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삭!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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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삭은 수넴지방 여인으로 '동녀는 심히 아리따운 자'(삼상 1:1-4절 참조)였습니
다.
저로 다윗왕을 모셔 봉양하게 하기 위해 다윗왕의 신복들이 '이스라엘 사방 경내에
아리따운 동녀를 구하다가' 찾았으니 오늘날로 말하면 미쓰 진으로 뽑힌 셈이지요.
물론 다윗은 아비삭과 '더불어 동침치 아니하였더라'고 했으니 충실한 수종자고 봉
양자라고 보여지죠.
역사에는 다윗의 아들 솔로몬에게 '아비삭이 다윗의 아내로 생각되었던 게 분명하
다.'고 한 해석도 찾아볼 수 있지만 엄격히 말하면 다윗의 아내는 아니었습니다.
다윗의 아내 밧세바가 다윗을 찾았을 때도 수종드는 아비삭의 모습으로 나타나 있
으니깐요.(상동 1:15)
그런데 오늘의 이야기에 대한 포커스는 다른 데 있습니다.
기회를 놓히거나 뜻을 이룰뻔 했는데 거의 잡았다가 놓여버린 아쉬운 경험이 있는
지요. 돈과 명예와 지위를...
그래서 그게 항상 마음에 맴돌거나 후회되거나 낙담하고 절망해 본 일이 있는지요.
꼭 그러하지는 않다 하더래도 정신세계의 불행이 되는 일이 되어지지는 않는지요.
어쩌면 이런 경험은 작고 크고 간에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게 그리스도인 품성개발에 적지 않게 저해가 되어진다는 말입니다.
이런 때 아비삭을 떠올려보시기를 바랍니다.
젊은 왕이었다면 왕후가 되어 영광을 누렸을 텐데 말입니다.
왜 그리 왕의 눈에 늦게, 혹은 하필 늙은 왕에게 발견되었을까요!
만약에라도 아비삭과 결혼하기를 원한 아도니아가 성공했더라면 또 왕후가 되었
을 텐데 말입니다. 호기가 왜 이렇게 살짝 스치고 지나가고 마는 것이었을까요.
아비삭은 아쉽고 슬펐겠습니다. 많이 많이 슬펐겠습니다. 평생을 두고...
아비삭, 2번씩이나 왕후가 되었을 뻔한 호기를 놓히고 이름없이 물러나 소일하
다가 그냥 세상을 가고 말았습니다. 정녕 삶이 통분하고 굴욕적이었을 겁니다.
겸허해서 조용했을까요? 아니죠. 고단하고 미천한 출신이고 힘이 없으니깐요.
어쩔 수 없었던 거죠.
정작 왕궁의 영화를 맛본 적 있고 떼묻은 그녀의 삶이 허전해져 얼마나 슬프고
비통하며 불행했을까요!
어쩜 그녀와 동일원인 같은 것으로 미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불행하고 슬플 때
아비삭 같은 친구를 마음에 떠올리고 사귀다 보면 한결 위로가 되지 않을까요!
이심전심이죠. 슬플 땐 슬프지만 기쁠 땐 같이 기뻐할 수 있을 겁니다.
믿음의 창구로 말입니다. 이 창구로 보면 굴욕의 십자가 지시고 채찍 맞으시는
예수가 보이죠! 역역하게 보이죠! 그래 내가 살게 되었으니 오히려 그게 큰 위
로가 되고 마음이 편안해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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