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관용함으로 다툼을 금지?
페이지 정보
글씨크기
본문
"장로의 자격 10째가 "오직 관용하며", 11째가 "다투지 아니하며"이다. 아마도 이 내용은 둘
다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오히려 "오직 관용하여 다투지 아니하며" 라고 하는
풀이가 가능하다.
먼저 "관용"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관용이란 무엇인가? 관용이란 넓은 도량의 이해와 용서
정신을 일컸는다. 그런데 이 "넓은 도량의 이해와 용서 정신"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자비의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근원은 딱 하나이다. 그런고로 "오직 관용하며"를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라고 정의하면 옳을 것이다.
하나님의 법과 의가 그렇게 중요한 것이지만 주님이 오랜 세월 동안 우리가 회개하기를 기
다리고 계시는 것은 바로 이 사랑과 자비의 정신 때문이다.
사실에 있어서 죄인이나 다름 없는 마찬가지 사람들인 대도 흔히 법과 공의를 빙자하면서 마
치 바리새인들이 간음한 여인에게 손톱만큼도 사랑과 자비가 섞이지 않는 자신들이 만든 준
엄한 법과 서슬이 시퍼런 의의 잣대를 드리대면서 정죄하며 잔악한 행위를 감행하려 했던 것
과 같은 태도를 취한다.
그러나 알고 보면 세상에 존재하는 법이니 공의니 하는 것은 그러한 목적, 그러한 방법으로
적용될지는 몰라도 하나님의 법과 공의는 항상 사랑과 자비와 입맞추고 있으며 이 둘은 다
사람을 구원하려는 보호벽 역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이 갖는 관용의 정신이란 죄지은 사람으로 하여금 회개로 이끈다. 관용은 주님
의 용서하시는 정신이기 때문에 이 "관용", 곧 "에피에이케이아"가 장로의 마음에 있게 되면,
교회 안에 있게 되면 교회는 보다 근본적으로 혁신 되고 변모하게 된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흔히 교회는 그럴듯하게 보이지만 심층으로 들어가 보면 악한 생각도 있고 미워
하거나 용서하지 못할 관계 형성이 엿보이며 원망과 시비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들을 그대로
가진 채로는 사실 주님과 그 거리가 멀다. 이런 교회에는 오직 사랑의 정신이 필요하고 자비
의 정신이 필요하며 이것으로 인한 피차의 화해와 관용의 정신이 요구 된다.
우리는 유의해야 할 것이 있다. 원망과 시비와 증오를 가지면서도 무슨 교회를 수호하는 의
로운 신앙 사상처처럼 구호하는 성도들의 주장하는 편에 결코 서지 말 것이다. 이것은 그리
스도의 품격으로 변화되지 못한 탓에 쩌려있기 때문이다. 결국 교회는 이 정신 때문에 병들
게 되고 더 큰 나쁜 결과와 불행을 거두게 되는 날이 오는 것은 사필귀정이다.
장로는 이 점에 있어서 성도들에 대한 그 가르침의 칼라가 분명해야 한다. 이런 지점에서 모
호함으로 얻어지는 인기는 주께 영광 되지 못하고 어느 날엔가 교회의 더 큰 인재를 낳는다.
따라서 이런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곳에 있을 수 있는 다스림의 원칙은 사랑이며 측은하게
여기는 자비의 마음인데 이런 정신이 기름기 있는 관용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장로는 어느 경우라도 "오직 관용하여 다투지 아니하"여야 하는 것이다.
만일에라도 오히려 장로가 오직 관용하지 아니하여 다투는" 정신을 보인다면 평신도가 갖는
타격은 무거우며 심히 클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장로가 어려운 사정에서 관용의 정신을 보
인다면 교회의 성도들은 발랄하고 명랑한 신앙 모습을 보이게 될 것이다.
다음에 그 연장 선상에서 주어진 "다투지 아니하며"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다투지 아니하며" 라는 정신은 이 관용적인 정신을 가질 때 비로소 피차 덕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교회는 불행하게도 흔히 다툴 거리가 생긴다. 그러나 "아무 일이든지 다툼"(빌 2:3)으
로 하지 말 것이다. 그리스도교회의 지도자는 평화로운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다투는 일은 그동안의 감화를 상실케 한다. 그리고 미래의 지도력에 대한 감화를 감소시킨다.
그래서 치명적이다.
그런대도 막상 어려움에 봉착하면 저항하며 다투며 자기 소신을 나타내려고 하게 되는데 시
의적절하지 않는 다툼은 별로 유익이 없고 자타와 교회에 손해가 된다. 그리고 그런 정신은
교회의 평온함을 깨뜨리는 쓴 뿌리가 되기 쉽다.
그래서 영감의 사도 바울은 장로를 향하여 행여나 "다투지 아니하며" 라고 당부하는 것이다.
교회의 성도들은 어떻게 보면 이같은 일에 대한 판단이 더딘 것처럼 보일지 모르나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들은 말씀으로 살면서 상당히 순수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정신적, 신
앙적 공해에 대하여 민감하게 분별하지만 그러나 단순한 판단을 잘못 내리면 모종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할 가능성이 다분히 있는 것이다.
반면에 순수하고 단순한 군중 심리는 그런 것을 근본적으로 인정하지 아니하고 일축해 버리
거나 빗나길 가능성이 많이 있다. 지도자는 성도들이 밖으로 나타내 보이지 않는 내적 부정
의식과 냉담이라는 것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간파하며 조심해야 한다.
이런 것은 부질없고 무익하기 때문이다.
다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오히려 "오직 관용하여 다투지 아니하며" 라고 하는
풀이가 가능하다.
먼저 "관용"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관용이란 무엇인가? 관용이란 넓은 도량의 이해와 용서
정신을 일컸는다. 그런데 이 "넓은 도량의 이해와 용서 정신"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자비의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근원은 딱 하나이다. 그런고로 "오직 관용하며"를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라고 정의하면 옳을 것이다.
하나님의 법과 의가 그렇게 중요한 것이지만 주님이 오랜 세월 동안 우리가 회개하기를 기
다리고 계시는 것은 바로 이 사랑과 자비의 정신 때문이다.
사실에 있어서 죄인이나 다름 없는 마찬가지 사람들인 대도 흔히 법과 공의를 빙자하면서 마
치 바리새인들이 간음한 여인에게 손톱만큼도 사랑과 자비가 섞이지 않는 자신들이 만든 준
엄한 법과 서슬이 시퍼런 의의 잣대를 드리대면서 정죄하며 잔악한 행위를 감행하려 했던 것
과 같은 태도를 취한다.
그러나 알고 보면 세상에 존재하는 법이니 공의니 하는 것은 그러한 목적, 그러한 방법으로
적용될지는 몰라도 하나님의 법과 공의는 항상 사랑과 자비와 입맞추고 있으며 이 둘은 다
사람을 구원하려는 보호벽 역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이 갖는 관용의 정신이란 죄지은 사람으로 하여금 회개로 이끈다. 관용은 주님
의 용서하시는 정신이기 때문에 이 "관용", 곧 "에피에이케이아"가 장로의 마음에 있게 되면,
교회 안에 있게 되면 교회는 보다 근본적으로 혁신 되고 변모하게 된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흔히 교회는 그럴듯하게 보이지만 심층으로 들어가 보면 악한 생각도 있고 미워
하거나 용서하지 못할 관계 형성이 엿보이며 원망과 시비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들을 그대로
가진 채로는 사실 주님과 그 거리가 멀다. 이런 교회에는 오직 사랑의 정신이 필요하고 자비
의 정신이 필요하며 이것으로 인한 피차의 화해와 관용의 정신이 요구 된다.
우리는 유의해야 할 것이 있다. 원망과 시비와 증오를 가지면서도 무슨 교회를 수호하는 의
로운 신앙 사상처처럼 구호하는 성도들의 주장하는 편에 결코 서지 말 것이다. 이것은 그리
스도의 품격으로 변화되지 못한 탓에 쩌려있기 때문이다. 결국 교회는 이 정신 때문에 병들
게 되고 더 큰 나쁜 결과와 불행을 거두게 되는 날이 오는 것은 사필귀정이다.
장로는 이 점에 있어서 성도들에 대한 그 가르침의 칼라가 분명해야 한다. 이런 지점에서 모
호함으로 얻어지는 인기는 주께 영광 되지 못하고 어느 날엔가 교회의 더 큰 인재를 낳는다.
따라서 이런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곳에 있을 수 있는 다스림의 원칙은 사랑이며 측은하게
여기는 자비의 마음인데 이런 정신이 기름기 있는 관용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장로는 어느 경우라도 "오직 관용하여 다투지 아니하"여야 하는 것이다.
만일에라도 오히려 장로가 오직 관용하지 아니하여 다투는" 정신을 보인다면 평신도가 갖는
타격은 무거우며 심히 클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장로가 어려운 사정에서 관용의 정신을 보
인다면 교회의 성도들은 발랄하고 명랑한 신앙 모습을 보이게 될 것이다.
다음에 그 연장 선상에서 주어진 "다투지 아니하며"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다투지 아니하며" 라는 정신은 이 관용적인 정신을 가질 때 비로소 피차 덕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교회는 불행하게도 흔히 다툴 거리가 생긴다. 그러나 "아무 일이든지 다툼"(빌 2:3)으
로 하지 말 것이다. 그리스도교회의 지도자는 평화로운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다투는 일은 그동안의 감화를 상실케 한다. 그리고 미래의 지도력에 대한 감화를 감소시킨다.
그래서 치명적이다.
그런대도 막상 어려움에 봉착하면 저항하며 다투며 자기 소신을 나타내려고 하게 되는데 시
의적절하지 않는 다툼은 별로 유익이 없고 자타와 교회에 손해가 된다. 그리고 그런 정신은
교회의 평온함을 깨뜨리는 쓴 뿌리가 되기 쉽다.
그래서 영감의 사도 바울은 장로를 향하여 행여나 "다투지 아니하며" 라고 당부하는 것이다.
교회의 성도들은 어떻게 보면 이같은 일에 대한 판단이 더딘 것처럼 보일지 모르나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들은 말씀으로 살면서 상당히 순수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정신적, 신
앙적 공해에 대하여 민감하게 분별하지만 그러나 단순한 판단을 잘못 내리면 모종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할 가능성이 다분히 있는 것이다.
반면에 순수하고 단순한 군중 심리는 그런 것을 근본적으로 인정하지 아니하고 일축해 버리
거나 빗나길 가능성이 많이 있다. 지도자는 성도들이 밖으로 나타내 보이지 않는 내적 부정
의식과 냉담이라는 것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간파하며 조심해야 한다.
이런 것은 부질없고 무익하기 때문이다.
- 이전글*** 세상 속의 교회, 교회 속의 세상 *** 09.07.24
- 다음글2) 타인에 대한 손상 금지? 09.07.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