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 속의 교회, 교회 속의 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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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세상 혹은 세속과의 간격을 좁힐 수는 없는 것인지 하는 생각이다. 이것이 문제이다.
교회는 거룩한 곳이고 우리는 속세여서 혹시 수양을 위해서는 몰라도 교회의 문턱이 너무 높
아 올라갈 수 없다 라고 일반이 생각한단다. 그래서 선뜻 선택하기란 어렵다는 것이다.
이렇게 교회와 속세와의 유리된 개념에서는 전도가 답보상태를 이루거나 힘이 없어 보인다.
전도나 선교로 세상이 교회로 들어오기를 바라는데 임마누엘 사상으로 교회가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모종의 속세 접근법이 가능한 것인지 아마도 아직도 미래의 기독교 선교의 돌파구
이며 선교의 방향이며 전략인 것만 같다. 이상은 해도 실천적인 데는 거리가 아직은 멀다.
그래서 오늘날의 기독교회는 교단 교회명 보다 차라리 "community church" 라는 개념으로
세상과 함께 복음을 조화하고 가까이 접근하려고 시도한지 오래다. 그리고 강대상이 낮아지
거나 똑같은 지표면을 복음선포의 자리로 활용한다. 막힌 것이 없는 접근의 자유화이다.
그리고 세속 속에 뛰어드는 사도 바울의 심리적인 전도 방법을 더러 활용하려고 한다.
이런 물줄기는 물론 성경 사상에서 비롯되었지만 여러 저명한 신학자들이 부르짖는 "신성한
세속성"(holy worldliness) 개념과 방향에서 나온 것과 무관하지 않다.
어떻든 중요한 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교회와 세속과 가까운 접근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교회의 거룩함이 세속의 거룩함으로 변화히기까지를 욕망하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는 미래를 위한 구도가 필요하다. 다음의 이야기를 주시해 보라.
스코틀란드의 유명한 목사 조지 맥클레오드의 이야기와 그 소견 이야기이다. 교회가 세상을
가까이 접근하고 포용하는데 대한 일리를 제공한다. 낮은 것이 높아질 수는 없다. 높아진 것이
낮아지는 것은 마음만 잘 먹으면 가능하다.
높은 곳에 큰 교회당이 있었다. 교회의 전면 채색 넓은 들창에는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
님께 영광을 돌리라!"(Glory to God in the hightest!)라고 영어로 쓰여져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어느 소년의 부주의로 던진 돌에 그만 그 유리창이 깨뜨려지고 말았다. 그런데 다행하게도 떨
어저나간 것은 그 문장중 마지막 단어의 "e"자만 떨어져 나갔을 뿐이었으나 그 문장의 뜻은
전혀 다르게 나타나게 되어버렸다.
"큰 길거리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Glory to God in the hight st!)
그런데 이런 사건 이후 이 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게서 의외로 이상한 징후와 관심사가 일기 시
작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했을 때는 높은 곳에 사는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가 보다 했는데 "큰 길거리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했을 때는 이젠 우리들도 하나
님께 영광을 돌려야지 하는 모양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글을 쳐다보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빛 시선이 먼저 달라지고 교회당에 대한 친근
감과 호감이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이후 일이었다. 어느날 맥클레오드 목사가 고개를 들어 교회당을 바라보니 채색 유리가
산뜻하게 새로 끼어졌고 새로운 글씨로 글이 씨어저 있었다. 그런데 이전의 "e"자가 들어간
내용글이 다시 써저 있더라는 것이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맥클레오드 목사는 이 이야기를 하면서 탄식하는 말로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내용을 첨
부했다.
"기왕 수리를 하려면 유리창을 회전창으로 만들어서 한 쪽에는 이 글, 또 한 쪽에는 저 글을
써서 누구든지 이 두 가지 송영 중에서 그 어느 하나도 잊어버리지 않도록 했었어야만 할 것
이었다." 라고.
들창문에 글을 쓴 만치 시가지에 사는 저 아래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면 말이다.
마음의 소재가 길거리 세계에서 다시 높은 곳 세계로 옮겨져 버린 셈이었을까.
글자 하나 때문에 세상이 교회와 가까이 있기도 하고 더 멀어지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이렇게 보면 교회가 세속 속에 파고 들어갈 묘안과 여지는 아직도 남아있는 모양이다.
세상의 사람들이 교회에 응당 와야 하겠지만 반면에 어떻게 교회가 대중 속에 들어가 함께
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은 아직도 변모해가는 오늘날의 영혼에 대한 관심사이며 묘안이다.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만 한다. 사실 교회는 버젓이 오래 서 있는데 가까운 주변 사람들마져
도 이 교회와는 깡그리 교분이 없는 단절상태, 그들에게 진리의 빛이란 깜깜 무소식이라면
이것이 과연 빛의 비추이는 성격인지 우리는 꼭 다시 한 번 긍정적으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오늘도 이 세계 새로운 선교지에 발을 딛는 용사들이 있다! 아, 훌륭하다!
오늘도 새로운 복음의 찬연한 역사는 펼쳐지고 있다. 주여, 속히 오시옵소서!
교회는 거룩한 곳이고 우리는 속세여서 혹시 수양을 위해서는 몰라도 교회의 문턱이 너무 높
아 올라갈 수 없다 라고 일반이 생각한단다. 그래서 선뜻 선택하기란 어렵다는 것이다.
이렇게 교회와 속세와의 유리된 개념에서는 전도가 답보상태를 이루거나 힘이 없어 보인다.
전도나 선교로 세상이 교회로 들어오기를 바라는데 임마누엘 사상으로 교회가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모종의 속세 접근법이 가능한 것인지 아마도 아직도 미래의 기독교 선교의 돌파구
이며 선교의 방향이며 전략인 것만 같다. 이상은 해도 실천적인 데는 거리가 아직은 멀다.
그래서 오늘날의 기독교회는 교단 교회명 보다 차라리 "community church" 라는 개념으로
세상과 함께 복음을 조화하고 가까이 접근하려고 시도한지 오래다. 그리고 강대상이 낮아지
거나 똑같은 지표면을 복음선포의 자리로 활용한다. 막힌 것이 없는 접근의 자유화이다.
그리고 세속 속에 뛰어드는 사도 바울의 심리적인 전도 방법을 더러 활용하려고 한다.
이런 물줄기는 물론 성경 사상에서 비롯되었지만 여러 저명한 신학자들이 부르짖는 "신성한
세속성"(holy worldliness) 개념과 방향에서 나온 것과 무관하지 않다.
어떻든 중요한 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교회와 세속과 가까운 접근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교회의 거룩함이 세속의 거룩함으로 변화히기까지를 욕망하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는 미래를 위한 구도가 필요하다. 다음의 이야기를 주시해 보라.
스코틀란드의 유명한 목사 조지 맥클레오드의 이야기와 그 소견 이야기이다. 교회가 세상을
가까이 접근하고 포용하는데 대한 일리를 제공한다. 낮은 것이 높아질 수는 없다. 높아진 것이
낮아지는 것은 마음만 잘 먹으면 가능하다.
높은 곳에 큰 교회당이 있었다. 교회의 전면 채색 넓은 들창에는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
님께 영광을 돌리라!"(Glory to God in the hightest!)라고 영어로 쓰여져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어느 소년의 부주의로 던진 돌에 그만 그 유리창이 깨뜨려지고 말았다. 그런데 다행하게도 떨
어저나간 것은 그 문장중 마지막 단어의 "e"자만 떨어져 나갔을 뿐이었으나 그 문장의 뜻은
전혀 다르게 나타나게 되어버렸다.
"큰 길거리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Glory to God in the hight st!)
그런데 이런 사건 이후 이 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게서 의외로 이상한 징후와 관심사가 일기 시
작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했을 때는 높은 곳에 사는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가 보다 했는데 "큰 길거리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했을 때는 이젠 우리들도 하나
님께 영광을 돌려야지 하는 모양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글을 쳐다보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빛 시선이 먼저 달라지고 교회당에 대한 친근
감과 호감이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이후 일이었다. 어느날 맥클레오드 목사가 고개를 들어 교회당을 바라보니 채색 유리가
산뜻하게 새로 끼어졌고 새로운 글씨로 글이 씨어저 있었다. 그런데 이전의 "e"자가 들어간
내용글이 다시 써저 있더라는 것이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맥클레오드 목사는 이 이야기를 하면서 탄식하는 말로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내용을 첨
부했다.
"기왕 수리를 하려면 유리창을 회전창으로 만들어서 한 쪽에는 이 글, 또 한 쪽에는 저 글을
써서 누구든지 이 두 가지 송영 중에서 그 어느 하나도 잊어버리지 않도록 했었어야만 할 것
이었다." 라고.
들창문에 글을 쓴 만치 시가지에 사는 저 아래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면 말이다.
마음의 소재가 길거리 세계에서 다시 높은 곳 세계로 옮겨져 버린 셈이었을까.
글자 하나 때문에 세상이 교회와 가까이 있기도 하고 더 멀어지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이렇게 보면 교회가 세속 속에 파고 들어갈 묘안과 여지는 아직도 남아있는 모양이다.
세상의 사람들이 교회에 응당 와야 하겠지만 반면에 어떻게 교회가 대중 속에 들어가 함께
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은 아직도 변모해가는 오늘날의 영혼에 대한 관심사이며 묘안이다.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만 한다. 사실 교회는 버젓이 오래 서 있는데 가까운 주변 사람들마져
도 이 교회와는 깡그리 교분이 없는 단절상태, 그들에게 진리의 빛이란 깜깜 무소식이라면
이것이 과연 빛의 비추이는 성격인지 우리는 꼭 다시 한 번 긍정적으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오늘도 이 세계 새로운 선교지에 발을 딛는 용사들이 있다! 아, 훌륭하다!
오늘도 새로운 복음의 찬연한 역사는 펼쳐지고 있다. 주여, 속히 오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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