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누구나 실개천이 아닌 큰 강 이해가 21세기를 사는 상식이 되고 있다!
페이지 정보
본문
개명천지에 사는 사람이란 누구나 행여 오해하거나 망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람은 실개천 아닌 큰 강입니다. 누구나 그렇습니다. 비록 실개천 같이 보이지만 그 마음 속에는 실개천 아닌 큰
강물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오해하거나 망각할 때 우리는 우를 범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막무간에 마치 사람 속에 왕이 좌정해 있는듯이 서로간에 고개를 숙이는 편이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두 주일을 계획하고 한 유명대학 교수가 거지가 되었습니다.
험상궂은 모습으로 돈을 얻고 먹을 것을 구걸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같은 무리와 교제를 나누면서 아무데서나
닥치는 대로 웅거하면서 잠을 자고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회에서도 신분과 경력과 높낮임이 엄격하여 철저한 권위사회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 사는 사람들은 사람을 알아주지 않지만 사람이 개는 한결같이 인정해준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물론 이것은 어렴풋이나마 통념처럼, 그리고 일반적으로 이해되는 개념이기도 했지요.
사람은 사람이 크면 존귀하고 환영했지만 사람이 작으면 멸시하고 천대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사람 사는 현금의 사회 속엔 누구나 스스로 속 사람으로 빚어진 변호사, 판사, 목사, 장로, 교수, 행정자,
해결사, CEO 등등이 잘 보이지 않게 수두룩하게 있습니다. 서령 그렇지 않다고 할지라도 그건 실개천이 아니라 스
스로 큰 흔적을 품은 대하들입니다. 대하이면 대하라는 긍지를 가슴에 품고 있는 것입니다.
혹시 현재 조각을 잘못해 실개천 같게 보일지라도 이미 그 설계한 바는 마음에 고이 간직하고 있으며 사람 사는 실
효성이 있는 긍지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적어도 한 물 사회 속에서 서로간 퐁당 퐁당하면서 함께 사는 삶이란 견해
입니다.
적어도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것을 알아차릴 수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바로 이것을 인정해주지 못해서 부부 싸움과 이혼이 일고 사회에서는 각박하고도 크나큰 물의가 일게 되지요.
한 마디면 해결된다는 것들이 대부분 이런 맥락일 수 있죠. 그랬던가! 혹은 훌륭하구만! 하면 매듭이 풀리는 것을...
아담은 죄를 짖고 하늘에서 쫓겨나는 판국에라도 아네를 가리켜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됨이라"(창 3:20)는 미
래 지향적인 믿음과 포부를 나타낸 것을 기억해야 하지요. 죄지은 아담으로 보면 아니되지요. 그 아담 속에 자리
한 다른 아담의 모습을 반드시 발견해 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늘에 닿도록 개명된 오늘날 사회의 사람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성지순례를 하는 사람들이 실개천 같은 요단강을 보고서 실망을 합니다. 이렇게 작은 실개천일까? 하고 말입니다.
요단강은 갈릴리 호수에서 탄생하여 자원이 많은 사해에서 죽기까지 사람의 일대기처럼 굵고 혹은 가늘게 흐르죠.
그러나 사람을 실망시킬 수 없는 갈릴리 호수와 사해의 크고 넓은 것들을 보고나면 요단강의 업적은 무척 크다는
것을 잘 알게 되어집니다.
그리고 유구한 역사 동안 요단강 언저리에서 일어난 일, 이를테면 예수님이 침례를 받으셨고 이스라엘 백성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전진하는 교두보가 되었던 일 등, 수많은 애환의 역사 페이지를 더듬어 보노라면 요단강
은 여전히 실개천 아닌 마음의 대하로 훌륭하게 남는 것이 진실입니다.
한 사람이 나서 실개천 같이 잠시 살다가 죽었을지라도 어느 가정의 애환의 역사로는 한 세대 동안 중하고 손색이 없
이 기억되는 일이 됩니다. 그래서 묘비도 세워지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일단 이 세상에 탄생한 사람이면 그 근원으로부터 존재와 더불어 그 인권을 확인해주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주린자, 목마른 자, 나그네 된 자, 병든 자들을 가리켜 그가 바로 "나"라고 하시는 대에 놀라게 됩니
다.(마 25:35-40 참조) 이런 소리, 저런 소리 그만 하고 대하가 따로 있는 거 아니라는 사람의 존재와 인권 말입니다.
이래서 사람은 바로 예수 라는 사상이 예수사상이십니다. 더 이상의 지고의 말이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람을 사람으로 보는 영적인 평가(?)와 우대정신이 없이는 아직 21세기의 미숙아로 남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대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할 때 한 여선생님은 이렇게 말문을 열었습니다. "여러분께서 장차 큰 일을 하실 터인데 그
때 저와 같은 사람을 잘 지도하여 주셔야 하겠습니다!" 그런 다음 정중하지만 짧은 몸동작으로 고개를 숙으리는 모
습을 보였습니다. 그리고는 잠시 말을 중단하셨습니다. 학생들은 말문이 막히고 한동안 정적을 이루었습니다.
된 선생, 된 사람 아니겠습니까! 작은 사람들에게 사뭇 큰 사람이 말입니다.
이런 인격을 가리켜 고매하고 고결한 인품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상 성경은 이런 일반화 된 내용설명을 잘 나타내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일개인을 위해서도 죽어주시겠다고 하시는 분이고 보면 그 사랑이 너무 지고해서 감격스러울 따름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아직도 거지 교수의 체험사회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자라면 세상 모든 부조리를 이길 수 있는 비결이 근원적으로 이상의 감격스러움에 있지 않는
가 싶습니다.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되었느니라"(고 전 8:3) 아멘.
- 이전글하나님의 인내는 사람처럼 한계가 있는 것일까? 10.02.01
- 다음글횡재할 수 있는 영혼의 삶의 비결이 여기 있다! 10.01.31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