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새로 쓴 팔복강해(마 5:1-11) :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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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5)
'온유'한 자는 이 세상에서 없신여김을 당하며 압제를 당하지 아니한가? 어찌 그것이 복이 될 것인가?
인류의 시조가 죄를 범한 직후 가인은 끔직하고도 놀랍게 피를 흘리며 동생을 죽여놓고도 하나님이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창 4:9)고 묻자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상동)라고 대답함으로 죄의 잔인성과 더불어 뻔뻔함을 둘 다 나태내었다.
또한 이 세상의 사람들은 죄의 영향 아래 살면서 '내가 내'라는 자아중심적이고 '지키는 자니이니까'라는 자기방어적이며 자기 회피주의적인 것, 둘 다를 나타내는 존재가 되었다.
이것은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실체라는 사실이 그때 이미 잘 나타내졌다는 확실한 증거가 되었다.
구약의 열왕의 시기에는 창과 칼을 겨루고 싸우는 심한 역사의 징후를 나타내 보였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직전까지 종교지도자들까지도 심히 자존적이고 교만했으며 무정하였다.
오늘날 세상은 어떠한가? 10학년을 가르치는 여교사가 교회의 젊은 청년목사를 찾아와서 이렇게 타이르듯이 말했다.
'내 아이 만은 기독교에 너무 깊이 빠져들지 않도록 적당하게 가르쳐 주십시요! 너무 유약한 자가 되지 않게 말입니다!'고. 아마도 그 아이 어머니는 자기 자녀가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지는 날이면 필시 담대하고 용감하며 때론 저항에 맞서 싸우고 승리하며 제패하는 기상을 잃을까 싶은 모종의 걱정이 있었을 것 같은 추측이 든다.
그런데 그녀가 말한 '유약'이란 혹시 예수께서 말씀하신 '온유'가 아닐까 싶어지는 대목이다. 그것이 그러하다면 '온유'는 이 세상에서 무시를 당하기 일수이며 별로 인정을 받거나 인기가 없는 정신이다. 그러하지 않는가. 발길로 걷어채이거나 없신여김을 당하기에 안성맞춤이 되어지거나 이 세상을 살아가기에 부적합한 정신이라고 사람들이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부당한 사리판단인가? 아니다. 아마도 이것이 이 세상에서는 사뭇 그럴듯한 이유에 대한 현실적인 변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놀라지 말라.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서도 참고 온유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이방인들에게나 유대인들이 귀하게 여기는 특성이 아니었다. ... 그러나 예수께서는 온유를 천국에 들어가는 첫째 조건으로 삼으신다.'(산산보훈) 왜 그러할까? '그분의 생애와 품성 속에는 이 귀한 덕성의 거룩한 미가 나타나 있'(상동)기 때문이다.
'온유'는 그리스도인 품성문제 자체이다. 예수의 종교는 하늘의 종교이며 예수의 종교는 하늘의 분위기 속에 살기 위해 자신을 비우는 종교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이 땅을 사실 때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비우셨다. 그래서 그분께서 하시는 일에는 어디에고 자아가 나타나지 않았다. '(상동)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채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5-8)
에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개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9-30) 하셨다.
'온유'라는 헬라어 '프라에이스'나 히브리어 '아우나'는 우리가 일컷는 '온유'로 일것기에 적절하다. 이 원어적인 의미에는 '온화한', '상냥한', 그리고 은유적으로 '겸손'의 뜻도 같이 들어있다.(다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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