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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쓴 라오디기아교회 연구(계3:14-22): '행위를 아노니', '원하노라'(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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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15)

 

여기로 들어가기 전에 미리 말해둘 것이 있습니다.

대개의 경우 7교회는 칭찬이 있고 권면이 있습니다. 사람이, 교회가 칭찬이 있고 권면이 있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로 보입니다. 사람이나 교회가 다 완벽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권면 들

을 것이 있고 칭찬 들을 것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나오는 라오디기아교회는 권면과 책망은 많이 있지만 칭찬은 전혀 없습니다. 유로지

(칭찬) 효과를 고려한다면 권면이나 책망만은 비효과적인 것이지요. 그러나 사실 대로라면 어쩔 수

없는 거죠. 라오디기아가 그러한 상태입니다.

사람이 하는 일이 없이 칭찬을 듣고자 하거나 또 헛된 칭찬을 늘어놓는 일은 무익할뿐 더러 마귀를

돕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물론 칭찬은 좋은 결과를 갖어 올 수 있고 위로와 보람과 격려가 될 수 있

습니다.

 

 

 

그런데 그런 차원을 달리 해서 어떤 경우 참된 의미에 있어서 칭찬이 없는 권면이 양양이 될 수 있

습니다. 이미 말했지만 참된 증인이신 진실하신 분이 라오디기아를 볼 때 칭찬할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의할 것은 주님은 유익을 위해 이 기별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기별자께서 내보이는 말씀

중에 용기와 희망을 얻을 수 있는 두 가지 내용을 이 15절에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해야만 합니

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과 약속에는 반드시 희망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네 행위를 안다.' '원한다' 이 두 가지입니다. 라오디기아가 하나님의 의중에 있

고 그들에게 소원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라오디기아교회는 오히려 그에게 매달릴 수 있는 것입

니다.

 

 

 

1)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우리가 아무리 우리의 죄악을 숨기려고 해도 주님의 통찰하시는 바는 우리의 속속들이를 다 아신다

는 말씀이신대 그가 우리를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동기, 목적, 불신, 의심과 질투심들은 사람들에게서 감추어질 수 있으나 그리스도에

게는 감추어질 수 없다.'(증언 3. 256)는 것입니다.

반면에 주님은 우리를 알아주시는 분이시니 좋지 않습니까. '그분의 권고는 각 교회의 문제들을 충

분히 아시는 분, 그러므로 적절하고 효과적인 해결책을 추천할 수 있는 분의 권고이다.'라는 것입니

다.

그런고로 주님이 '네 행위를 안다'는 말씀은 우리 속을 통찰하실 뿐 아니라 그 효과적인 해결책을 간

구하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2) '원하노라'

주님은 우리에게 '소원을 두고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분이십니다. 주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알고 싶지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참 백성이라면 여기에 관심을 모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 뜻을 알고 그 뜻에 달가운 마음으로 순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럼,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던지 더웁던지 하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라오디기아교회에 절실한 기별이며 필요입니다. 이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흔히 잘 믿던지

반대로 잘 믿지 않던지, 아니면 구원을 받을만치 적극적으로 잘 믿던지 아예 믿지 말고 사라져 버리

던지 하라는 말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가요? 사랑이신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

하실리 맘무합니다. 이것은 말씀의 뜻을 잘못 이해해서 잘못 풀이를 하는 탓입니다.

 

 

 

'차겨움이란 영적인 생명에 의해서 접촉한 바 없는 거듭나지 아니한 이방인의 상태이다. 열을 받아

본 적이 없고 더운 것과 섞여본 적이 없는 얼음 같이 찬 것을 의미한다. ...이제까지 은혜의 능력에

접촉된 적이 없는 사람의 상태로써 이러한 사람은 은혜와 그 역사하심에 이르게 되면 그는 열열하

고 열성이 있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기 때문에 항상 희망적인 경우이다.'는 것입니다.

'차라리 차겹다면 그대가 회개할 수 있는 약간의 희망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의대신 자신의

의로 둘러 걸친 자들은 그 기만이 너무나 커서 보이지 않으며 자신의 의를 버리기가 그처럼 어렵기

때문에 그의 경우는 접촉하기가 더욱 어렵다.'(교증 2. 176)는 것입니다.

반면에 '더웁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에 계속 접촉되어지면 마음을 거룩한

사랑으로 뜨거워지고 행동은 열열한 헌신으로 특징지워지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은 더욱 열을 내고 차겨운 것은 또 더욱 뜨거워지기를 바라는 반응력이 있는 것이기에

둘 다 예수님이 바라고 원하시는 신앙상(열열한 신앙상)입니다.

그러나 차겹지도 않고 더웁지도 않는 중간상태, 곧 미지근한 상태는 참으로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이런 경우의 신앙상태를 싫어합니다. 우리가 꼭 배격해야 할 것이 또한 미지근한 상태, 그

것입니다.

그런데 라오디기아교회의 구성원은 개인으로부터 시작해서 가정이며 다음에 교회입니다. 그래서

개인의 가슴을 먼저 정검해 볼 필요가 절실합니다. 그래서 가정이며 하나님의 성소에 모인 무리가 

눈물이 많아야 성소가 뜨거워집니다. 예수님이 이것을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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