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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의 전도서는 허무주의자의 글 같은데 왜 영감의 글이 될까?(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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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영근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2009.12.16 05:58 조회수 6,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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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의 전도서는 거의 허무주의의 글로 보인다는 이야기는 무리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런 허무주의의 글이 과연 영감의 글일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그러나 허무주의 글 같은 내용글을 처음과 나중으로 둘러싼 내용(포장한)이 허무주의이러니 한 말들을 모두

말살하고 만다.

그러면 처음과 나중의 글이란 무엇인가?

1)시작의 글은 이러하다.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전 1:1) 이 말은 하나님과 그 언약들

의 밧줄에 자신을 매는 말이다. 따라서 12장까지 계속되는 말은 거기에 매달린 말들이다.

2) 마치는 글은 이러하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

의 본분이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전 12:13-14)

이 말은 하나님과 그 언약들의 밧줄에 모두를 매는 말이다.

배의 밧줄이 땅에 묶여있으면 어떤 풍랑에도 배는 흔들리지 아니하고 안전하다.

그런고로 이 전도서의 글은 하나의 복음이다. 그러하다면 그 허무주의로 보이는 내용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전 1:2-3)

이 말씀 외에 전도서에 나타난 수많은 말씀이 이렇듯 허무하게 보이는 말이 많다. 이런 허무사상을 어떻게 받

아들일까?

그는 자신을 가리켜 1절에서 "전도자"라고 했는데 이 말의 원뜻은 "설파자"(preacher), "선포자"(proclaimer),

"탐색 혹은 관찰자"(searcher)로 해석할 수 있다. 이중 어느 것도 가능하고 적합하다.

그런데 래이 스테드맨은 시종 "관찰자"로 해석하는 것이 솔로몬의 내용글에 비추어 적합한듯 하다.

허무는 공허한 것이다. 그런고로 허무주의는 하나의 함정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 솔로몬은 함정에 빠져있는 것일까? 아니다. 다만 허무를 누구 보다 더 많이 경험했을 뿐이다.

그러나 이 허무를 통하여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은 모든 행위의 은밀한 일을 심판"한다라고 말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이런 허무한 것에 관한 모든 말은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라고 말함으로 그런 허무한

일에 빠지지 말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찾으라는 관찰자의 말, 곧 선포의 말이 들어있는 것이다.(전 12:3 참조)

 

 

솔로몬의 "헛되다"는 기별자로써의 선포는 세상사, 곧 그것은 허무에 대한 관찰이며 복음쪽에 있는 선언이다.

스테드맨에 의하면 솔로몬이 이 말을 할 때 "솔로몬의 얼굴이 교만하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고 했다.

당시 연인들(궁중 여인들-솔로몬의 아내들)은 항상 거울 앞에 매달려있는 것을 보았다. 아름다워야 하기 때

문이다. 그래야 왕의 관심을 끌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 여인들에게는 이 일 만큼 중요한 관심사가 또 없는 것

이었다.

초대교회 당시는 거울은 희미했던 것 같다.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나"라고 했다. 그런데 그보다 1000년

전인 솔로몬 당시 에는 얼마나 밝히 볼 수 있는 거울이 있었겠는가 그래서 그토록 희미한 거울 앞에 매달려 있

는 여인들을 살펴보면서 이런 것이 다 헛되다고 친히 솔로몬이 보는 것이었다. 이리 저리 자신들은 비집어 보

지만 그것이 다 허사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한 세대는 가고 말 것이면 왕도 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관찰자 솔로몬이 알건데 헛되고 모든 것이 헛된 것이었다.

전도서는 관찰자, 당시의 신앙지성이 설파한 내용들이다. 전도서는 신앙에 기초하여 허무를 관찰하기 때문

에 스테드맨은 전도서를 "구약의 신비의 책"이라고 일컸는다.

 

 

우리는 이 영감의 책 전도서를 통해 창조와 세상의 조화를 보는 솔로몬의 신앙지성에서 배워야 한다.

세상의 조화를 창조주의 섭리로 보면 진귀한 신앙과 이치를 발견하지만 신앙이 없는 눈으로 보면 허무를 보

는 것 뿐이다.

신앙이 허무를 볼줄 알면 영원에 접목된다.

베드로 전서 1장 24-25, 고린도 후서 4장 18절을 살펴보면 전도서와 같은 허무를 담은 글을 발견하게 된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는 것은 잠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

함이니라"

솔로몬처럼 잘 하면 허무가 영원을 조명한다. 물론 영원이 허무를 조명하기 때문에 받는 빛이다.

우리는 허무와 영원함의 경계선에 있을까! 그래서 보이지 않는 영원함을 사모하고 있는 것일까!

허무가 허무되지 않으려면 영원에 속하기만 하면 된다. 그리스도이다. 신비한 구속의 과학에 속하기만 하면

된다. 그것이 말씀의 세계이기도 하다.

아마도 솔로몬은 그 세계 속에서 관찰하고 선포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솔로몬은 허무주의자가 아니다.

물론 그의 글이 허무주의의 글이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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