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쓰기 쉬운 노란 렌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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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이 되고 하나님의 교회에 속한다는 것 이상 더 좋을 것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 이상 이 세상에서 더 좋을 것이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고귀한 특권을 쉽게 노치는 경향이 더러 있어서 아쉽습니다.
아마도 미쳐 꽃이 피고 열매를 맺기 전에 그 못된 병충해가 침범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영적으로 잘 자라나고 성숙해가는 그리스도인 정신 세계에 때때로 바라지 않는 불청객 렌즈를 끼워주는 위기가
불어닥칠 수 있습니다. 한 번 이 노란 렌즈를 끼웠다 하면 좀처럼 이것을 벗어던지기가 쉽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
다.
이것이 무엇일까요?
교회 안에서 개인적이거나 사적으로든지, 교회의 지도자를 향한 관계에서의 일이든지 간에 의외로 섭섭하다거
나 부당하다고 생각되거나 불만스럽다는 생각을 가지거나 상처가 생겨나면 그것을 당장 훨훨 털어버리거나 벗
어던져버리지 못하고 마음에 간직해두고 보는 날이면 어느새 이 불청객 렌즈를 쓰고서 모든 것을 노랗게 보게
되어집니다.
알고 보면 다른 어떤 변화는 그리 없는데 자신의 변화에 따른 자신의 마음의 노란 렌즈를 쓰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영혼을 해치는 심각하고도 무서운 일입니다.
어느 샌가 그 일 뿐만 아니라 교회 모두, 혹은 모든 일이 그렇게 노랗게 보여지는 것입니다. 사실은 그렇지 아니
한데 모두가 하는 것이 정녕 그러한 연계선상에서 스스로 긍정할 만치 노랗게 보여지는 것입니다. 좋았던 것들
은 어디론가 다 사라져버려 보이지 않을뿐 더러 다른 것들은 쉽게 두드러지게 나타나 노랗게 보이는 것입니다.
사실 자신의 교회만 그렇게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잘 보이지 않는 시각의 모든 교회까지도 영상으로 렇게 보이
고 심지어는 교회의 기관까지라도 때때로 그렇게만 노랗게 보이는 것입니다.
이런 때이면 어느새 자신은 자신에게 있어서 듬직한 의의 기준이 되어버립니다. 그런 눈으로 보아하니 모든 것
이 한심할 노릇으로 보이게 되어집니다. 이리하여 자칫 중환이 되기도 합니다. 때론 약주고 병준다는 식으로 조
언 같은 것이 더 큰 병을 유발케 합니다. 그러나 책임은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세상이 모두 노랗게 보이는 정황에서 반대로 베드로가 회개하는 마음으로 겟세마네로 갔던 발걸음이란
대단한 것이며 위대하기까지 합니다. 전격적인 기복을 단숨에 극복한다는 것은 위대한 일에 속합니다. 가멜산
상의 엘리야의 외침도 그래서 유명한 영적인 이야기가 되어집니다.
오늘날도 사람이란 속을 비워 깨끗하게 씻어내기란 그리 쉽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시므이는 다윗이 맨발로
압살놈에게 쫏겨 감람산을 넘어 도망칠 때 아마도 이제 다윗왕은 끝장이 났다 라고 생각되었던 모양입니다. 그
래서 어찌 되었는지 왕을 산 언저리로 담대하게 따라가면서 조롱하는 말을 많이 했습니다.
그는 당장 화살이나 칼을 받으면 죽을 것이나 그가 그렇게 한 것은 다윗 왕에게는 모든 것이 절망적으로 노랗게
보이고 왕이 그렇게도 무기력하게 보였기 때문에 댐대하게 행할 수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 왕은 복귀하였습니다. 시므이는 죽은 생명 같았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사는 길은 다윗
왕께 나아가 보는 길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드디어 삶을 얻게 됩니다.(삼하 16장, 19장 참조) 그런데 사람이 이렇
게 담대하기란 그리 쉽지가 않는 모양입니다.
예수님이 인성을 쓰셨을 때 마귀는 착각했습니다. 산상으로 가서 예수를 정복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라는 노
란 렌즈를 썼기 때문입니다. 하늘조정에서도 그 렌즈를 썼기 때문에 그 지경이 되었으면서도 그 렌즈를 벗지 못
했습니다.
우주의 기반이 진리이며 미쳐 창조주가 하나님인 것을 희미하게 볼 수 없었던 것은 노란 렌스를 썼기 때문에
승산을 겨루는 우를 범했습니다.
노란 렌즈는 벗어져야만 합니다.
"자기로써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써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고 후 10:12 하단) 하는 말씀이 이런 노
란 렌즈 시각의 생각인가 합니다.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분량으로 나눠 주신 그 분량의 한계를 따라"(상동
13) 생각해야 하는 것인데 말입니다.
"만일 사람이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줄을 믿을찐대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 같이 ... 그러한 줄을 자
기 속으로 다시 생각할 것"(상동 7)이어야 하는대 말입니다. "오직 너의 믿음이 더할수록 우리의 한계를 따라
너희 가운데서 더욱 위대하여지기를 바라"(상동 15) 는대 말입니다.
우리는 평화스러운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가까이 선악의 대쟁투가 항상 도사려 있습니다. "우리의 싸우는 병
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상동 4)니어야 하지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상동 4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노란 렌즈를 벗는 일에는 우선 선행되는 두 가지를 말할 수 있겠지요.
전적으로 셩령께 자신(마음)을 내어 맡기면서 애소하며 끈질기게 기도하는 마음으로 변화와 승리를 체험하는
일입니다. 지금 가진 대로의 육신의 도구가 아니라 성령의 도구가 되어야 하니깐요.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
우시나니"(롬 8:26), "복음으로 하면 저희가...사랑을 입은 자라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
니라"(롬 11:29) 하셨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성령"의 역사하심 속에서 오직 "사랑"의 렌즈를 쓰고 두루 살펴보면 모든 것이 영광으로 향하여 가
는 것으로 보이고 그것이 자신에게 기쁨과 즐거움이 될 것이 분명해집니다.
노란 렌즈, 그것을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골 2:20-21) 하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때에 자신의 삶의 미씽 자국을 뒤돌아 보면서 행여 남을 향한 봉사의 눈금이 얼마나 하는 것인
지를 가늠해 보는 것이 퍽 유익할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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