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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의 사명을 위한 두 가지 기능적인 역활 소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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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영근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2009.07.26 06:21 조회수 4,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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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것의 원리는 똑같다. 교회의 성장은 생물의 성장과 같다. 성장에는 기능과 역활이
있듯이 교회는 이것의 원활한 급여가 필요하며 이것은 거의 교회 지도자들이 급여할  몫이
다.
"교회의 두 가지 기능적인 역활"이란 다분히 교회론적이며 목회론적이며 경험론적인 것이
다.  이 두 가지 기능적인 역활은 예수님의 지상 목회에서 뚜렸하게 발견되어진다.
그러나 오늘은 그 전편을 뒤로 하고 오늘날의 측면에서 그것의 정신을 근간으로 해서 후편
을 잠시 살펴보려고 한다.

하나는 공동체적인 집산이합이며 또 하나는 수도원적인 수도수련 순환생활이다. 그리고 이
것은 역사적인 이야기가 아니며 지금과 미래의 교회론적인 격려를 위한 것이다.
교회는 거룩한 곳이라고 자처하면서 하나의 딱딱한 고립 선상의 정체성을 이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는 교회로부터 사회를 향해 나아가는 활발하고도 여유있는 지속적인 활동이며
또 하나는 세속사회로부터 교회로 들어오는 극한 궁극의 활동이다. 그리고 이 활동은 끊임
이 없이 반복 되고 이어지는 활동이다.
하나님의 교회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딤 전 3:15)이다. 살아있는 것은 성장하면서 활
동하고 존재한다. 그리고 열매를 거둔다.


1. 교회는 지역사회의 삶의 공동체이다.
교회는 지역사회로 퍼져 나아가는 기능적인 성격의 것이다.
오늘날은 내가 사는 지역이 Canton이라면 우리 교회가 "Canton community church"로 불리
기를 바란다. 이 말은 교회가 적어도 그 영향이 켄톤이라는 주변 사회로 퍼져 나아가며 멀
리는 디트로이트 라는 넓은 영역 사회를 향해 나아가면서  공동체 역활을 하려는 의미이다.
우리는 그만한 역활과  활동을 구상한다. 우리는 행정사회의 지도자들을 만나고 미국사
회이지만 영어로 된 전도지를 가지고 온 주변 사회에 뿌리면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나는 
내 스스로 일년에 한 번 교회 주변 거리를 방문하는 활동이 있는데 우리 교회와 단절된 상
태인데도 불구하고 아, 그 교회이냐고 하면서 호감을 가지고 대해주면서 모금에 기꺼이 가
담하여 성의를 보이는 미국인들을 보았다.

우리의 전도가 한국인만을 골라서 하는 전도로는 너무 초롱초롱한 정신인 것만 같다. 무차
별 전도하는 것이 오히려 사려 깊다. 전도 하다 보면 미국인 자녀들도 우리 청년교회에 들
어오게 될 것이며 이상한 인연으로 한국인과도 접촉하게 되는 것이 국경이 없는 인지상정
사회이다.
하나님은 관계 속에서 상상 외로 역사하신다. 그러기에 좁게 볼 것이 아니라 넓게 보면서
활동하면 대망에 걸려드는 좋은 영혼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주님이 두루 다니시면
서 얻은 12 제자 운동이며 수많은 무리들을 얻은 운동이며 이른비 운동으로 이어지는 초대
교회운동이었다.

그래서 community를 위해 교회의 행사 활동을 홍보하면서 참여를 권장할 수 있다. 마치 정
부에 기획부가 있는 것 처럼 교회에도 어느 수뇌부에 공동사회를 위한 봉사와 관계를 위해
활동하기 위한 연구부(기획부)가 있어서 상설 연구하고 적어도 1년에 1-2 차례는 사회와 관
련된 교회의 활동을 전개할 수 있다.
이런 활동은 교회로 하여금 살아 움직이게 한다. 주변사회의 사람들을 모집광고하여 1-2일
정도의 가까운 관광여행을 하는데 우선 이런 일 때문에 교회 성도가 새로운 신선한 물줄기
를 타지 않을 리가 없다. 이런 때 자금을 드려 잘 대접하면 다른 일로 이어질 호감으로 남는
다. 구상하고 연구하면 할 일들이 많이 있다.
마치 온 몸의 피가 전신을 순환하듯이 우리의 활동은 대외적인 것으로 부산하게 하여야만
한다. 우리 교회는 reach out 해야 한다.
물리학의 원리는 반응, 혹은 반동 작용이 있는 법이다. 이런 활동으로 이웃들이 교회를 찾는
상황도 벌어지기 마련이다. 우리는 움추려 그대로 있거나 고전을 지키는 것은 금물이다. 이
전 보다는 무엇인가를 활짝 열어 보이면서 가깝고도 친근감 있게 접근하는  교회 모습을 반
드시 견지할 필요가 있다.

2. 교회는 경건하고도 거룩한 수도원과 같은 삶의 수련장이다.
교회는 세속과 구별된 경건하고도 거룩한 삶의 수련장이라는 기능적인 성격의 것이다.
어쩌면 2번은 1번과는 반대 되는 기능과 역활의 것이다. 1번은 교회에서 밖으로 라는 활동
인데 반하여 2번은 세상에서 교회로의 활동이며 또 성도된 자들이 마땅이 찾아야 할 더 높
은 경지를 지향하는 것이다.
일반적인 신교에서는 신자의 분류를 cultural christian과 biblical christian으로 분류한다.
바로 이것은 기독교의 문화사회가 좋은 것인 만치 거기에 몸담고자 한다든가 거기 머물기
를 바라는 신앙을 가지지만 사실상 이런 과정을 거쳐서 성서적인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
라는 활동이 교회가 바라는 궁극의 이상이며 목적이며 노력인  것이다.

교회의 신앙생활이란 세속의 것, 인간 속에 있는 죄로 길드려지고 때때로 강열하게 머리를
처들고 일어나는 죄악의 욕정들을 정복하기 위해서 자신이 자신에게 사정 없는 훈련을 가
하는 훈련 도장이라는 교회개념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자칫 이 정신이 희박해지기 쉽기 때문에 교회는 세속 사회 속에서의 세속화 되는 경
향을 보이는 교회 라는 점을 염려하는 것이다. 목사가 설교를 할 때 웃기기를 잘 하면 그 재
미에 호감을 갖는 예를 든다면 마치 그런 경박 속에서 갖는 재미와 취향의 기독교의 문화적
인 보존을 사람들은 오래 지속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바라는 바는 그것에 있지 않고 벌써 그 과정을 훨씬 벗어나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모두가 우리 신앙의 궁극적인 타깃이 되는 것은 품성적으로 변화하기를 바라는
것에 있다. 우리는 자원하는 믿음으로 살지만 모름지기 극기의 무한한 정신훈련을 쌓기를
바라는 것이 교회가 바라는 이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적당히 교회에 나오고 적당히 조석 에배를 드리고 형편 따라 고려하면서 명목상의
신앙생활 만을 결단코 바라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이점에서 결론적으로 말하면 교회가 마치
수도원 생활과 같은 경건의 연습과 순결한 품성의 변화를 위한 수련장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
라는 것이다. 이것이 곧 두번째 같는 성격의 것이다.

기독교 역사에 의하면 제 3세기 경부터 두드러진 수도원(monastery) 생활이 시작한 것은 속
세에 대한 반작용적인 필연적인 발생이었다. 이것은 청빈과 정결과 순종에 대한 맹세와 더불
어 생할회칙을 지키면서 속세를 떠난 수도자들의 마음이 되어 서로 공주하면서 엄격한 신앙
수칙생활을 하였다. 이러한 수도원 생활의 혜택은 저들에게 있어서 은총으로 받은 황금 알과
같은 것이었다.
그들은 그런 내적인 변화를 이룩하기 위한 투쟁에 들어가면서 자연 속세와는 단절사회가 되
었다. 심지어는 가까운 자의 죽음의 소식 마저 전달 받을 수 없었다. 도를 가지고 수양하는 이
들이고 보면 그것은 지극히 해롭다는 수칙 때문인 것이다.
수도정신을 혼란케 하는 어떤 외부의 연락도 허락 될 수 없었다. 감독과 의사 외에는 어느 누
구도 이 수도원에 들어올 수 없었다.  아주 특별한 예외의 경우라도 밖에서 구멍으로 된 통로
를 통해 서로 말을 할 수는 있을지언정 서로간 사람의 모습을 보아서는 아니되었다.
아침에 빛이 문틈 새로 비처오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야 하고 끊임 없는기도와 성경 읽기를
반복에 반복을 하며 밤 늦게까지 각종 극기와 수련훈련을 받되 시간의 절도 대로 어쩌면 스
스로 그렇게 하여야만 했다.

이리하여 일정한 연 수도 정해짐이 없는 세월 동안 수도사의 생활을 하였다. 이렇게 수양 되
고 단련된 수도사들의 대외 활동을 통해 사회는 정화 되는 변화를 힘입었다. 당시 교회의 신
자들은 비록 수도자가 되지는 못했다 하더래도 당시 교회와 더불어 그것을 이상하면서 자신
들의 거룩성의 변화를 경건하게 희구했다.
파코미우스 수도생활, 바실리우스 수도생활, 그리고 카톨릭 시대에는 베네딕토회, 프란 시스
코회, 도미니코회, 예수회, 그리고 성공회에서는 요한회 등이 대표적으로 있었다. 물론 이후
세대에에 나름 대로의 단점도 지적되었지만 여기에서의 이야기는 그 수도생활의 필연성을
가진 수도의 취지 그것을 살리는 것에 오늘날의 의미가 있다.

각박한 사회생활에서 우리는 극히 존절한 정신과 마음 가짐이 필요하다. 에녹이 하늘 경계선
상에서, 노아가 오랜 동안 방주를 짖는 망치 소리 속에서, 야곱이 얍복강 여울의 선하고 힘겨
운 투쟁에서, 다니엘이 정기적으로 창문을 열고 호소하면서, 아브라함이 모리아산상에서 여
호와를 진실로 경외하면서, 예수님이 40일 광야에서의 극기생활 내보이면서, 침례 요한이 광
야에서 소스라치게 외쳐대며, 그리고 바울 사도의 수많은 복음 활동 중에 당한 신앙시련 중 
결단을 보인 것들, 다 이것들이 하늘을 향해 깨이고 깨인 수도생활이 아니고 그 무엇이었던
가!
틈이 보여야 쇄기를 밖는다는 것이다. 세상은 다양하며 얄팍하며 극악하며 지극히지혜롭다
재림성도는 오직 세상의 분별 내지는 격리는 물론 그리스도의 품성화, 곧 거룩해야 한다 라
고 말한다. 주님은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준엄하고 엄격한 훈련과 신앙체험을 요구할 것이
다.(히 11:29-40 참조)
교회는 수도원이다. 이런 "경건의 연습"으로 교회가 세상에 물들지 않고 변화 되며 수호 되어
야만 한다.


이제 간단한 정리를 해보자! 이상에서 말한 대로 어쩌면 교회는 이 두 가지 서로 상반된 기능
과 역할의 조화 속에서 성숙해지고 최고의 교회 사명을 수행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의 지도자적인 자신의 입지를 어떻게 활용하고 싶은가? 하는 것이 관건이다.
모세에게 보여준 지도자의 은혜는 한시적이었다. 지도자는 반드시 바톤을 넘기는 것이었지
항용 머물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는 자신의 생애 속에서의 황금기를 어떻게
활용하고 싶은가? 하는 것이 또 하나의 관건이다.
오직 주님만을 위하여, 그리고 "나의 나 됨"을 위하여...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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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寧熙님의 댓글

no_profile 李寧熙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자신을 수련하는
修道院의 기능으로서 교회, 공감이 가는 말씀입니다

도연명의 귀거래사에
"大隱( 위대한 은둔자)는 市中에 숨는다' 는 말이 생각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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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근님의 댓글

정영근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

그 말이 도연명의 말이었군요!
소중한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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