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재할 수 있는 영혼의 삶의 비결이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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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하시지요. 모쪼록 한 주일, 복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마 5:6).
너무나 좋은 허락의 말씀이십니다.
분명히 알기에 님께서는 더 나은 신앙을 바라고 소원하리라 믿습니다.
아마도 님께서는 지금 목말라 갈구하는 신앙 말입니다.
석가모니가 인생의 충족을 찾아 이곳 저곳으로 목말라 해매듯이 말입니다.
정말 하늘의 신앙은 목이 촉촉해지고 배가 불러야 행복하게 잘 살 것만 같습니다.
그런데 님께서는 바로 그 진수를 찾았습니다. 예수! 예수 말입니다!
그런대도 무언가 하나가 있죠.
예수님과 보다 친밀하게 지낼 수는 없을까 하는 마음입니다.
어쩜 지금 보다는 좀 더 뜨겁고 좀 더 화끈하게 말입니다. 그리고 지속적이게 말입니다.
그런데 항상 아쉬운 마음이 있으시죠?
그동안 어떻게 하면 주님과 친숙해질 수 있다고 생각해 보셨습니까?
믿음이란 다른 것과 다른 데가 있어요.
구하는 자에게 주십니다.
다행히 소원하고 또 갈구하면 주시고 이루어지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런데 거두절미하고 그런 소원을 성취할 수 있는 방법론이 있다는 것입니다.
명약이죠. 분명히 있습니다.
얼마 전에 제가 읽은 글을 여기서 인용하고 싶네요.
할머니가 몸이 아프지만 카드가 없어 병원에를 못간다는 소리를 5살 난 손자 녀석이 들은 모양입니다.
때마침 한 사람이 집에 왔을 때 손자 녀석이 그에게 닥아서면서 하는 말, 이렇게 물었습니다.
"혹시 다 써버린 카드 있으세요?"
"그래서 그 카드로 뭐할 거야?'
"은행에 가서 돈을 찾아서 할머니랑 병원에 갈 거예요."
손자 녀석은 다 쓴 전화 카드를 그녀에게서 받아 호주머니에 넣고는 아주 기뻐했습니다.
이제 얼마후 잠시 단잠을 자고 일어난 할머니는 자기 머리 위에 물수건이 덮여있고 그 옆에 손자녀석이
곤히 잠이 들어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손자 녀석의 그 갸륵한 정성과 행위에도 불구하고 꼭 할머니의 병이 치료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그러나 할머니가 얼마나 기뻤을까요? 기특하죠!
혹시 너무 즐거워 할머니 병이 다 나아버린 거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제 손자라 해도 그럴 것만 같내요.
할머니는 어린 것이 어떻게 내 마음 가려움증 소원을 쪽집개처럼 잘 찝어내 알아주느냐 하는 맘에 필시
그 삶이 무척 소망스럽고 행복해졌을 것 같네요.
그런데 이런 말도 있지요. 자식이 7이라도 알아주는 자식 따로 있다나요. 그래서 넌 엄마 맘을 어찌 그리
도 잘 해아려 주는 거냐! 하면서 눈물을 흘린다지 뭡니까!
님이여, 놀라지 마십시요!
예수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꼭 그러한 거 아니예요.
이건 빼 닮은 꼴 성경 정황 이야기 아니예요.
예수님도 우리가 그 마음을 알아주면 반갑고 기뻐하시는 모양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계속 그 마음을 주목하시면서 흐믓해 하실 거거든요.
다윗의 시편을 보면 구구절절히 다윗이 그랬고 그래서 사랑을 받았잖습니까!
하나님은 다윗의 후손까지도 보장하시면서 언약을 굳게 또 굳게 세우고 지키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하면 우리가 그렇게 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물론 예수님과 그렇게 친밀하게 지낼 수 있지요. 있다 마다요. 우리를 위해 죽어주셨는데....
사실상 할머니와 손자 녀석의 이 이야기는 성경적으로 입증 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예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 중 하나는 우리에게 주님을 잘 믿는 흔적을 보여주시기 위해 오셨
습니다.
그래서 거기 그 흔적을 잘 주시해 보면 그 흔적 포인트가 아주 또렸하게 나타나 보이게 되지요.
예수님이 10 문동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그중 단 1명만 와서 무릎을 꿇고 사례했지요.
기특하죠. 생각이 참 기특합니다. 사마리아인이었죠.
둘이 동무 삼아 온 것도 아니지요. 아마도 고개길 어려운 길을 넘어 예수님께 왔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말씀했을 것 같은가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눅 17:17) 그랬습니다.
영어로 give and take라는 말이 있지요. 주고 받는 다는 말입니다. 주어야 오는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사람들에게 주시기는 했지만 무엇을 받는 것은 없었습니다.
가진 것 없는 불쌍한 사람들이잖아요. 그래서 무엇을 주님께 드릴 것 있겠어요.
오늘날 바로 이점에서 우리가 주님을 오해합니다.
사실 주님께로부터 받기만 하고 정작 주님께 줄줄은 잘 모릅니다.
많이 드린다고요. 그렇기도 할뿐 더러 그렇다고 치십시다.
그런데 주님도 우리가 무엇을 주기를 바라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받기를 바라는 바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너무 중요해요. 기가 막히게 중요해요.
무엇을요. 우리가 가진 마음입니다. 주님을 해아려 아는 마음입니다.
주님은 가나안 여인을 고치셨을 때도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 대로 되리라"(마 16:28) 하시면서 그의
믿음을 보셨고, 12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딸을 대리고 와서 그를 만지는 것을 느낀 주님은 ""딸아 안신하
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 9:23) 하시면서 그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성경에 보면, 특히 4복음서에 보면 "믿음을 보시고" 어떠 어떠하셨다는 일률적인 이야기가 너무나 많은
데서 예수님의 친밀한 사상의 핵심 포인트를 알아낼 수 있습니다.
그렇지요. 그래서 주님이 알아주기를바라시는 마음이 있는 거 우리가 절실하게 알게 된다면 우리는 5
살 난 할머니의 손자가 되는 닮은꼴 신앙의 길이 되는 겁니다.
이거 너무 중요하거든요!
당시에 보여준 그 믿음이란 아, 이 이가 과연 우리를 살려줄 구세주이시다, 이렇게 아는 이런 믿음 말입
니다. 이게 주님 중심사상입니다! 소원이십니다! 오늘날도요!
님이여, 이것은 우리네 신앙이 어떠하여야 할 것, 어떻게 해야 주님과 친숙하게 될 것을 잘 말해 주고 있는
거 아닙니까.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세상에 오셨거든요. 이렇게 되는 대는 사람이 훌륭하게 된다든지, 성경을 많이 안다든
지, 많은 치부와 공로를 보인다든지 하는 그런 것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문제, 혹은 선행되는 문제 라는 것
을 새삼스럽게 잘 알고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해아려 알아주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내 마음이 되는 마음입니다.
내가 너희 안에 네가 내 안에 라는 뜻이 그것인 것을 이제 알만 합니다.
이. 지. 화잇은 마지막 유언으로 나는 "주님을 안다" 라고 했지요.
예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셨겠는지요.
예수님은 당신을 알아주면 그것으로 만족하십니다.
그런데 이 마음은 자신을 위한 마음이기 보다는 우리의 영원한 삶의 영혼을 위해서입니다.
이것을 고려하면 우리는 달리 갈급해야만 할 분야가 태평양 같이 넓은가 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예수님께 아기자기할 만큼 친밀하게 되는 일을 위해 새로 거듭날 필요가 있는지도 모릅
니다. 이것은 주님에게도 우리에게도 심히 기쁜 일일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단지 중보하시고 계시는 예수님 하고 단조롭게 생각하고 기억하는 것 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습
니다.
자요. 이제 성경에서 예수님의 마음을 알만 하죠. 에수님과 친밀하게 지낼 수 있는 방법론을 알만 하죠.
확실히 예수님은 우리에게서 당신을 향한 믿음을 보시고 보람을 갖기를 바라십니다.
사실 우리가 주님께 무엇을 드리는 행위가 아닙니다.
다만 주님은 주님이 우리가 잘 되기를 바라시는 속성에서 나오는 주님의 애정어린 생각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고 친숙하게 지낼 수 있는 방법은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잘 알아보는 믿음
을 지니면 할머니를 기쁘게 한 한 손자처럼 될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나를 위해 죽어주신 예수님의 그 지극하신 은혜를 항상 마음 깊이 생각하면서 무슨 일에나 감사하고
주님을 일평생 다하여 즐겨 섬기고 살기를 바란다면 기뻐하시는 주님은 그것을 "믿음"으로 보실 것입
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은 주님과 친밀한 관계가 될 것이 분명합니다.
지금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매사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마음이 되도록 다시 한 번 정리해 보십시다!
날마다 시간 나는 때 마다 주님의 마음을 해아려 보십시다!
이런 믿음은 단순하고 순결한 믿음인 것이 특징입니다.
또한 세속화를 막아주는 방패 같은 역활을 해주는 마음(믿음)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면 이전에 없었던 친밀하고도 실감나는 주님과의 교제의 생애를
더 풍요롭게 누리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이 지상에 살지만 이런 예수님과의 영적인 교감심정이 차고 넘쳐났으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아, 기쁘구나! 네 믿음이 크도다! 하시는 삶, 주저하지 마시지요.
님이여, 이제 우리 다 같이 줄곧 훗날을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사실 수 있기를 염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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