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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 사모의 개인적 부르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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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영근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2010.03.04 04:42 조회수 7,4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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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눈오고 춥고 구름이 항상 끼었다가 오늘 아침은 해가 밝게 빛나고 있습니다. 따스하고 좋습니다.

이런 때 살맛 난다고 하지요. 저 뿐만 아니라 어떤 동기로든지 살맛 나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사모의 개인적 부르심에 대하여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콜링'(calling)아란 '하나님이 쓰시

겠다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셨을 때 그의 쓰임에 즐겨 응하겠다고 하는 것은 너무

나 소중하지요. 그것까지 하나님이 해주시는 것이기도 하지요.

자요. 사모는 개인적으로 부르심을 받는가? 부르심을 받아야 사모가 되는 것인가? 아니면 부르심

을 받지 아니해도 사모가 되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괜히 어려운 문제 같지요. 긁어서 부스름

만든다는 말이 있는데 말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첫째, 부르심을 받지 아니하고 사모가 될 수 있지만 사모로써 일하는 동안 사모로 부르심을 받는

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를 지적합니다. 목회자는 일단 부르심에 의해서 그 길을 결심했겠지만

(혹시는 그렇하지 않을 수도 있음) 그의 아내가 되는 사람은 인간적인 사랑의 인연이 앞서서 부부

로 결정 될 때 미처 부르심의 의미까지는 생각지 못하면서 결혼이 성립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목회를 하는 동안 대부분 주님과의 진정한 교제를 통해 주님의 부르심을 받는다는 것입니

다. 물론 처음부터 부르심을 받는 분들이 많음은 두 말 할 나위가 없습니다. 이 두 가지를 합해서

직접적인 부르심이라고 합니다.

 

 

둘째, 처음에 목회자의 아내로 부르심을 밪지는 못했지만 목회를 하면서 부르심을 받는다는 이야

기 자체의 전체, 곧 시작 부터 지금까지를 하나님의 부르심과 인도로 보는 해석이 있습니다. 하나

님은 사람을 아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사람을 취하여 그 길목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녀

는 다만 하나님의 좋은 인도를 갈구해 왔지만 사모의 길 같은 일을 미쳐 생각해 보지 못했을지라도

기도의 응답으로 그 길을 가게 주님께서 하실 수 있는 것이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이 부르심을 가리

켜 간접적인 부르심, 혹은 섭리론적인 부르심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런 해석은 경험적인 것이 증명하는 사실이며 이런 해석은 섭리론적인 방향에서 지

지를 받는 해석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부르심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는 하나님의 부

르심을 받고 사모가 되었다는 말에 하등의 이의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이 두 가지 혹은 세 가지 해석은 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사모가 되는 것이다 라

는 해석이 옳은 것이 됩니다. 그러나 중요한 이야기는 사모로 살아가면서 그 부르심을 더욱 굳게 해

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모로 살아가면서 그 부르심을 더욱 굳게 해야 한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목회자가 될 때,

사모가 될 때 두 가지 소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는 소명이 있고 내가 나를 부르는 소

명(?)이 있습니다. 이 두 형태는 다 말하기를 주님의 사업에 전적으로 뛰어든다 라고 말합니다. 그리

고 그렇게 보입니다. 그러나 심리의 흐름에는 두 가지 형태가  엄연히 다른 데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

이 문제입니다.

첫째 직업적인 부르심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선택이 동기가 되어 부르심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입

니다. 사실 위원회의 부르심은 하나님의 부르심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여기 제목에

나타나듯이 개인적인 부르심이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목사를 안정적인 직업으로 본다든지, 학문하는

소질에 평생 목사가 좋다 라는 생각이든지, 목사직은 사회적으로도 대우를 받고 목사 명함이 좋을 것

이라든지, 등등의 직업적인 관념으로 목사직을 자신이 선택하는 모양을 마치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섰어놓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대충이면 되지 무얼 그렇게 꼼꼼이 생각하는가 할지도 모릅니

다. 그러나 생각해야 할 것은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위적인 나 자신의 부르심의 해석으로 온당한 것은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 저능율적이거나 잘못될 가능성도 있는 것입니

다.

 

 

그러나 이것은 이미 설명되었지만 신앙적인 체험을 통해서 진짜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바뀌기를 바

래야 할 것입니다. 그러하지 아니하면 이사다니는 것이 힘들다든지, 생활비가 적다든지, 자녀교육을

위한 뒷바라지를 못하여 유명한 사람을 못만들겠다든지, 교회의 일이 이렇게 어려울지 몰랐다든지,

내 소질을 이제 알게 되었다든지, 등등 문제에 부딛혀서 쟁기는 손에 쥐고 있으나 자주 뒤를 돌아보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의학을 할 수는 없는 건지, 경영학을 할 수 없는 것인지, 등등 망설이는 목회 혹은

사모의 일을 할 수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사람은 자유입니다. 그러나 그러는 동안 하나님의 사업은 손해를 보는 것입니다. 헌신하지 못한 분열

적인 충성의 마음은  나태하거나 실효성이 감퇴하거나 시험과 시련을  당할 때 그 자리에 서지 못할 확

율이 있음도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사모는 살아가면서 그 부르심의 뜻을 굳게 해야 한

다.'는 것입니다. 맞습니까? 예, 맞습니다. 맞고 말고요. 목회의 소명은 평생의 것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세상의 직업의식과 다른 데가 있는 요인입니다.

 

 

지금 길어지고 있습니다만 조금 더 계속하여 말씀 드리겠습니다.

어떤 이들은 목회자 혹은 사모로 부르심을 받을 때 '부르심'이라는 것이 있고 일단 목회에 임하면 '사명'

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보편적으로 이해하고 해석을 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 쪽의 해석은 유사하나 다

릅니다. 부르심을 받을 때 '부르심'이 있었으나 그 부르심은 사명과는 달리 그 마음에  '지속적인 부르심'

으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불을 집하는 불씨가 '부르심(소명)'이지만 그 다음은 사명으로 불이 활활 타면 그만인 것이

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는 그 불씨가 활활 타다가 물을 끼언는다든지, 땅이 취져서 불이 타

지 못하고 꺼저가려고 하면 작은 불씨의 역활은 또 지속적이 되게 한다는 입장에서 소명의 계속성을

강조하는 이야기를 합니다.

사실 어느 것으로 해석 되든지 중요한 이야기는 계속되고 지속되게 하는 일은 소명과 사명의 일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사모의 생애를 지배하기를 바라는 바는 '부르심에 관한 체험과 기억'입니다. 이것

이 소중합니다. 저는 오늘의 이야기가 이론이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신앙학이 되기를 간절히 바래지

는 것입니다. 사모여, 그래서 행복하십시요!

 

 

우리가 소중하게 다루는 소명에 관한 말씀이 성경에 있습니다.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사

6;8) 하신 말씀입니다. '누구를 보낼꼬'하시는 하나님 말씀에 대한 응답이지요. 그의 응답을 주시해 보십시

요. 내가 여기있다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사정이 있는데 잠시 생각해 보고요 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즉

시 "를 보내소서"  라고 합니다. 다른 이를 보내거나 다른 지원을 동원하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바로 '나

를 보내소서'하는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부르심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더욱 중요한 내용이 있습니다. 무엇을 위해, 어디로, 그리고 보상은 어느만치냐고 하는 보상이 고려되지

않는 소명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이것이 필요합니다. 세상은 이권입니다. '소명'이

그리도 강조되는 것은 이런 것을 초월하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성경의 역사나 기독교 역사

를 일구어 낸 이들은 다 이런 소명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것이 가능합니까? 하나님의 부르심이기 때문입니다. 죽어도 살아도 하나님의 부르심이

며 하나님이 책임져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부르심은 마음과 더불어 몸을 하나님과 사업을 위해 그 제단

에 던져버리는 행위입니다. 개인의 현재와 미래까지도 다 던져버리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을 위해.....

우리 재림교회 안에 클리브랜드 목사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1-2세대 앞에 미국에서 목회를 했던 흑인 목

사입니다. 기별이 좋아 다른 교단이 경영하는 세계적 전도의 주 강사로 외쳐주기를 바라는 초청에 응하지

않은 분이기도 합니다. 그 대신 빌리그라함 목사가 선택되기도 했지요. 그는 우리의 독특한 기별 전파를

굽힐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목회를 시작할 때는 시련도 많았습니다. 그때만 해도 흑인에 대한 차별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목회를 처음 나왔을 당시 노천에서의 대전도회를 경영했습니다. 천막을 치고 많은 의자를 가져다 놓고

대대적인 경영을 했습니다. 그러나 집회는 예상 외로 저조했습니다. 기별은 좋았지만 강사가 흑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크리브랜드 목사님은 하루 밤 잠에서 일어날 줄을 몰랐습니다. 해가 중천에 떴지만 말입니

다. 전도의 실망감 때문이었습니다.

 

 

목회를 해야 하는 건지, 안해야 옳은 건지 모르는 시험에서 헤매이고 있었습니다. 이 무렵 누군가 이불을

획 자치면서 예리한 눈으로 잠에서 깬 자기를 주시하는 모습 같았습니다. 바로 자기 반려자인 아내였습니

다. 아내가 얼굴을 자기 얼굴에 가까이 대더니 "요나야~~!"하는 것이었습니다. 딱 한 마디였습니다. 그 다

음 그녀는 콧노래를 부르면서 이것 저것 자기 일을 부지런히 했습니다. 크리브랜도 목사는 생각해 보았습

니다. 내가 요나라고...! 아니야,  난, 요나가 될 수 없어 ...! 그는 자리에서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전도에 열

심했는데 다른 교회에서까지 세계적인 부흥강사로 기용하려고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분이 대총회 목회

부부장을 했던 그 크리브랜드 목사님이십니다. 훌륭한 사모의 한 마디, 정말 잘 한 것이었습니다.

 

 

하마트면 잠시의 시련에서 좌절할 뻔 했습니다. 아슬아슬합니다. 우리에겐 무슨 연고로 그런 시련의 심연

같은 것은 없는 건지! 빠지면 안됩니다. 절대로 빠지면 안됩니다. 심히 중한 것이 경성케 하는 사모의 부르

심입니다. 이젠 약하기 보다는 강하게, 오늘만을 생각하는 고뇌 보다는 미래를 보는 약속의 환희를 사모하

십시요! 목회자인 반려자를 추수려 세우십시요! 그리고 때론  따스함과 온정 섞인 사명감으로 격려하십시

요! 경애하는 사모님, 개인적인 그 부르심이 지속적이고도 계속성이 되는 것으로 주님께 드리기로 오늘 아

침 결심하시지 않으시렵니까!  예, 아멘 아멘. 사랑하는 주님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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