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쓴 라오디기아교회 연구(계 3:14-22) : '내가 사랑하는...책망하여 징계하노니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13) >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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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쓴 라오디기아교회 연구(계 3:14-22) : '내가 사랑하는...책망하여 징계하노니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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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자연사와 같은 무서운 세가지가 있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 끝내 굶너 죽는 것이며 입을 것이

전혀 없어 얼어죽는 것이며 볼 수 없어 죽음이나 방불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런 삶은 참으로 불쌍

한 삶이며 종국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라오디기아 신자들이 영적으로 당하고 있는 영역의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성령의 치유케 하시는 안약

을 사서 발라 보게 하는 것은 이상의 불상사를 극적으로 호조건으로 반전시키는 반응적인 행위가 있

을 산태를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하는 것을 보면 라오디기아인들은 이에 상응

하는 영적 태도를 취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거역과 반역이며 불순종입니다. 영적 치

유가 없는 길은 죽음의 길입니다. 이런 일이 다반사로 일어남으로 주님은 하실 말씀이 많이 있게 보이

는 대목인데 이 자세한 말씀이 생략되어있는듯한 문장적인 문구를 살펴보게 되어집니다. 자세하게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게 되어집니다.

다만 그 과정과 결말은 분명하고 더 심각해 집니다.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한다'는 것입

니다. 오늘날 흔히 유로지 효과가 좋지 '책망'이나 '징계'가 좋지 않다고 말합니다. 역효과가 나는 예

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은 이것을 몰라서 그러시는 것입니까? 잔소리, 쓴소리 하면 그것이

싫어 피하려 들지 않고 그 말하는 존재를 재거해버리려고 드는 세상을 몰라서 주님은 그러시는 것입

니까? 아닙니다. 주님은 벌써 그런 것을 잘 아십니다. 다만 주님은 죽는 길로 가거나 반대의 길로 가는

 '사랑하는 자'의 행보를 가만히 둘 수 없어합니다. 이것이 참 사랑입니다.

 

 

 

그분이 '책망'하고 '징계'한다 라고 하니깐 '그분의 책망도 그분의 징계도 사람이 자제력을 잃었을 때

와 같은 분노의 표현이 아니고 그 목적이 죄인들을 회개케 하는 강력한 사랑의 표현이다.'는 것입니

다. 참 우정이고 '친구로써 개인적인 애정의 온정을 다하여 사랑'하는 '필레오' 사랑 모습입니다. 어쩌

면 탄원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의식과 불신과 불의를 책망하되 그의 음성에는 언제나 눈물이 섞여 있었다.'(S. C. 12)

주님이 행하시는 '책망'과 '징계'는 길르앗의 기름과 같이 부드럽고 엉키는 것이며 양약 중에 양약이

되는 것이기에 주님의 '책망'과 '징계' 만큼 죄인에게 좋은 약효란 없는 그러한 성질의 '책망'이며 '징계'

인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세상에서 보는 '책망'이나 '징계'와 같은 인상을 떠올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라오디기아인들이 이러한 주님의 간절한 사랑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거역한다면 참으

로 심각한 잘못인 것입니다. 라오디기아인들의 잘못이 실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참된 사랑은 언제나 쓰다듬지 만은 않스빈다. 사랑은 언제나 부드러운 말만을 하지도 않습니다. 사랑

은언제나 주기만 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칭찬만 하지 않습니다.

'사랑이라고 일컸는 한 요소가 잇는데 그것은 우리 동료를 칭찬하고 아첨하도록 우리를 가르치는 반

면 저들의 유익을 위하여 또는 저들의 위험에 대하여 충실히 경고하고 권면하도록 가르치지 않는다.

이러한 사랑은 하늘에서 난 것이 아니다.'(리뷰 앤 헤랄드 1884 1. 8)

'책망'과 '치료를 위한 모든 참 훈계의 목적은 잘못한 자에게 죄를 깨닫게 하여 새로운 행동의 길을 취

하도록 격려하는데 있는 것'인데 이를 거역하면 주님은 그 다음의 단계로 '징계'한다는 것입니다. '징

계'라는 원어적인 의미가  '특정하게 부모로써 자녀를 개심시키고 훈련시킬 목적으로 그를 책망하고

벌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바라는 바는 첫째 '열삼을 내라'고 하고 둘째 '회개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회개하라'는

'메타노에오'라는 단수를 쓰신 것은 이 기별이 무리에 대한 호소이기에 앞서 한 사람 개개인을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라오디기아인들은 이 회개와 더불어 참된 회개의 정신과 헌신으로 오는 뜨

거움과 열심을 개인적으로 경험하도록 요청'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책망'과 '징계'가 무서워 하지 못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오히려 역반응이 주인의

노릇을 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책망이나 징계가 사라졌고 회개의 참 모습에 대한 가난을

느끼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본문을 읽고 라오디기아 모습에서 벗어나 개별적으로 주님

의 참 모습 재현에 동참자가 되어야 희망이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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