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쓴 라오디기아교회 연구(계 3:14-22): '라오디기아'의 의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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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역사)도 좋고 미래(미래학)도 좋지만 현재 내가 사는 세상이 내게 의미가 있고 좋습니다.
그래서 그 역사와 미래와 그 의미를 찾는 것은 현재 우리의 삶을 위한 것입니다.
이리하여 이렇게 살아가면 과거의 역사가 보람되어지고 미래학은 찬란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참 이상하기도 하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사도 요한이 서기 약 100년 경에 쓴 라오디기아교회에 보낸 기별이 그 기나긴 약 2,000년을 지나서야 우리가 지금
사는 시대에 해당된 기별이었다니 그 기별이 반가운 친지를 만나듯 기뻐집니다.
우리는 그 기별이 우리를 냉대하는 기별이 아니라 사랑과 온정이 있는 기별임을 잘 알고 있지요.
잘 모르는 이들은 칭찬이 없는 그 기별을 싫어하기도 하지만 그건 큰 오해이지요.
우리는 따스한 가슴을 열고 그를 맞으면 그의 속내를 절실하게 잘 알게 될 것입니다.
그의 기별에 충실해 보는 입맞춤이 있으면 보람 되어질 것입니다.
라오디기아(Laodicea)! 외초엔 한 여성의 이름이었지요.
헬라의 Antiochus 2세(261-246 BC) 때 그의 아내 Laodicea의 이름을 따서 그곳을 그렇게 명명하게 되었다지
뭡니까. 그런데 어찌하다가 그곳이 약 350년 후 사도 요한 당시에는 7교회에 보내는 회람 소식의 마지막 교회가
되었고 '라오디기아'의 뜻이 '백성을 심판함', '심판 받을 백성', '의로운 백성'으로 적용되어 마지막 시대의 마지막
교회의 백성에게 주어졌는지 심오하기만 합니다. 그렇지요!
그 보다 더 신기한 것은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살필 때 '라오디기아'(심판의 뜻) 하면 구약 성소제도를
생각나게 한다는 것입니다. 성소제도를 생각하면 대속죄일을 생각하게 되고 대속죄일의 지성소 봉사를 생각하게
되고 7월 10일의 죄를 가려내는 조사심판의 경우를 생각하게 되고 그래서 드디어 의롭다 하는 의롭게 되는
백성의 배경까지를 생각나게 해주지요.
그런데 3단계로 더 심오한 것은 지금은 예수께서 대제사장의 자격으로 당신의 백성들의 죄를 사실하시고
속죄하시는 사랑의 조사심판이 진행되고 있는 이 시대 라는 사실이지요.
사도행전 17:31절에 이런 귀중한 말씀이 있습니다.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했고 30절에는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지금의 세대는 그러한 시대입니다. 2300주야(단 8:14)의 끝인 1844년부터 시작하여 하늘 지성소에서 조사심판
(히 9:25-26, 계 15:5-6)을 끝내시고 최후의 선고를 하신 뒤(계22:11) '죄와 상관이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에게"
(히 9:28) 다시 오실 때 구원을 얻을 마지막 백성의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에 있어서 '심판'은 '사랑의 심판'입니다. 이것은 주님이 이 땅에 오시기 위한 필수적인 예비 절차이고 이 일
후에 주님은 오시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라오디기아 라는 뜻이 마지막교회의 시대임을 잘 나타내고 있는 것
입니다.
라오디기아라는 한 여인의 이름에서 마지막 당신의 백성을 심판하는 적절한 인용으로 사용케 되는 데는
하나님의 오묘한 뜻이 있는 것 같지요. 하나님은 매사 인간의 일을 인용하셔서 하나님의 기회로 만드시는 경우를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어떤이는 뻐스 정류장에서 아쉽게 차를 놓혔데요. 그런데 거기서 그리도 보고싶고
만나보고 싶은 친지를 만났데요. 필연일까? 아니면 우연일까? 하나님만 아시겠지만 믿는 이에겐 체험의 증거를
안겨주는 게 있지요. 그렇지요!
18세기 중반인 1865년에 이미 성서주석학자였던 Joseph. A. Seiss는 라오디기아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야흐로 빌라델비아시대는 미지근하고 자만스럽고 속이 빈 공언만 늘어놓고 거짓 평화에 젖은 라오디기아
시대에 신속히 그 자리를 물려주었는데 이 세대야 말로 자신들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러하지 못한 무사려한 무리들을 찾아내기 위한 심판의 시대이다. 어느 누구든지 우리 시대의 공언하는 교화를
면밀히 살펴보고 나서도 우리가 아직 라오디기아시대에 이르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나는 부자라
부요하고 부족한 것이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우리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의 음성이 아닌가? 오늘날 교계가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사실이 어쩌면 그렇게 꼭 같다고까지 하지 않겠는가?'
종교, 기독교 교계와 세속화, 상품화의 등거리 시대에 주님은 토하여 내치고 싶을만치한 교회시대 라는데
어찌할까? 놀랍습니다. 일단 우리는 라오디기아의 이 연구를 하면서 믿음으로, 은혜로 터득하고 신앙의 영감을
기리는 마음으로 살펴보도록 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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