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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아벨 대신에 생명을 잇는 '다른 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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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아벨 제사의 향기로운 냄새를 맡았다고 해서 가인이 벌린 살인극이 일어났다.

이것은 인류역사의 초기에 일어난 하나님께 대한 충성과 소위 반역에 대한 교착상태였으

니 우리를 심히 따분하게 하고 경악스럽게 하고 당혹스럽게 한다.

오늘날의 것들이 그때 벌써 있었다는 말이 된다.

정작 아벨은 죽었고 가인은 떠나갔으니 언약의 구속자가 탄생할 대가 끈긴 것이 아닌가

하는 심증과 의구심이 아담 해와를 압도했다.

사실 언약의 약속으로 가는 대가 여기서 끈길 것 같은 이 사건은 엄청난 사건이 되었다.

어쩌면 이 사건 자체가 경륜을 이루실 하나님의 고뇌가 될 법 했다. 어찌 할 것인가?

사람은 어려운 일을 해낸다. 30-90미터의 폭을 가진 운하를 만들었다.  이리하여 태평양과

대서양을 연결하는 파나마 갑문식 운하를 만들었다. 2800미터에 달하는 금문교를 만들어

먼 거리 운행을 단거리로 다니게 뚫었다.

이때 하나님은 어찌 하실 것인가?

"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어머니는

그에게 '지명된 자' 아벨에 대한 '보상' 또는 '대리'라는 뜻의 셋(Sheth)이라는 이름을 붙여주

었다. "

"하와는 자신의 경건한 아들이 죽은 것을 보고 약속된 후손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은 저주

를 받은 간인에게서는 성취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한 후에 약속된 구원자는 셋을 통하여

오리라는 자신의 믿음을 표현하였다. 그녀의 믿음은 보상을 받았는데 이는 셋의 후손들이

여호와께 순종하였기 때문이다."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는데 셋 역시 "자기 모양(아담)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창 5:3)이라고 했다.

알고 보면 이 사건의 이야기에서 욧점은 하나님의 품성을 담는 문제 여부였다.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고 해와는 말했다. 하나님을 닮

는 품성이 그리스도께로 가는 통로가 되고 복음이 된다.

하나님은 이것을 이룩하셨다. 우리는 때때로 이렇게 막막하고 단절되는 것 같은 신앙적인

체험을 경험하지만 하나님은 영적인 '보상'인 셋의 체험을 더하게 하신다. 그것도 풍성하게

체험하게 하신다.

결코 하나님은 실패하지 않으시며 그를 신뢰하는 자 역시 실패하게 내버려 두시지 아니하

신다.

 

 

그런데 셋에 대하여는 에노스를 낳았다는 기록 외에 912년을 살았는 대도 별로 다른 기록이

나타나 있지 않다.

별로 없다는 말은 다소 있다는 것이 된다. 그런데 바로 그것이 우리 신앙의 근간이 되고 전

부가 된다.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는데 바로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고 한데 잘 나타난다.

이 이야기는 불신의 세계 속에서 성도들의 구룹이 형성되는 강한 느낌을 받는다는 것이다.

"물론 에노스를 낳기 이전에도 여호와를 불렀으나 시간이 경과하면서 보다 공공연한 구분

이 여호와를 섬기는 자들과 그분을 멸시하는 자들 사이에서 생겨났다."

특히 여기에서 '여호와를 불렀더라'는 말은 '공중예배를 지칭하기 위하여 구약성경에서 자

주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남은 무리'의 시초가 아닌가.

어떻게 이런 형성이 이루어지고 당시의 시대의 연결고리를 형성하면서 부흥을 이루었을까?

셋은 여호와의 형상, 아담의 형상이었다. 이 형상의 반영이 사람들로 하여금 여호와를 부르

게 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최초의 하나님의 형상을 들어낸 전도자가 된 셈이다.

그리스도인의 품성이 전도하게 한다는 감화력은 사실이다.

사실 아벨은 죽은 것이 아니다. 이름의 의미 대로 셋이 '대신'했기 때문이다. 당시에 살았었

으나 죽은 것은 가인이었다.

아무리 애쓰고 힘써도 변화없는 품성은 영혼을 잃게 하고 교회로 하여금 병약하게 한다.

우리는 종종 전도하기 위하여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해야 한다 라고 말한다. 그러나 참 전도

는 품성의 그리스도에 대한 반영이 근본이라는 것을 잘 알아야 한다.

그러하다면 우리는 오늘날 어떻게 예수상으로 빚어질까.  이것이 셋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

이다. 예수의 품성이다. 이것이 전도이다.

이것이 없이는 어느 곳에도 병약하거나 쓸 데가 없다.

셋은 대서양을 태평양으로 연결시켰다. 왜냐하면 그가 없이는 "향기로운 냄새"이신 십자가

상으로 이어질 수 가 없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셋의 위치가 필요하고 구원하는 은혜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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