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정감 있으신 분이었다! 우리는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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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합체의 예수님, 신성도 함께 한다는 생각 때문에 그분에게서 인간다운 정감을 많이 놓힙
니다. 그러나 성경을 고찰하면 그 예수님에게서 인간의 정감이 넘쳐남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
리는 그 면면을 놓여서는 아니될 것 같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요 14:-17:)에는 정다운 애정이 들끓고 있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
를 예비하러 가노니...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나 있는 곳에 너희
도 있게 하리라'(요 4:1-3)
이것은 '재림의 허락' 말씀이라고 많이 말합니다. 맞습니다. 100% 맞습니다. 그런데 이렇게만
보고 말면 정작 '재림의 약속' 속에 숨겨있는 예수님 정신은 다루지 못한 아쉬움이 있습니다.
사람인 우리로써 예수님의 정서적인 애절하고도 다정한 유언의 정감(affection)을 놓히면 아니
됩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제자들은 물론 유대인들의 목축과 유목민적인 떠돌이 생활, 정처없는 고
난의 행군생활, 그래서 언제 정착된 행복한 생활을 누리면서 살 것인가? 에 대한 연민의 정을
나타내는 생각이 그 '재림의 약속' 전에 우선하고 있습니다.
이 짧은 말씀 속에 '내 아버지 집', '거할 곳', '처소', '나 있는 곳'이라고 여러 번, 여러 가지로
묘사했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이 어린 아이를 타이르고 위로하는 것 같은 정감이 배어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린 그것을 포착해야만 예수님의 간절한 사상을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포착해야만 예수님의 간절한 사랑을 유여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거할 곳'이란 헬라어 '모나이'로 영어의 '집'(멘션)은 '계속해서 머물 거처 혹은 거주지'를 의
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당시 이 말씀을 듣는 자들에게 큰 필요와 위로와 소망이 되는 말씀
이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이 말씀 속에는 정신혁명사상이 들어있습니다.
14장 속에서만 보더래도 예수님의 정감이 묻어나는 말씀들이 구슬을 뀌고 있습니다.
성령으로 너희 속에 있겠다.(16-18), '너희에게로 오리라.(18), 거처를 저희와 함께 하리라.
(23), 평안을 주리라.(27)...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같은 말씀 속에서 신이신 인간의 정감을 느낄 필요가 있습니다. 정감은 인간으로써
맞닿는 공식이 설립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공유되는 '위로'입니다. 참 위로는 생기가 돋고
생활을 변혁시키며 희망과 소망을 체현하게 하며 더 나은 진취를 갖어오게 합니다.
그런 위로는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리라'(18)는 말씀에서 짓게 풍겨나고 있습니다.
고아는 아기가 부모를 버리는 일이 아닙니다. 부모가 아기를 버리는 일입니다. 그래서 고아
가 됩니다. 그런데 부모가 아기를 버릴 때 불가항력이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슬퍼합
니다. 그것이 여기 나타난 예수님의 심정입니다. 절통해 하는 것입니다. 부득불 가야만 다시
올 것이기에 가지만 지금 백성 모두를 고아로 버리는구나! 그런데 아니야, '고아처럼 버려두
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사랑의 사연 이야기를 우
리의 정감을 접고서는 읽을 수 없는 노릇인 것입니다.
저는 입양아를 대리고 미국까지 간 경험이 있습니다. 공항에서 어린 아이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정작 어린 아이를 건낸 그녀는 정신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녀가 바로 어머
니였습니다. 엽구리로 항문이 나있는 아들을 서러운 사정으로 미국으로 떠나보내는 것입니
다. 이것이 예수님의 정신과 비유될 수 있습니다. 슬프고 애절합니다. 다시 만나고 싶은 것
입니다.
지금도 주님은 간절한 마음으로 우리를 위해 탄원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위로의 하나님'(
고후 1:3)이십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이 이렇게 위로의 하나님이신 것을 찬송한다고 그
의 편지 허두에 썼습니다.(상동 1:3)
성도 여러분! 재미나는 일을 해볼까요. 고후 1:4-7절을 읽고 '위로'라는 말씀이 몇번이나 있
는지 세어보시겠습니까? 그 짧은 말씀 중에서 무려 10번이나 있습니다. 주님이 왜 위로의
하나님이신지 그 상황을 그 말씀 중에서 숙고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환난'과 '고난'에서의
'위로'이지요!
그래서 그분이 오시는 날 주님의 정감이, 우리의 정감이 얼마나 하겠는지요.
'그날에 말하기를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
시리로다 이는 여호와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우리는 그 구원을 기뻐하며 즐거워 하
리라'(사25:9)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정녕 그렇겠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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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김영환님의 댓글
김영환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정영근 목사님!
[자료실-신학]방에서 뵙게 되여서 반갑습니다.
금년 초에 - 이런 글을 보게되였습니다! - "어느 분이 새해 들어 새로 글쓰시기를 바랍니다!, , , "
지금까지는 "자유게시판"에서 활동했지만,
앞으로는 [자료실-신학]방에서는 - [신학]+ [하늘]/천문에관한, [음악]방에서는 - 음악에관한, [건강]방에서는 - 건강에관한,
주제들을 공부하면서, 피차 도움을 주고/받고자 합니다.
앞으로 [신학방]에서 - 신학에 관한 많은 도움을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반달 올림>
댓글에 - 의견도 주시고, 좋은 관련된 자료들도 올려주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