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설교에서 배울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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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설교에서 배울 점
1. 새 교훈이 있으신 분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들어 가시자 말자 안식일이 되었습니다. '곧'(21절) 예수님은 회당으로 가셔서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교훈에 대한 반응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27절에 반응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1) 다 놀랐습니다.
놀랐다는 원어는 엑세플레쏜토(ejxeplhvssonto;놀라더라)라고 되어 있는 데, 이는 넋을 잃을 만큼 감동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놀라고만 것이 아니라 놀란 여운이 길게 남아 있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2) 서기관과 같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서기관들은 율법적인 교훈이었는데 예수님은 복음적인 것이었습니다. 서기관들은 사무적이어서 냉냉하였는데 예수님의 말씀은 영적인 것이어서 뜨거움이 있었습니다. 서기관들은 밑에 것들에 대하여 늘 말하였는데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천국적인 것이었습니다. 서기관들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전승을 가르쳤는데 예수님은 위로부터 내려오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서기관들은 중언부언하였는데 예수님은 핵심을 찌르는 교훈들이었습니다. 서기관들은 귀신을 내쫓지 못 하였는데 예수님은 귀신을 내쫓으시는 교훈이었습니다.
(3) 서로 물었습니다.
모두가 놀랐기에 서로가 서로에게 물었습니다. 도대체 저런 말씀이 어디서부터 주어진 것인지 몰랐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물었지만 대답을 주는 이는 한 명도 있을 수 없었습니다. 물음만 있지 대답은 없었습니다.
(4) 권세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귀신이 복종하는 권세를 그들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기 때문입니다. 귀신을 꾸짖는 자세가 권세가 있었습니다. 귀신을 향하여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라고 명령하시는 것이 권세가 있었습니다.
(5) 새 교훈이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무리들이 처음 들어보는 새 교훈이었습니다. 신선한 충격을 주는 교훈이었습니다. 이같이 예수님에게는 새로운 교훈이 있는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십니다. 그러니까 하늘나라 진리가 육신으로 되셨으니 새 교훈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백성들의 형편을 따라서 진리를 전하셨다. 가장 유력하고 단순한 말씀으로 사람들의 마음에 진리를 소개하셨으므로, 아무리 가난하고 무식한 자라도 주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가장 고상한 진리를 깨달을 수가 있었다. 누구든지 한 사람이라도 주의 말씀의 뜻을 알지 못하여 학자들에게 가서 물어 볼 필요가 없었다. 주님께서는 결코 깨닫기 어려운 추론(推論)이나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어려운 말씀을 하여 무식한 백성들을 괴롭게 한 일이 없으셨다. 세상이 일찌기 알지 못하였던 가장 크신 교사의 교훈은 가장 명확하고 단순하며 또한 실제적이었다. 복음 49
예수께서는 그들의 곤고함을 익히 아시는 분으로서 사람들을 그들의 처지에서 만나셨다. 예수께서는 진리를 가장 직접적이고도 단순한 방법으로 제시하심으로써 그 진리를 아름답게 하셨다. 그의 언어는 깨끗하고 세련되어 있었으며 흐르는 물처럼 맑았다. 람비들의 단조로운 어조의 말을 들어왔던 자들에게 예수의 음성은 마치 음악과같이 들렸다. 그러나 그의 가르침은 단순했지만 그는 권세 있는 자와같이 말씀하셨다. 이 특징이 예수의 가르침을 모든 다른 사람들의 가르침과 대조가 되게 하였다. 랍비들은 마치 성경의 말씀들이 한 가지 사물이나 혹은 그와는 꼭 반대의 사물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의심과 주저함으로 말하였다. 듣는 자들은 날마다 더욱 큰 불확실 가운데 쌓이게 되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성경을 의심할 여지가 없는 권위의 책으로 가르치셨다. 그가 제시하시는 문제가 어떤 것이든지간에 그의 말씀을 전혀 논박할 수가 없는 그런 권세로 그 문제가 제시되었다. 1소망 253
예수님 초림 당시와 이 시대를 한번쯤은 비교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어두움이 땅을 덮었고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웠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율례는 신속하게 생명없는 죽은 문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고하고 간간이 하나님의 작은 음성들이 들렸는데 이는 가장 경건한 성도들에 의해서 였습니다. -- 제사장들의 길고 복잡한 설명은 가장 분명하고 단순한 것들을 불분명하고 불완전하고 신비롭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경쟁관계에 있는 교파들간에 논쟁의 소리는 이해력을 어둡게 하였고 그들의 가르침을 진리의 올바른 논리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습니다. 리뷰 1895. 8. 6
예수님의 초림 당시의 형편을 나타낸 말씀이나 어쩌면 우리가 사는 현 시대를 그대로 그려 놓은 듯 합니다. 예수님의 설교는 참으로 단순하여 노인이건 어린아이든, 여자나, 남자나, 지식인이든 무식한 사람이든 잘 이해할 수 있는 알아들을 수 있는 이해하기 쉬운 말씀이 였습니다. 그 예를 들면
공중 나는 새를 보라!
들에 백합화를 보라! 하나님이 돌보시느니라.
내 하나님이 네 하나님이니라.
내 아버지가 네 아버지니라
이렇게 단순한 설명을 못 알아들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어린아이들로부터 노인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잘 알아들을 수 있는 극히 평범한 말씀으로 하늘의 대진리의 보화를 열어 보이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주위에는 많은 관중들이 늘 따라 다녔습니다.
연설을 잘하는 사람이란, 유식한 말로 문자를 써서 유식한 사람만 알아듣는 그런 말이 아니고, 어린아이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무식한 자나 유식한 자나 모두 골고루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한다고 하는 말을 들은 바 있습니다.
설교와 강의는 다른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강의(講義)에 대한 사전적 의미는 학문이나 기술의 일정한 내용을 체계적으로 설명하여 가르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강의는 설정된 주제에 대하여(about)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대상들에게 알려주는 행위입니다. 사실 강의실에서는 주어진 시간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을 들려주는 것 이상의 책임이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강의는 절대진리가 아닙니다. 강의하는 사람의 지식과 판단과 경험을 들려줄 뿐입니다. 자신의 주장에 필요한 자료들을 소개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합리화하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설교(說敎)는 그 성격과 내용이 강의와는 근본적으로 달리합니다. 설교는 인간의 말을 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절대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시간입니다. 백성들에게 필수적으로 먹여야 할 영의 양식을 공급해 주는 시간입니다. 이 영의 양식인 성경 말씀을 선포함에 있어서 그 회중들이 제대로 이해를 할 수 없는 경우 그 말씀의 뜻을 해석해 주고 그들의 생활 현장에 손쉽게 적용해줍니다. 설교자는 강의하는 사람과는 달리 선포된 말씀을 회중들이 잘 먹고 소화 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책임까지 갖게 됩니다. 말씀을 들은 성도들은 영적활력이 넘쳐나도록 되어야 합니다. 말씀은 선포되었으나 백성들에게 활력이 없다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강의는 말하는 사람이 주체가 되지만 설교는 말씀의 주인이신 성삼위 하나님이 주체가 되고 설교자는 그 운반자에 불과하다는 점이 구분되는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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