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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나님은 충성스러운 바울을 목베임 당해 죽게 놔두었을까요? 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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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영근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2010.05.17 06:12 조회수 5,0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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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깊이 연구하는 이들도 이점에 대한 생각이 불투명하고  미심적은 생각이 들 때가 있습

니다. 왜 하나님은 그를 지키시지 않았을까요?

"왜 하나님은 그렇게도 충성스럽고 아직도 한창 이방전도를 많이 해야 할 사도 바울을 기적적

으로든지 어떻게 해서든지 살게 하지 않으시고 그렇게도 무모하고도 처참한 죽음을 당하도록

못 본 채 하셨을까? 의아해집니다. 언젠가는 그를 택한 나의 그릇이라고 해놓고서는 정작 억울

한 죽음 직전에서는 못 본 채 하셨을까?  차마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라면 말입니다. 생각할수록

의아스럽거든요?" 라는 질문입니다.

이런 질문은 정말 타당성이 있는 질문입니다. 이런 의문을 해결하지 않으면 신앙 마음에 검은

구름이 끼어있는 느낌을 항상이라도 가지시게 될 것입니다. 염려하지 마시지요. 청명한 날을

맞아야 하겠지요.

 

 

 

사실 이런 의아한 질문은 먼저 침례 요한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듯 합니다. 침례 요한이 옥에 있

으면서 자기 제자를 예수님께 보내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

리이까"(마 11:3) 라고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예수가 진정 구세주 라면 나를 옥에서 구원해 내지 아니하고 무엇하고 계실까 하는 의아함이

서려있는듯한  질문 같이 들립니다. 다시 말하면 나를 위해 옥에서 풀려나도록 기적을 왜 베푸

시지 않고요? 하는 마음 가짐을 가졌지 않을까 하는 해석이 무리가 아닐런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결국 침례 요한을 구원하지 아니했습니다. 그는 목베임을 당해 죽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서도 왜 예수님은 침례 요한을 구원하지 아니했을까? 하는 의문을 낳습니다. 그렇지 않

습니까?

 

이 문제의 해답을 위한 기본적인 이해를 위해 이런 이야기부터 시작해 보십시다.

아담 이전에는 사는 것만 존재했습니다. 아담 후부터서는 사는 것과 죽는 것이 존재했습니다.

사는 것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요 죽는 것은 죄, 혹은 마귀의 일입니다.

이것은 엄연하게 극과 극으로 대립하거나 대치합니다.(고 후 6:14-16 참조) 언젠가 "사망아 너

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 전 15:55) 라고 말할 때까

지 말입니다.

사망의 넘실거리는 파도는 삶을 삼키려고 합니다. 삶은 극단에서 죽음으로 진리의 증거를 지

키는 보루가 되는 세상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를 구속하시려는 극단이라는 죽음의 해

결이었지만 그의 회복 역사에 참여하는 자들도 그 복음을 지키기 위해 그 같은 죽음을 지지해

야 하는 세상입니다. 이 죽음에는 영생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이런 때에 그리스도를 위한 죽

음은 실패가 아니라 승리이며 악의 요새의 실패를 선언하는 극단적인 행위입니다.

그런데 지금 질문하는 문제는 왜 하나님은 기적이라도 베푸시지 않고 아까운 생명을 죽게 놔

두는 것이냐 하는 것이지요. 그런고로 위의 해석만으로는 그 이해가 해결이 아니된 셈입니다.

 

 

 

우리는 이. 지. 화잇의 말씀을 음미해 가면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1) 순교는 삶의 극단에서 진리의 증거를 지키는 극단의 보루가 되는 행위입니다.

 

2) 순교는 "그들의 신앙을 그들의 피로 인치는 "행위요. "그들의 선포한 진리를 확증"하는 행

위입니다. 이 행위는 부득불 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사는 일에 요구되었다는 것을 하나님은 아

시며 용납하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3) 순교는 "그릇 살해한 자들에 대한 그의 용서의 정신과 최후까지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흔들

리지 않는 신앙이 생명에 이르는 향기가 됨을 증거하는 " 행위입니다.

 

4) 순교는 "나팔소리처럼 그(들)의 음성은 그후 각 시대를 통하여 울려퍼져 그의 용기로 그리

스도를 증거하는 무수한 사람들을 격려하는 " 행위입니다. "신앙을 위하여 그들의 생명을 버린

이들은 저희가 신뢰한 그분께서 가장 멀리 있는 사람들까지 구원하실 수 있다는 것을 선언하

는" 행위입니다. 순교는 영혼을 수확하는 행위입니다.

 

5) 순교는 구속의 경륜을 성취하기 위한 하나님의 청사진에 나타난 허락된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청사진에서는 "순교자의 수가 차기까지"(계 6:9-11),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

을 인하여 목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이 차후 1000년 동안 심판에 있어서 주역이 되는 하나님

의 청사진이 나타나 있습니다.(계 20"4절 참조)

 

6) 순교를 순교자들은 순교학을 달통이나 한듯 순교를 하나님께 원망하지 아니한 행위입니다.

순교는 복음이 죽음의 파도를 뛰어넘는 행위입니다. 핍박과 죽음이 하나님의 진리를 뛰이넘고

파괴할 수 없다는 교두보 역활의 명백한 행위의 선포입니다.

이런 사도 바울은 순교를 기정사실화했습니다. 베드로는 자원하여 형리에게 꺼꾸로 십자가 위

에서 죽을 것을 요청했습니다. 11제자의 순교도, 이사야도, 예레미야도, 이후 많은 세대의 순교

자들도, 다 순교를 인해 하나님을 원망하는 일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돌렸습니다.

순교자들은 "믿으로 증거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히 11:36-39 참조

)라고 썼습니다.

 

7) 순교는 순교자의 그리스도의 가납(천국까지)하실 정신으로 믿고 순교하는 행위 였습니다.

사도 바울의 순교를 묘사한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구속함을 받고 그

분의 피로 죄씻음을 받아 그분의 의를 옷입은 바울은 그의 영혼이 구속주의 보시기에 귀중하

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를 스스로 가지고 있었다. 그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

취었으며 죽음을 정복하신 그분께서 당신의 임무에 위탁된 그것을 지킬 수 있는 것을 그는 알

았다." 는 것입니다. 참으로 소중한 말씀입니다.

 

 

 

그러고 보면 순교는 순교자가 믿음과 진리의 증거를 위해 자원하는 행위요. 하나님의 구속사

역에 든 청사진과 같은 행위의 실현이요. 마귀가 노도처럼 보루를 뚫지 못하고 저지되거나 대

파되는 행위입니다. 피는 댓가로 피를 지불하는 행위이지만 살리는 것이냐 죽이는 것이냐의

문제는 확연히 다르며 당분간의 세계사에서 계속될 조짐인 것입니다. 순교로 죽어도 다시 산

다는 확실한 약속과 그 신념은 순교의 승리길을 의미합니다.

"순교자의 피는 뿌려지는 씨앗과 같다."고 했습니다. 핍박과 박해의 시대에는 피가 곧 복음이

요 증거입니다. 이것을 그리스도인이 바라지는 않지만 몹쓸 세상의 터널을 통과하는 동안 있

을 현상이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만의 문제가 아니지요.

 

의를 위하여 항상 자신을 부정할 때 이것은 순교자의 정신입니다. 죽지는 않았어도 죽는 것

을 경험하는 마음과 행위가 순교자의 정신과 행위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긍정하고 부추기다

가 순교정신을 잃게 되지나 않을까 걱정해야지요.

 

안녕히 계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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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육교사이름으로 검색 작성일

사도 바울은 참수로 순교했는지? 돌에 맞아 순교했는지? 어느 것이 옳은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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