외로 가는 청년들 만
이 선교사나 설교자는 아니다. 오랜 기성교회라고 할지라도 여전히 교회는 더 넓은 세계를 위한
선교의 밭이 되고 있는 것이다.
아주 작은 교회인데 밤 예배에 의외의 한 사람이 뒷 자리에 참석했다. 장로님은 열심히 설교를
마쳤다. 물론 참석했던 그 손님은 교회를 떠나갔지만 그는 이사 간 도시에서 재림교회를 찾아
참석했고 세월이 지나 지금은 이 교회의 장로이시다. 그분은 "그래, 예언의 신을 읽게나!"하고
충고도 하시는 착하고 선비 같은 선한 종이 된 것이다. 그의 간증은 "내가 처음 밟은 교회의 장
로님의 설교가 나를 정복했고 나를 재림교회에 맺다!"고 했다.
설교에는 영혼을 살리는 주의 영이 함께 하시는 것이다. 설교 역시 신비의 분야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분야이기 때문에 ... 따라서 신의 과학이기 때문에 ...이런 해석은 설교가 수평적인 관계
이기 보다는 하나님과의 수직관계임을 증명이라도 하는 것 같지 아니한가!
장로는 설교자이다!! 장로는 강력한 설교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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