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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목자의 시'(시편 23:1-6):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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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3)

 

 

이 시를 읊어가노라면 그때 그 당시의 다윗의 그 음률이 떠오르고 선명하게 들려오는듯 합니다. 아,

아름답습니다.

이미 2절에서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라고 노래함으로

외형적인 양의 모습과 그 양의 평화로운 생황모습을 짙게 나타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정

황을 사람의 내면세계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러나 3절에서는 양은 그 양이지만 어디까지나 내면적으로 인간 삶의 주님에 대한 깊은 신앙학을

절묘하게 잘 묘사하고 있어서 2절과 3절의 다른 데가 뚜렸해집니다. 좀 더 어느 관문에서 어디로 깊

숙히 파고 들어가는 느낌을 던져 줍니다.

 

 

3절을 잘 살펴 보노라면 하나는 '내 영혼을 소생시킨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는 2가지 사실로 나타나 있습니다.

목자이신 하나님이 어쩔 수 없이 다윗에게 그리고 사람에게 주시는 영성생활의 실팍진 내면적인

2단계를 잘 나타내 보이는 것처럼 보여집니다.

오늘날 정작 주님의 양이 된 우리에게 2가지 사실이 우리 생애에 이루어지고 그 변화와 더불어 영

성생애가 이루어질 수만 있다면이야 얼마나 좋을까 싶습니다. 실로 흠모되어지지 않을 수 없습니

다. 

이것은 '푸른 초장'이라든지, '쉴만한 물가'와 같은 상태가 아닌 고차원지대입니다. 이것은 적어도

우리네 정신세계의 내면의 문제이며 내면세계의 영성생활에 대한 목적있는 삶의 추구를 담은 묘

사입니다. 아마도 다윗의 삶이 그때 목동으로부터 대왕의 시절에 이르기까지 그러했을 것이 분명

합니다. 다윗의 시인 시편의 다른 데에서도 이같이 함축된 뜻을 많이 엿볼 수 있습니다.

 

 

첫째,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입니다.

'영혼'이라는 히브리어의 이 말은 '네페쉬'로써 구약에는 755회, 시편에는 주로 다윗이 사용한 것으

로 144회가 사용되었습니다. '내페쉬'는 '나파쉬'라는 어근에서 나온 말인데 구약에서 3회만 나오는

단어로 '소생하다.', '기운을 차리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이 동사는 근본적으로 창조

당시 사람을  창조할 때 사용되었던 말인 '숨쉬다'라는 말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결국 '네페쉬'는 한 개인적 '나'를 알맞고 적절하게 숨쉬게 함을 지칭합니다. 이리하여 '내 영혼'이라

고 지칭할 때 내가 알고 내가 가지는 나의 생명인 '나'를 확인하면서 부르기에 적합한 말입니다. 따

라서 둘도 아닌 '나의 생명', 곧 여럿이 아닌 유득 '나'를 소생시킨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때때로 '내 영혼'을 주님께 맡기나이다'라고 말한다면 '나'를 마낀다는 말이지만 내 개인의 

생명에 친밀감이 있는 말이며 호소적인 말인 것입니다. 또 오늘날도 이렇게 부를 때 보다 더 신학

적인 의미에 대한 보다 깊이 있고 감칠맛이 나는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소생'한다는 말의 표현이 얼마나 소중한가 하는 것입니다. 거의 잃어지고 죽는

데 이른 생명이 다시 살아나고 원상으로 복귀할 때 '소생한다', '소생했다.'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다

시 원기가 복구되어지고 활발하게 되어졌다면 그 '소생'이란 한없이 값지겠고 우리가 영적인 생애

에서 주님께 늘 의탁하고 부르짖고 노래해야 할 기원이 아닌가 싶습니다. 다윗은 영적인 세계에서

먼저 그것을 바라보고 깊이 의식하는 믿음을 가젔던 것이 분명합니다.

 

 

둘째,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했습니다.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자기의 이로움을 위하고 상대방인 사람에게 그것

을 촉구하시는 분이십니까? 그래서 우리 더러 믿으라, 조건적으로 강요하는 것입니까?

얼핏 생각하면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알고 보면 이것은 한낱 오해입니다.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

님의 인도는 그 사람에게 보여주는 그의 품성의 계시인 것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호와의 이

름을 반포(출 33:19)하는 것은 자기를 위함이 아니요 사람을 위하여 사람의 요구에 따라 사람에게

자신의 품성을 현시하시고 알게 하려 함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복되게 하려 합니다. 그래서 알고

보면 하나님이 자기를 위함이란 온전히 사람을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목자이신 그의 음성

을 듣고 항상이라도 여호와 하나님을 흠모하고 따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하나님은 양이 된 사람들을 기대하며 '의의 길'로 인도하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다윗은

여기에서 목자와 양이라는 한계선상에서 '의의 길'이라는 어려운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도대체 그

가 몸소 체현한 '의의 길'이란 무엇에 대한 묘사일까 싶어지는 것입니다.

 

 

유대나라의 산곡이나 고지대이며 광야지대를 횡단할 때 올바른 길을 잘 찾아들지 못하면 큰 낭패

를 당하거나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어지는데 목자이신 하나님은 이런 쉽지 않는 길찾기와 안전한

인도를 언제라도 행하시고 바른 길로 인도하시는 선하시고 믿음직스러운 목자라는 사실입니다.

이 와디(wadi- 우기 외에는 강이 바짝 마른 강)의 고지대를 거슬러 횡단하는 길에 이러한 올바른 길

을 생각했을 때 다윗은 내면세계의 주요한 '의'를 생각했던 것이며 '의의 길'로 묘사하게 되어진 것

입니다. 이것은 분명 영감의 나타남이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으로부터 3000년전에 다윗이 받은 영감의 계시이지만 그리스도인이 가야 할 하늘 가

는 길이란 결국 '의의 길'이며 '의의 길'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 길은 하나님에게서만 나올 수

있고 나타날 수 있는 구원의 길인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이 '의의 길'은 많은 해석으로 나타납니

 

 

또한 '의의 길'에 대한 이러한 묘사도 있습니다. 양을 치는 유대의 산들은 많이는 옆으로 큰 밭고랑

처럼 많이~ 나있는 것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산에서 양을 치는 목자가 잠시라도 눈을 팔거

나 방관하게 되는 날이면 그 산 꼭대기에서 양을 해치려고 기회를 노리고 있는 사나운 짐승들은 이

기회를 틈타 위로부터 쏜살같이 아래로 달리면서 양들을 낚아챈다는 것입니다.

만일에라도 이 순간 양들이 위나 아래방향으로 달리게 되면 대부분의 양들은 잡혀죽거나 희생되어

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지 아니하고 밭고랑의 옆을 향해 재빨리 달리기만 한다면 무난히

쉽게 살아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귀의 전술전략도 알고 보면 하나의 단일한 공식이어서 결국 주님을 의지하고 기도에 의존하면

다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빼았지 못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의의 길'이시기 때문입

니다.

 

 

양을 치는 경험이 많았던 다윗에게는 바로 이 길은 사람에게 있어서 하늘 갈 수 있는 살 길, 곧 '의의

길', '생명의 길'로 보여젔음직 합니다. '의의 길'이 생명을 살리는 정도라면이야 그 길로 인도하는 여

호와의 길에 즐겨 순종하고 따를 필요가 있습니다.

다윗의 이 시는 실상 승리로 부르는 노래이며 시입니다. 다윗의 이런 시적인 노래며 신앙학이 얼마

나 훌륭하게 돋보이며 매력있어 보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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