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목자의 시'(시편 23:1-6):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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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4)
아름다운 시와 노래는 강열한 정감을 타고 부득불 밖으로 노출될 수 밖에 없다. 어느 사람 어느 누구
에게나 그럴 것이다.
하긴 하나의 근원이 있다. 사랑의 하나님은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구원을 얻으리라'는
충동과 감격을 사람의 마음에 넣어주셨다. 그래서 사람은 이런 선율을 타고 구원의 주 우리 하나님을
찬양하고 신뢰하고 노래할 수 밖에 없으리라.
다윗의 이 4절의 노래는 바로 전 절인 3절과 무관하지 않다. 오히려 끈질긴 인연이 있고 열결사상이
있다.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는 표현 말 속에는 막상 '의의 길'로 가거나 통과하기 위한 자신의
생명의 위험이나 애절한 상황 같은 것들을 머리 속에 반드시 담고 있거나 떠올려 그려보았음직 하다.
아마도 어쩌면 아주 강력하게 떠올렸을 것이 분명하다.
사울에게 쫓기며 앵게디의 험한 굴 속에 숨으며 생명이 경각간에 달리며 아슬아슬했던 위험의 순간
같은 지난날의 숱한 일들을 상기하지 않았을 리 맘무하다. 유득 이런 순간에도 기름부음 받은 왕을
결단코 해하지 않겠다는 신앙의 다짐과 무장 같은 일이 또 하나의 '의의 길'로 가는 길로 마음에 제시
되었을 것으로 상상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그때가 진정으로 어려웠고 얼마나 위험한 순간들이었던가. 이런 과거의 워험이 왕으로 있을 현
재에도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현실로 받아들여지고 있기에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
도 해를 두려워 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고 노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어쩌
면 마음에 매아리치는 호소였을 것이리라. 아마도 이런 생각이 강열하게 자신의 마음을 불태우며 스
쳐 지나갈 때에는 옥좌에서 벌떡이라도 일어나곤 했을지도 모를 일이 아니었던가!
여기서 '사망의 음침함'은 히브리어의 '첼마웨트'인데 '첼'이라는 '그림자'와 '마웨트'라는 '죽음'이라
는 두 단어의 합성어이다. 이를테면 '즉음의 그림자'가 항상 다윗 자신의 지난날에 드리워진 것 같았
을 것이겠고 '골짜기'가 붙어있는 표현은 불현듯이 '엥게디'의 서슬 시퍼렇던 칼날을 연상할 수 있는
그 지긋지긋한 '골짜기'를 지금 당하는 것 같은 착각의 심정을 필시 회상하지 않았을까 싶어지는 대
목인 것이다.
어느 누구나 그리고 사람의 삶이란 경험의 연속이고 이 경험의 연속 속에서 연결되는 사고를 하기
마련인 것이다. 그런데 다윗은 이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
은' 이라고 노래해서 그 목자의 그 목양의 노래를 신뢰하는 마음 가짐으로 칭송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왜 두렵지 않았을까?에 대하여는 두 가지 견해를 스스로 잘 나타내 보이고 있다.
하나는 '주께서 나와 함께 함'이며 또 하나는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기 때문인 것
이었다. 너무나 이 보호의 장벽이 고마울 따름인 것이다.
첫째는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했다.
그런데 다윗에게는 이같이 만족해할 수 없는 환난과 시련 속에서도 양에게 있어서 지켜주는 목자
가 있었음 같이 '주께서 나와 하심이라'는 생각으로 그 마음이 순화되어질 때 마치 이 경우에 하나
님 여호와를 저절로 찬양이라도 하고싶은 심정으로 이렇게 노래하게 된 것이다. 탁월한 노래는 대
개 탁월한 경험에서 울어나거나 비롯되는 법이다.
이런 시구의 노래는 때때로 또 자주 우리가 당하는 모종의 시련이나 시험 속에서의 주님에 대한 의
뢰와 찬양 같은 것으로 저절로 나타나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신앙세계 속에서는 이것이 항상 가능
하다. 모진 시험과 이해할 수 없는 시련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면서도 하나님께 감사를 돌리고 찬
양을 하게되는 것은 다윗과 같은 신앙 심기가 굳이 있어서 그러는 것이리라. 하늘에 이르면 모두 다
밝고 선명하게 밝혀지고 알게 되어지리라! 수많은 의문들까지라도 밝고 선명하게 밝혀지고 들어나
리라!
다윗은 시편의 다른 많은 곳에서도 주님을 의뢰하는 특수한 말법을 사용하는 예들을 찾아 볼 수 있
다.
'저희가 나의 재앙의 날에 내게 이르렀으나 여호와께서 나의 의지가 되셨도다'(시 18:18) '나를 넓
은 곳으로 인도하시고 나를 기뻐하심으로 인도하셨도다'(상동 18:19) 라고 경험의 노래를 노래했다.
'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의 소원을 이루시며 또 저희 부르짖음을 들으사 구원하시리로다'(시 145:
19)라고도 노래한다. 다윗은 이런 시련 속에서 이력이 날대로 이력이 났다. 다윗은 이런 시련 속에
서도 신뢰로 거듭나고 또 거듭났다.
오늘날도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런 시련의 경험의 노래를 통해 그리스도인의 흐리던 소망이 밝아
진다. 믿음이 다시 살아나고 소생한다. 마치 새 길을 걷는 것 같이 믿음에의 길을 다시 시작하기도
한다. 또한 이러한 축복들을 주신 데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깨달아 알게 되며 그 마음은 활기로
진작되고 활로를 얻는다.
둘째는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이 했다.
여기에서 양들이 목자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자기들을 지키기 위해 사용되고 때때로 무기로도 사
용되는 것을 익히 보아왔는데 '시편 23:4절에서는 바로 이같은 기능을 염두에 두고 이 단어를 사
용한 것이다. 어쩌면 다윗 자신이 능숙하고도 숙련된 방법으로 묘기처방처럼 이것들을 사용하지
않았던가. 지팡이는 떼를 지어서 목초지로 몰려드는 굶주린 짐승들을 격퇴하는 무기로 사용되었
다.'
마치 '나를 안위하는 것은 그것들(지팡이와 막대기)이다' 라고 말하는 것처럼 이 문장에서 그것들
이 강조되고 있다. 하찮은 것으로 보여지는가. 그러나 그 " '지팡이'와 "막대기'는 목자의 임재에
대한 상징으로 어떤 순간에라도 목자가 구조를 위해 준비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힘없고 방어력이 없는 양들은 그 완벽한 목자의 보호와 인도를 인해 얼마나 든든해 했으며 안정
해 했을까. 안위를 많이~ 느꼈을까. 감사와 찬양이란 저절로 나타난 일종의 분출일 수 밖에 없다.
한없이 그 선한 목자를 찬양하고 싶었을 그 정서엔 다윗의 영성과 감동이 물씬 스며있는 것을 우
리로 하여금 저절로 느끼고 짐작케 하기에 충분하다.
'그럼에도 시인은 계속 여호와의 선하심에 대한 이러한 증거들을 강조하고 또한 다른 비유를 사
용해서 그것들에 친절한 주인의 선한 모습을 추가한다.'
정작 그것들이 무엇일까? 다음 시간을 기다려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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