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꿈에도 못 잊을 두 평신도 여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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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새로 부임한 교회는 인구 100만에 육박한 대도시에 있었다. 이 도시에 우리 교회가
4곳이 있었으나 동부 쪽이 텅 비어있어 교회 하나가 더 있어야 한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
다. 이리하여 우리는 동부 쪽에 빌딩을 전세 내어 집회소를 열고 본 교회 신자의 상당수
를 그쪽 지역 교회로 내보내면서 분교를 과감하게 시작했다.
그런데 호사다마 격으로 사람들이 모인 곳인지라 이상이 생기기 시작했다. 성도들이 다시
한 사람 두 사람 이곳 본 교회로 돌아와 버리는 것이었다. 설사 그런 일이 있다손 치더래도
차를 타고서 20분 정도의 교회 간의 거리, 어쩌면 너무 지근 거리에 개척 교회가 있었던 탓
이 컸다.
그런데 침착하고 사려깊은 두 여집사가 결연하고 단호하게 우리 두 사람이 남을지라도 우
리는 분교를 수호하고 선교의 일을 계속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결국 그 두 집사만
교회에 남게 된 셈이 되었다. 문제는 딴 일에서 시작되었는데 엉뚱하게 두 집사님이 남게
된 셈이었다.
이 두 집사님은 결국 계속성 있는 설교를 할 수 있는 분들은 아니었지만 그들이 가진 신념
으로 그일을 버티어 내고 있었다. 가정에서 아침 저녁 예배를 신실하게 진행하던 방식이
이 기회에 서로간 밑천이 되어 두 분이 뜻을 합해 그들 스스로 한 분은 안교 교장, 또 한 분
은 설교자로써 매 안식일 바꾸어 가면서 예배를 진행하게 되었다.
나는 사실 두 분의 정신에 감명 되었고 놀랐다. 나는 발령을 받아 다니는 사역자가 아니었
더라면 나는 아마 이 두 집사님들과 함께 계속해서 여기에 머물렀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2년 후 나는 갑자기 기관 사역으로 이동했다가 또 몇년 지나 다시 이 합회 책임을
맡고 합회로 되돌아왔다. 이리하여 나는 먼저 이 개척 교회의 상황을 알고싶어 갑자기 이
교회를 방문했다. 그런데 지금도 여전히 2분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있지 아니한가! 어
쩌면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결국 내가 이지경 되게 해놓고 떠난 장봉인이지 않느냐는 자
책감 마저 들었다.
이때쯤 해서 주변 교회에서는 이들의 하는 일은 성공할 수 없다 라고 생각했고 시간이 오
래 되어 이제는 이 개척 일을 까마득히 잊고 지내던 때였다. 나는 막상 그들에게 용기를
북돋아줄 수는 있었으나 이 도심지에서 그 교회의 건축이나 재정문제를 크게 해결해줄 수
는 없었다.
나는 그 후로 합회에서 오래 일했고 합회를 떠난지도 또 오래 되었는데 한 소식이 들려왔
다. 지금도 거기는 여전히 두 사람이 모여 에배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때쯤 해서 하나
님께서는 하나의 큰 기적을 이르키셨다는 희소식이었다..
시내 교회들이 이제서야 그들의 인내성 있고 진실성 있는 분교개척 의지를 확인하고 감
동하던 차인데 때마침 본 교회 신자 중 한 분이 별세하면서 "내 재산을 이곳 교회를 짓
는 일을 위해 써주시오!" 라고 하는 유언을 했다는 것이다. 바로 이 일이 이곳 교회를 건축
하는데 큰 몫을 하게 되었고 두 분의 뜻을 받들어 교회를 세우자는 뜻있는 성도들의 관심
이 이곳 저곳 교회에서 일어났다는 것이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 것 같은가!
나는 수년 전 안식일에 이곳 교회를 방문하여 설교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젔는데 보아하
니 새로 잘 지은 교회당에는 250-300명 정도(청소년은 아래층에서 따로 예배하고)의 성
도들이 모인 대형교회가 되어있는 것이었다. 이제는 본 교회 만큼이나 성장한 교회가 되
어있었다.
그런데 역시 그 두 분은 이 교회에 여전히 건재해 계셨다. 그동안 한 분은 남편과 온 자녀
를 교회 안으로 인도하여 신실하고도 행복한 재림교인 가정 자녀손들이 되어 있었고 그
의 아들은 안수 목사였다.
그리고 또 한 분 역시 그 남편이 이 교회의 장로가 되어 있었으며 모든 자녀손이 우리 재
림교인이 되어 있었으며 아들이 안수 목사와 장로가 되어 있었으며 그 사위는 삼육대학
총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나는 나의 목회 경험에서 꿈에도 잊을 길 없는 두 평신도 여집사님들을 보았다. 이 일은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의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믿음과 신념의 저력, 인내와
그 용기를 지금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 오랜 동안, 어떤 보장이나 기약도 없는 데도...그리고 어느 누구를 원망하는 말 한 마
디 없이 온유한 마음으로 줄 곧 이 길이 내 길이라는 신념찬 마음으로 서로 묶어진 두 분
의 선교전략의 생애, 난 너무나 감동된 바가 크다.
난 예수 믿고 예수 전하다가 내가 이렇듯 감명 깊은 복을 많이 보고 사는 사람이 되었다.
우리 두 내외는 지금도 이들 두 분을 생각하면 가끔 눈시울이 뜨거워지곤 한다. 예배당에
두 분만 덩그렁 앉아있던 모습하며 어쩌면 정겹고 안쓰러웠던 생각이 상념적으로 솓구
치곤 한다.
주여, 오늘도 그들에게 한 없는 신령한 은혜를 강물처럼 쏟아 주시옵소서!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 126:5-6)
아-멘, 아-멘...
4곳이 있었으나 동부 쪽이 텅 비어있어 교회 하나가 더 있어야 한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
다. 이리하여 우리는 동부 쪽에 빌딩을 전세 내어 집회소를 열고 본 교회 신자의 상당수
를 그쪽 지역 교회로 내보내면서 분교를 과감하게 시작했다.
그런데 호사다마 격으로 사람들이 모인 곳인지라 이상이 생기기 시작했다. 성도들이 다시
한 사람 두 사람 이곳 본 교회로 돌아와 버리는 것이었다. 설사 그런 일이 있다손 치더래도
차를 타고서 20분 정도의 교회 간의 거리, 어쩌면 너무 지근 거리에 개척 교회가 있었던 탓
이 컸다.
그런데 침착하고 사려깊은 두 여집사가 결연하고 단호하게 우리 두 사람이 남을지라도 우
리는 분교를 수호하고 선교의 일을 계속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결국 그 두 집사만
교회에 남게 된 셈이 되었다. 문제는 딴 일에서 시작되었는데 엉뚱하게 두 집사님이 남게
된 셈이었다.
이 두 집사님은 결국 계속성 있는 설교를 할 수 있는 분들은 아니었지만 그들이 가진 신념
으로 그일을 버티어 내고 있었다. 가정에서 아침 저녁 예배를 신실하게 진행하던 방식이
이 기회에 서로간 밑천이 되어 두 분이 뜻을 합해 그들 스스로 한 분은 안교 교장, 또 한 분
은 설교자로써 매 안식일 바꾸어 가면서 예배를 진행하게 되었다.
나는 사실 두 분의 정신에 감명 되었고 놀랐다. 나는 발령을 받아 다니는 사역자가 아니었
더라면 나는 아마 이 두 집사님들과 함께 계속해서 여기에 머물렀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2년 후 나는 갑자기 기관 사역으로 이동했다가 또 몇년 지나 다시 이 합회 책임을
맡고 합회로 되돌아왔다. 이리하여 나는 먼저 이 개척 교회의 상황을 알고싶어 갑자기 이
교회를 방문했다. 그런데 지금도 여전히 2분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있지 아니한가! 어
쩌면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결국 내가 이지경 되게 해놓고 떠난 장봉인이지 않느냐는 자
책감 마저 들었다.
이때쯤 해서 주변 교회에서는 이들의 하는 일은 성공할 수 없다 라고 생각했고 시간이 오
래 되어 이제는 이 개척 일을 까마득히 잊고 지내던 때였다. 나는 막상 그들에게 용기를
북돋아줄 수는 있었으나 이 도심지에서 그 교회의 건축이나 재정문제를 크게 해결해줄 수
는 없었다.
나는 그 후로 합회에서 오래 일했고 합회를 떠난지도 또 오래 되었는데 한 소식이 들려왔
다. 지금도 거기는 여전히 두 사람이 모여 에배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때쯤 해서 하나
님께서는 하나의 큰 기적을 이르키셨다는 희소식이었다..
시내 교회들이 이제서야 그들의 인내성 있고 진실성 있는 분교개척 의지를 확인하고 감
동하던 차인데 때마침 본 교회 신자 중 한 분이 별세하면서 "내 재산을 이곳 교회를 짓
는 일을 위해 써주시오!" 라고 하는 유언을 했다는 것이다. 바로 이 일이 이곳 교회를 건축
하는데 큰 몫을 하게 되었고 두 분의 뜻을 받들어 교회를 세우자는 뜻있는 성도들의 관심
이 이곳 저곳 교회에서 일어났다는 것이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 것 같은가!
나는 수년 전 안식일에 이곳 교회를 방문하여 설교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젔는데 보아하
니 새로 잘 지은 교회당에는 250-300명 정도(청소년은 아래층에서 따로 예배하고)의 성
도들이 모인 대형교회가 되어있는 것이었다. 이제는 본 교회 만큼이나 성장한 교회가 되
어있었다.
그런데 역시 그 두 분은 이 교회에 여전히 건재해 계셨다. 그동안 한 분은 남편과 온 자녀
를 교회 안으로 인도하여 신실하고도 행복한 재림교인 가정 자녀손들이 되어 있었고 그
의 아들은 안수 목사였다.
그리고 또 한 분 역시 그 남편이 이 교회의 장로가 되어 있었으며 모든 자녀손이 우리 재
림교인이 되어 있었으며 아들이 안수 목사와 장로가 되어 있었으며 그 사위는 삼육대학
총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나는 나의 목회 경험에서 꿈에도 잊을 길 없는 두 평신도 여집사님들을 보았다. 이 일은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의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믿음과 신념의 저력, 인내와
그 용기를 지금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 오랜 동안, 어떤 보장이나 기약도 없는 데도...그리고 어느 누구를 원망하는 말 한 마
디 없이 온유한 마음으로 줄 곧 이 길이 내 길이라는 신념찬 마음으로 서로 묶어진 두 분
의 선교전략의 생애, 난 너무나 감동된 바가 크다.
난 예수 믿고 예수 전하다가 내가 이렇듯 감명 깊은 복을 많이 보고 사는 사람이 되었다.
우리 두 내외는 지금도 이들 두 분을 생각하면 가끔 눈시울이 뜨거워지곤 한다. 예배당에
두 분만 덩그렁 앉아있던 모습하며 어쩌면 정겹고 안쓰러웠던 생각이 상념적으로 솓구
치곤 한다.
주여, 오늘도 그들에게 한 없는 신령한 은혜를 강물처럼 쏟아 주시옵소서!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 12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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