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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지 않고 돌아가신 부모가 구원얻도록 간절히 기도한다는 말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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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믿지  않고 돌아가신 우리 부모가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열심히 기도한다

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란 목사는 '사람이 죽은 후에는 다시 회개할 수 있는 기회가 없습니다.

영혼이 따로 살아서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라고 했더니 그가 하는 말 '그걸 누가 모릅

니까, 그러나 나의 간절한 기도를 불쌍이 보셔서 불쌍한 우리 부모를 구원해 주시리라 믿는

것이지요!' 라고 즉답했습니다. 

이때 목사는 ' 이미 하나님의 말씀에는 '자기의 의로 자기만 구원을 얻으리라'(겔 14:20, 14

참조)고 했은즉 이미 돌아가신 분의 구원의 여부는 하나님에게만 달려있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집사님의 부모의 사후의 기도에 달려있는 것이 아닙니다.' 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이때 그 집사는 말하기를 '아니요. 나는 이미 나의 부모 만은 그렇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심증과 응답을 내게 주셨습니다.' 라고 서슴없이 대답했습니다.

이런 후에도 그는 조금도 그 생각을 떨치지 않고 자기 신념으로 간직하고 살며 그렇게 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이 대화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성도께서는 성서진리를 잘못 알고 있

으며 일러준 말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하나님의 뜻으로까지 비화시키

고 있습니다. 사람이 생각해 낼 수 있는 그럴듯한 생각이  자기신앙이 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생각에서 지식이 있고 성경을 많이 아는 학자들도 이성주의를 앞세워 지성적인 그럴듯

한 성경해석을 하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려고 하면 사람의 호감이 가는 그럴듯한

해석을 얼마든지 생각해 낼  수 있는 여지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닐뿐더러 구원의 지식으로 말할 수 없는 것들이 되는 것입

니다.

 

 

그런데 이런 이성주의의 해석은 하늘에서부터 인류의 조상이 범죄한 직후 시작되었습니다.

아담과 해와는 자기들의 몸이 벗은줄 알았을 때 곧 그 수치를 가리기 위해 '무화과 나무 잎

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창 3:7)고 했습니다.

'무화과 나무 잎을 역어' , 이것이 사람의 생각으로 해낼 수 있는 그럴듯한 자유주의 신앙과

아울러 인본주의의 시초와 근원이 되었습니다. 아마 그들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 삽시간에 우리들의 영광스러웠던 옷이 어디로 가고 말았지! 아유, 부끄러워 어찌 하지!

가만 있자. 무부화과 나무 잎들이 옆에 있구만. 자, 이렇게 해보자. 어서 이것을 엮을 끈이

될만한 덩굴을 가져오라고. 어서. 그런 다음 이 잎들을 가지고 불이 나게, 그럴듯하게 엮어

서 얼른 옷들을 해입었을 것입니다.

영광의 옷을 대신하기란 역부족했고 어리석은 일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사람의 꽤를 실은

의지적인 모습이 잘 엿보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유의하십시요. '무화과 나무 잎으로'가 아니라 '무화과 나무 잎을 엮어'입니다. 인

간의 생각과 노력으로 원상으로의 회귀성취를 노렸다는데 그 차이는 매우 큽니다.

바로 이것이 '사람의 의'의 시원이 되었습니다. 아담을 닮은 후대의 사람들은 대개 이런 의

를 이루어 '하나님의 의'에 이르러 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무용하고도 천박한 일

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것 역시 하나님은 하늘에서 그들에게 다른 옷을 지어 입혔습니다. 아담 해와는

언제 감람나무 옷을 벗었는지는 잘 모르나 하여간 다른 옷으로 갈아 입었는데 그것은 하

나님이 마련해 입혀주신 옷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니라'(창 3:21)고 했습니다.

여러분, 여기에서 다시 한번 유의하십시요. '가죽옷을 지어'입니다. 그냥 '가죽옷'이 아니고

'가죽옷을 지어'입니다.

역시 여기에도 반대로 하나님의 의지적인 모습이 보입니다. 아마도 온 몸을 감싸도록 알

맞게 만들었겠지요. 이것은 이들이 세상으로 나가면 추울까 싶어였을까요. 구태어 그것을

부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실 밖으로 나왔을 때 그러기도 했으니깐요.

그러나 본래는 그것 보다 훨씬 다른 심원한 뜻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양을 잡아

피를 흘린 이 양처럼 너희를 위하여 구속주가 죽을 것을 가르치신 다음 제단에 드렸을 것

이고 이렇게 너희가 하늘로 복귀하려면 회복의 '의의 옷'을 입어야 한다는 교훈을 위해서

였을 것입니다.

이것이 아담 해와의 타락 직후와 후대에 이르러 그렇게 했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의의 옷

을 상징하는 옷이었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두 무리가 존재합니다. 한 무리는 '자기의 의'의 옷을 입으므로 의로워지려는

무리이며 또한 무리는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음으로 의로워 지려는 무리입니다.

이런 사실이 구전으로 이어 받은 가인과 아벨이 드린 제사제물에서 즉시 나타났습니다.

또한 이런 무리는 이 지상이 존재하는 날까지 이 세상에 같이 존재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의로 의로워지려는 무화과나무 잎으로 짠 옷을 벗어버리고 그리

스도의 의의 피로 정결해질 그리스도의 의의 옷으로 갈아입는 삶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바로 이것이 칭의, 성화, 영화의 가르침입니다.

이런 의는 성경 말씀의 가르침에 의지합니다. 말씀의 인도와 섭리를 부인하면서 나의 취

향 대로 살려는 삶에는 무화과나무 잎과 같은 옷이어서 일시적이며 세상적이며 모래성

쌓기와 다름이 없는 이성주의의 늪지대가 되고 말 것입니다. 

유득히 '드리엠'(Three M: Money돈, Machine기계, Mass-Com대중매체 )시대인 요즈음

'양심 및 의식혁명'(Revolution of Conscientiousness and Consciousness)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신앙의 원천으로 돌아갑시다! 그리스도의 의의 옷으로 온전히 갈아입으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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