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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조는 왜 내야 하는가?(퍼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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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십일조를 많이 내면 큰 부자가 되고 잘 내지 않을 때는 가난하게 되는 것이 사실일까?

‘십일조를 3년 내고 부자가 안 되는 사람이 있는지 보라’고 부흥사들이 외쳤지만 십일조의 참 축복은 그것이 아니다. 우리 주위를 보면 십일조가 무엇인지 이름도 뜻도 모르면서 잘 사는 부자들이 십일조를 잘 내는 부자보다 더 많이 있다. 
안 믿는 자가 잘 살고 큰 부자가 된 경우는 어떻게 설명을 할 것인가?

  

이처럼 궁금한 것이 많지만 일부 믿음이 없는 자들은 교회에서 내라고 강요를 하니 어쩔 수 없이 내다가 시험에 드는 자들도 있다. 이처럼 물질 축복을 위해 주식을 투자하듯이 막연히 교회에 바친 다면 실망이 올 수가 있다. 
사실 교회의 중직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내게 되고 내더라도 기쁨이 없고, 내지 않으면 찜찜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눈치를 보면서 내는 수가 없지 않다.

  

은혜시대의 큰 사도인 베드로나 바울도 십일조는 강조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시 오시는 주님을 살아서 맞이할 자들은 반드시 십일조를 내야 한다.

십일조를 낸 자에게 밭의 황충을 금해 주시고 토지의 소산도 멸하지 않고 포도나무 열매도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였다. 
지금까지는 황충을 금해준다는 것을 농작물의 해충을 금하게 해 주는 것으로 믿어왔다. 황충은 “먹는 자”라는 의미로 사람의 생명을 해하고 재물을 약탈하는 무자비한 악당들을 말하며 마지막 때에 이 악한 자들로부터 내 가족의 생명과 재산의 피해를 막아주어 환난 날에 남게 하겠다고 약속된 것이 십일조의 큰 축복이다.


십일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려야 할 의무인 동시에 축복의 기초가 된다. 하나님께서는 온전한 십일조를 정해진 규례(規例)대로 바치면 황충을 금하여 주시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신 물질 중에 십분의 일은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손을 대지 말아야 한다. 이미 하나님의 몫으로 정해 놓은 것을 인간이 임의대로 사용하다가 실족하게 되면 큰 불행을 당하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온전한 십일조의 약속을 지키면서 말씀에 순종하는 자는 축복을 받게 되지만 만약에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면서 주의 뜻을 거역한다면 저주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십일조의 비밀과 감춰진 약속의 축복 도적질(카바)은 원어로 “훔치다. 속여 빼앗다. 약탈하다”라는 뜻이다. 주의 성도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살면서 하나님의 것을 훔치거나 속여 빼앗는 자는 스스로 저주를 자초(自招)하는 자가 된다. 이 땅의 모든 물질은 십일조와 관계되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는 이 땅에서 생활하는 동안 언제나 십일조 문제만은 수입에서 우선 순위에 올려놓아야 복을 받게 된다.


1 십일조의 기원

십일조의 역사는 아브람 때에 시작되었다. 기원전 2000년경 소돔 땅에 거하는 아브람의 조카 롯이 메소포다미아 원정군에게 재산을 다 빼앗기고 그의 식구들까지 포로로 잡혀간 일이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아브람은 자기 군대 318명을 이끌고 추격하여 적을 섬멸하고 롯의 식구와 재물을 도로 찾고 적의 노획물까지 빼앗아 돌아왔다. 아브람이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올 때에 멜기세덱이 아브람을 영접하면서 그에게 축복을 빌었고 아브람은 전쟁에서 노획한 재물의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드렸다. 멜기세덱은 살렘 왕인 동시에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하였다(창 14:11-20).


그 다음에는 야곱이 장자의 축복권을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몰래 받아낸 다음 형의 낯을 피하여 하란 땅으로 황급히 도망가게 되었다. 가는 도중에 벧엘 광야에 이르렀을 때에 해가 저물어 홀로 돌 베게 하고 누워 자다가 그 곳에서 하나님을 만나 축복의 약속을 받고 그 다음날 아침에 돌기둥을 세운 제단 아래에서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약속하였다(창 28:10-22). 그 때에는 십일조에 대하여 정해진 법이나 자세한 설명은 없었다. 다만 스스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표현으로 자원하여 드렸던 것이다.


그 이후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출애굽 역사를 진행하시면서 십일조 문제를 강력하게 법으로 정하였다. 레위기 27장 30절에 보면 이 땅에 나는 모든 곡식이나 나무에 과실뿐 아니라 짐승까지도 십분의 일은 여호와의 것이라고 하면서 이것들은 여호와의 성물(聖物)이 된다고 하였고, 그 십일조는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주어 관리하게 하였다(민 18:21).


이러한 십일조는 광야에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을 찾아갈 때에 법으로 세운 계명이지만 신약시대에도 이 법을 계속 적용(適用)하게 한 이유와 목적이 무엇일까?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십일조 문제는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하여 이제 바른 대답을 명쾌하게 해 주어야 한다.


2 십일조는 왜 내야 하는가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盜賊)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十一條)와 헌물(獻物)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詛呪)를 받았느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糧食)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황충(蝗虫)을 금(禁)하여 너희 토지 소산(所産)을 멸(滅)하지 않게 하며 너희 밭에 포도나무의 과실로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말 3:8-11).


지금까지 우리는 십일조에 대하여 뚜렷하게 정의(定義)를 내리지도 못하면서 복 받고 잘 된다고 하니 하나님께 드리며 살아왔다. 구원은 예수의 피와 관계를 맺고 축복은 십일조와 관계를 맺으면 되는 줄로 믿고 지내다 보니 성경 따로 생활 따로 살아온 것이 사실이다. 그저 십자가 안에서 평안한 마음으로 주님을 믿기만 하면 되는 줄로 알고 살아왔지만 이제는 성경 말씀 안에서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통하여 구원과 축복을 찾지 못하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예물은 별 의미가 없다. 
성경 말씀을 보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한 구절이나(행 2:21, 롬 10:13),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고 구절을 보면 예수를 믿기만 하면 아무 조건 없이 구원을 얻는 줄 알았는데, 왜 또 안식일을 꼭 지켜야 하며 온전한 십일조를 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아 놓았을까?

예수를 믿는 즉시 구원을 얻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는다고 했는데 왜 십일조를 내야 하는가? 또 그 십일조는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인가? 금전 문제는 신앙인이 믿음으로 보지 않으면 종교단체나 기관을 운영하기 위하여 만든 제도로 생각하기 쉽다. 불신자들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헌금이나 십일조 문제를 구원과 축복 문제에 결부시킨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재물은 아주 민감한 문제인데 종교인들에게 법으로 정한다는 것은 오해받을 수도 있고 거부 반응을 일으킬 수도 있는 사항이다. 
과거 육적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향해 갈 때에 세운 법을 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로 구속받은 오늘날의 사람들까지 계속 지켜야만 하는가? 
지금까지는 안식일 문제나 십일조의 깊은 뜻은 몰라도 예수 십자가의 피를 믿으면 육은 죽어도 그 영혼은 구원을 얻게 되므로 천당은 확실하게 갈 수 있었다.

우편 강도는 신앙생활은 말할 것도 없고 안식일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고 십일조도 내지 않았으며 내는 것 자체도 몰랐던 것 같은데, 구원을 얻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오늘의 성도들은 십일조를 어떠한 뜻에서 내고 있으며 구원과 십일조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십일조는 의무적(義務的)으로 내야만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자들도 있고, 또 예수 믿고 십일조를 내면 큰 복을 준다고 하기 때문에 축복에 기대를 걸고 내는 자들도 많이 있다. 일부 믿음이 없는 자들은 교회에서 내라고 강요를 하니 어쩔 수 없이 내다가 시험에 드는 자들도 많이 있다. 십일조의 중요성과 헌금에 대한 바른 뜻을 모르고 바치다 보니 여러 가지 부작용(不作用)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과연 십일조를 많이 내면 큰 부자가 되고 십일조를 내지 않을 때는 가난하게 되는 것이 사실일까?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린다고 하지만 그 목적을 뚜렷이 모르고 내면 액수가 많든 적든 간에 부담이 될 수가 있다. 말씀대로 산다고 하면서도 바쁜 삶에 좇기다 보면 십일조를 내야 한다는 생각은 하였으나 잊어버릴 때도 있고, 믿음이 약해질 때는 꼭 내야만 하는가 하는 의심이 생기게 된다. 물질 축복을 위해 주식을 투자하듯이 막연(漠然)히 교회에 바친다면 실망이 올 수가 있다. 
우리 주위를 살펴보면 십일조가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하고 그 이름이나 뜻도 모르고 잘 사는 부자들이 십일조를 잘 내는 부자보다 더 많이 있다.  

십일조를 바치는 문제에 있어서 궁금한 것이 많이 있지만 안 낼 수도 없다. 사실 교회에서 중직(重職)을 맡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내게 되고, 내더라도 기쁨이 없고 내지 않으면 찜찜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눈치를 보면서 내는 수가 없지 않다. 십일조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라면 구체적인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만약 하나님의 백성 된 자들이 고향(천국)을 향해 갈 때에 지켜야 할 법이라면 확실하게 알고 지킬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말씀의 뜻도 모르고 순종하는 것보다 근본 뜻을 깨닫게 될 때는 오히려 부담 없이 감사한 마음으로 드릴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제는 막연한 십일조를 내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신약성경에는 십일조를 내라고 강조한 구절이 없다. 마태복음 23장 23절에 의하면 예수님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책망하면서 “너희가 박하(薄荷)와 회향(茴香)과 근채(芹菜)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義)와 인(仁)과 신(信)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고 한 구절이 있다. 
주님은 십일조도 내고 의와 인과 신도 버리지 말라고 하시면서 외식(外飾)하는 자들을 책망하셨다. 은혜시대의 큰 사도인 베드로나 바울도 십일조를 강조하지 않았다. 
십자가 복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과 죄를 용서 받고 죽으면 천당 가는 구원을 전하는 일에 목적을 두었기 때문에 십일조를 크게 논(論)하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이나 연보에 대해서는 심는 대로 복을 거둔다고 말씀하였다(고후 9:5-11).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 중에는 연보하는 것이 복을 심는 것이라고 했다. 복(헌금)을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두고 적게 심으면 적게 거두며(고후 9:6), 만약에 심지 않는다면 거두지 못한다는 말이다. 
연보를 “복(eu;logi;a 율로기아)”이라고 했는데 그 의미는 ‘축복, 찬양’이라는 뜻이다. 즉 하나님께 드리는 연보는 자신에게 축복을 심고 나중에는 그 복을 거두는 즐거움으로 감사와 찬양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복을 억지나 인색(吝嗇)함으로 하지 말라고 부탁까지 하였다. 
우리가 예수를 알기도 전에 그 분은 우리를 아시고 자녀로 선택하셨고, 또 모든 죄까지 담당하시고 대신 죽으셨는데, 그 은혜는 무엇으로도 보답할 수가 없고 어떤 사랑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아무 조건없이 구원을 베풀어 주신 주님께서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죄인의 중보자(中保者)로 우리를 위해 간구하고 계시는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된다. 그뿐 아니라 형편과 사정을 먼저 아시고 때를 따라 도와주신 축복이 너무 고마워서 주일성수(主日聖守)을 하면서 감사 헌금하고 약속된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 성도의 기본 의무(義務)인 것이다. 
특히 십일조 문제는 환난과 관계가 되어 있고 그 나라에 들어가는 축복과 연관을 지어 놓았기 때문에 오늘 이 시대의 성도들은 약속하신 이 법을 엄격하게 준수(遵守)해야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순종을 하다 보면 주님께서 또 은혜를 주시고 이 땅에서도 복을 받게 된다. 
다시 오실 주님을 사모하면서 기다리는 자들은 필수적(必須的)으로 내야 하는 것이 십일조이다. 이 문제에 걸려서 주님을 맞이하는 일에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된다. 항간에 십일조를 3년 내고 부자가 안 되는 사람이 있는지 보라고 부흥사들이 외쳤지만 십일조의 참축복은 그런 것이 아니다. 
성경을 정확히 알지 못했기 때문에 십일조를 내면 부자가 된다고 하는 말을 의심없이 믿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안 믿는 자가 잘 살고 큰 부자가 된 경우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마지막 때에 육체가 구원받는 축복 앞에서 십일조를 내는 이유나 참뜻을 근본적으로 바로 알고 정확히 드려야 한다. 말씀에 따라 잘 순종하고 믿음이 있어도 십일조 문제에 걸리면 육체 구원은 바랄 수 없다.


 3 황충이란 무엇인가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황충(蝗虫)을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멸하지 않게 하며 너희 밭에 포도나무의 과실로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말 3:11).
십일조를 낸 자에게 황충을 금해 주시고 토지의 소산도 멸하지 않게 하고 포도나무의 열매도 기한 전에 안 떨어지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였다. 이 말씀을 어떻게 보아야 하며 또 황충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우리는 지금까지 십일조와 황충의 관계를 단순히 농작물에 피해를 주는 해충(害蟲)을 막아주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십일조를 잘 내면 황충을 금하여 토지의 소산(所産)을 멸하지 않게 하겠다는 말씀은 농작물에 해충을 금하게 해주는 것으로 지금까지 믿어 왔다. 그러나 그 뜻은 벌레가 곡식을 안 먹게 해 주겠다는 뜻이 아니었다. 사실 무공해(無公害) 식품을 먹을 수 있다면 하나님께 10의 2조, 3조를 드려도 아깝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10의 5조를 드린다고 해도 벌레는 없어지지 않는다. 십일조는 벌레를 없이 하는 살충제 효과를 내기 위하여 드리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또 어떤 성도들은 온전한 십일조를 내면 꼭 부자가 될 줄 믿고 하나님께 드린다고 하는데, 십일조를 드려도 부자가 되는 사람이 있고 부자가 안 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십일조는 부자가 되어도 드려야 하고 부자가 되지 않아도 드려야 한다. 물질의 축복을 위해 십일조를 낸다는 것은 근본 뜻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 
이제 본문으로 돌아가서 말씀 안에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뜻을 알아보기로 하겠다.  
황충은 “아칼(lkea')”이라는 단어이다. 동사일 때는 ‘먹다’, ‘삼키다’, ‘소화하다’, ‘태우다’, ‘소멸되다’는 뜻이며 명사로 쓰일 때는‘먹는 자’, ‘삼키는 자’라는 뜻이다. 황충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구절을 살펴보면 참뜻을 알 수가 있을 것이다(참조. 황충에 대한 도표). 

“가라사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lkea'아칼)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lkea'아칼)느냐”(창 3:11).
“저희가 야곱을 삼키고(lkea'아칼) 그 거처를 황폐케 함이니이다”(시 79:7).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일어나 벌할 날까지 너희는 나를 기다리라 내가 뜻을 정하고 나의 분한(忿限)과 모든 진노를 쏟으려고 나라들을 소집하며 열국을 모으리라 온 땅이 나의 질투의 불에 소멸(lkea'아칼)되리라”(습 3:8).
이 말씀 속에서 황충을 의미하는 “아칼(lkea')”이라는 단어는 벌레가 아니라 재물을 ‘먹는 자들(삼키는 자들)’, ‘없이 하는 자들’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사람의 생명을 해하고 재물을 약탈하는 무자비한 악당들을 황충이라고 말한다. 

이 같은 사람 황충이 일어나서 사회와 가정을 파괴할 때에 나와 내 가족을 해하지 못하게 하며, 내 재산까지 약탈하지 못하도록 막아 주겠다고 약속된 것이 십일조이다. 하나님과 주의 자녀들 사이에 약속된 법의 참뜻을 모르고 육신적인 농작물 피해를 막아 준다고 했다면 위증(僞證)을 한 것이 된다. 주님께서는 부자 청년이 영생을 물었을 때에 답변하시는 중에 거짓 증거하지 말라고 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보아야 한다. 인간 관계에 있어서도 거짓 증거는 안 되지만 주의 종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바로 가르치지 못했다면 거짓 증거가 되고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본인이 져야 한다. 
우리가 듣고 배운 대로 십일조를 내면 황충(벌레)이 안 생긴다고 성도들에게 가르쳐 온 것이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지금부터라도 성경에서 말하는 황충을 자세히 살펴서 말씀 증거에 스스로 실수가 없기를 바란다. 

남의 돈을 빼앗기 위하여 사람의 생명을 경시하며, 생매장하거나 무자비하게 죽이는 인간 황충들인 막가파나 지존파같이 악랄한 자들 때문에 밤에 출입하는 것이 더욱 위험한 세상이 되었다. 
마지막 때에 나타나게 될 인간 황충은 지금 이 시대 악당들보다 더 무섭고 잔인한 행동을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보호가 없으면 피할 수가 없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누가복음 21장 18절에 아무리 악한 자들이 나타나더라도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傷)치 않도록 하겠다고 말씀하셨으니 그 말씀대로 하나님의 보호가 있는 자가 되어야 한다. 
악한 세상에 살다가 순교자로 예정되었다면 원수의 피해를 받아 육의 몸은 죽더라도 그 영혼은 아버지의 손에 맡겼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이 때는 자기 생명이나 가족과 재산도 다 포기된 상태이다. 

그러나 앞으로 다가올 환난 날에 이 육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주님을 맞이하려면 그 시간까지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생명과 재산은 아무 피해를 받지 않고 보호를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인간과의 십일조 언약을 문서로 기록해 놓고 환난 날을 위한 예물(禮物)을 드리도록 했다. 앞으로 악한 자들이 벌떼같이 일어난다고 해도 온전한 십일조를 낸 자들에게는 자신의 생명과 재산, 그리고 가족과 자식들까지 환난 날에 지켜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십일조는 환난 날에 자기 생명과 직결되기 때문에 아예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처음부터 손대지 말아야 한다. 이같은 약속의 말씀을 깨닫게 되면 십일조는 안 낼 수가 없고 낼 때도 감사하고 인색한 마음이 들지 않게 된다. 

 만약 농부가 밭에 씨를 뿌릴 때 곡식이 아까워서 파종을 못한다면 추수 때에 큰 흉년을 피할 길이 없을 것이다. 
신원(환난)의 때는 사회가 악해지고 민심이 극도로 예민해지는 시대이기 때문에 은혜시대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지금까지는 단순히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是認)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영혼 구원을 얻는 것만으로도 만족하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세상 끝날이 되어 영광의 주님이 오실 때에 약속된 구원과 축복을 바라본다면 십일조의 법을 잘 지키도록 하는 신앙을 생활화해야 한다. 
성도들 중에는 하나님을 잘 섬기고 십일조를 내며 물질 축복을 많이 받은 성도들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자들도 많다. 그러나 십일조만은 빈부를 논하지 말고 많든 적든 자기의 수입에서 십분의 일은 하나님께 드려야만이 하나님과의 계약이 성립된다. 
물질의 축복을 많이 받은 자는 하나님께 더 충성하고 섬기도록 주신 줄 알고 열심히 봉사와 충성을 해야 한다. 내게 주신 물질을 내 것으로 알면 착각이다. 하나님께서 일을 잘 하라고 맡겨 놓은 것뿐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십일조의 진가(眞價)는 마지막 때 무서운 악당들이 일어나서 인간들을 괴롭힐 때에 하나님이 이들을 다 막아 주실 때에야 몸으로 느끼게 될 것이다. 앞으로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가 없으면 연약한 육체는 견딜 수 없기 때문에 환난을 피하는 방법과 육체 구원에 대해서 자세히 알려 주신 것이다.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예배를 드리는 자에게 마지막 큰 축복을 가족과 함께 받을 수 있도록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면 안 된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계약된 예물은 다가올 환난 앞에 약속된 법이기 때문에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드리는 헌금이 되어야 한다. 이 땅에서 수많은 인생이 쓰러지는 재앙이 올 때에 약속을 지킨 자에게는 하나님께서도 환난을 이길 수 있도록 책임을 지겠다는 것이다. 
이 큰 구원을 약속받은 자는 하나님의 특별 간섭을 받음으로 놀라운 은총을 입게 되어 전 인류가 전멸되는 불심판이 올 때에 보호를 받게 된다. 
시편 91편 7절에 보면 “천인(千人)이 네 곁에서, 만인(萬人)이 네 우편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못하리로다”라고 하였고, 9절에서 10절에 보면 이들은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고 지존자(至尊者)로 거처를 삼았기 때문에 화가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장막 근처에 오지 못한다고 하였다. 이 얼마나 맘이 든든한가! 이 축복은 아무 때나, 아무에게나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참뜻을 깨닫고 그 뜻에 따라 불평없이 십일조를 약속대로 바르게 내는 자들에게만 마지막 때에 보상해 주시겠다고 하셨으며 그들에게는 가족과 함께 육체 구원을 허락하시는 것이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23절에 “너희 온 영(pneu'ma푸뉴마)과 혼(yuch;푸수케)과 몸(sw'ma소마)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고 했다. 

죽을 육체는 썩어지기 때문에 무익(無益)하다고 했지만 마지막 때 말씀의 법을 지키며 살아온 자들은 몸까지 영생의 축복을 받기 때문에 귀하게 보전해야 한다. 그러므로 자신의 육체를 죄의 병기(兵器)로 만들지 말고 흠이 없도록 잘 보관했다가 주님 나라에 들어가야 한다. 이같은 종들은 천사도 흠모(欽慕)한다고 했다. 그 이유는 천사는 몸이 없지만 우리는 몸을 가진 변화체 성도가 되기 때문이다. 
빌립보서 3장 21절에도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形體)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고 했으니 놀라운 역사요 상상할 수 없는 축복인 것이다.
“낮은 몸”이란 말은 비천하고 멸시받는 자를 뜻한다. 주님께서는 힘 없는 “무리(오크로스)”를 사랑하셨고 불쌍히 여기셨다(마 15:30-39). 
또 “변케 한다(메타스케마티세이)”는 말은 고쳐서 다시 만든다는 말이다. 썩을 육체, 가치 없는 몸을 그분이 다시 신창조(新創造)하여 그리스도의 형체와 같이 되게 하겠다는 말씀이다


4 황충들의 역사와 보호

“저가 무저갱(無底坑)을 여니 그 구멍에서 큰 풀무의 연기 같은 연기가 올라오매 해와 공기가 그 구멍의 연기(진리의 암흑)로 인하여 어두워지며 또 황충이 연기 가운데로부터 땅위에 나오매 저희가 땅에 있는 전갈의 권세와 같은 권세를 받았더라 저희에게 이르시되 땅의 풀이나 푸른 것이나 각종 수목은 해(害)하지 말고 오직 이마에 하나님의 인(印) 맞지 아니한 사람들만 해하라 하시더라 그러나 그들을 죽이지는 못하게 하시고 다섯 달 동안 괴롭게만 하게 하시는데 그 괴롭게 함은 전갈이 사람을 쏠 때에 괴롭게 함과 같더라”(계 9:2-5).
무저갱의 구멍에서 연기가 올라오고 그 연기와 함께 황충이 땅위로 나온다고 했다. 연기 속에서 나오는 황충떼들이 정면으로 기독교에 박해(迫害)를 가하게 된다. 
이 앞부분에서 열쇠를 가진 별(지도자)이 땅에 떨어져 무저갱을 여니 황충이 연기 가운데서 무섭게 나타난다고 했다. “별이 땅에 떨어진다”고 할 때 그 별이 무슨 별인지 알아야 한다. 
만약 밤하늘에 떠 있는 별이라면 별이 무슨 열쇠를 가지고 나오겠는가? 이 별은 천체의 별이 아니라 그 시대의 지도자를 가리킨다. 여기에 나타난 황충 역시 벌레로 보면 안 된다. 기독교를 해(害)하는 인간 황충떼가 마귀의 사상을 가지고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이사야 33장 4절에 “황충의 모임같이 사람이 너희 노략물(擄掠物)을 모을 것이며 메뚜기의 뛰어오름 같이 그들이 그 위로 뛰어오르리라”고 했다. 많은 황충들의 떼가 푸른 초장에 날아앉음같이 악당들이 기습적으로 너희 재산과 생명을 빼앗아 가겠다는 것이다. 지금도 인간 황충들이 사람을 납치하고 죽이며 인간의 생명을 경시(輕視)하는 행동들을 하고 있다. 우리가 가히 짐작조차 못했던 무자비한 흉악범들이 일어날 때 하나님이 막아주지 않으면 인간으로는 피할 수가 없다. 황충을 벌레라고 잘못 생각했다가는 무서운 인간 황충떼가 덤벼들 때 피할 길이나 막을 방법이 없다. 
에스겔 9장 4절에서 6절에 보면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巡行)하여 그 가운데서 행하는 모든 가증(可憎)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標)하라 하면서 그 뒤를 따라 아껴보지도 말며 긍휼을 베풀지도 말고 쳐서 늙은 자(장로)와 젊은 자와 처녀와 어린아이와 부녀를 다 죽이되 이마에 표 있는 자에게는 가까이 말라 내 성소에서 시작하겠다고 하였다. 
황충이 나타나서 교회의 지도자로부터 믿는 성도들까지 잔인하게 학살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십일조의 언약을 지키며 이마에 인 맞은 자는 피해를 입지 않는다는 약속이 있다. 
다시 말해서 십일조는 살아서 주님을 맞이할 자의 의무이며 하나님과 인간과의 약속이다. 이것을 알았다면 누가 이 법을 어기며 안 지킬 자가 있겠는가? 열심히 노력하고 부지런히 수고하여 감사한 맘으로 즐겁게 드리게 될 것이다. 

이러한 뜻을 모를 때는 여러 가지 조건을 달고 핑계를 대며 십일조 내기를 꺼려하고 인색하게 된다. 심지어는 교회가 돈을 모아들이는 수단이나 방편으로 삼는다는 비난도 거리낌 없이 하여 입술로 판단하는 범죄를 저지르게 된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십일조의 약속을 지킨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도 인간 황충떼가 무섭게 일어날 때에 악한 황충들의 피해를 입지 않도록 막아 주시겠다는 약속도 실천하게 된다. 천지는 변해도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지기 때문에 십일조 문제를 놓고 하나님과 계약이 체결된 자들은 생명뿐 아니라 그에게 속한 재물까지 지켜주신다는 것을 믿고 실천해야 된다. 
예레미야 51장 13절과 14절에 “많은 물가에 거하여 재물이 많은 자여 네 탐남(貪婪)의 한정(限定), 네 결국(結局)이 이르렀도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자기로 맹세하시되 내가 진실로 사람을 황충같이 네게 가득히 하리니 그들이 너를 향하여 소리를 높이리라 하시도다”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물가라고 하는 말은 안전한 곳이 아니라는 표현이며 위험하고 불안한 세상을 말하는 것이다. 
황충들이 너희를 향하여 입을 벌린다고 했는데 모든 황충은 사람 황충, 즉 악한 사람을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위험한 세상에서 재물을 모아 놓았더라도 하나님께서 지켜주지 않으면 결국에는 황충떼가 덤벼들어 다 털어갈 뿐 아니라 생명까지 희생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십일조를 약속대로 정확히 드린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책임지고 지켜준다는 계약을 믿고 순종해야 한다. 
예레미야 51장 27절에도 연합군이 사나운 황충같이 바벨론을 칠 것을 말하고 있다. 지역적으로 일어나는 황충떼도 무섭다. 그러나 더 무서운 것은 국가적으로 홍수같이 황충떼가 밀려올 때 얼굴 빛이 하해지며 무릎이 서로 부딪치게 되는 두려움이라고 하였다. 
과거 우리 민족이 나라를 잃은 서러움 속에서 저질러진 일제의 탄압과 만행은 한국 역사에 길이 남을 일들이었다. 그 중에 한국 기독교인들의 신사참배(神祠參拜) 사건은 한국기독교 역사에서 잊을 수 없는 사건이다. 

수많은 성도들과 목사님들이 일본 우상 앞에 경배하지 않는다고 구타하고 폭행하여 경찰서마다 피바다가 되어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고 한다. 일본 경찰의 고문을 못 견디어 죽어간 순교자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앞으로 이보다 더 악한 악당들이 또 일어난다면 육체는 견딜 수가 없다. 
저자는 6·25 전쟁 때 북한 공산당이 동네에 들어와서 생명과 재산을 다 빼앗고 심지어 면(面) 공무원들과 유지들을 죽창(竹槍)으로 죽이는 사건과 가옥에 불까지 질러 버리는 무서운 일들을 직접 목격했다. 사탄의 충동을 받은 황충들의 잔인한 행동은 상상할 수가 없다. 십일조의 약속을 지킨 자는 이런 악당으로부터 막아주시겠다고 하시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마태복음 24장 21절에 마지막 환난은 창세 이후부터 지금까지 없었던 환난이라고 했다. 
다니엘서 12장 1절에는 개국 이래(開國以來)로 지금까지 없던 환난이 온다고 하니 얼마나 두려운 환난인지 모른다. 이러한 환난이 이 땅에 온다 해도 하나님과 약속이 되어 있는 자는 크신 보호가 있기 때문에 염려할 것이 없다. 지금까지 죽어서 천당 가는 것이 목적일 때는 십일조 문제를 크게 논(論)하지 않았으나 세상 끝날에 살아서 천국에 들어갈 자들은 십일조 약속만은 하나님 앞에 정확히 지켜야 한다. 


1) 이마에 인 맞은 종은 피해를 입지 않는다

계시록 7장 1절에 네 천사가 네 모퉁이에서 땅 사방의 전쟁의 바람을 붙잡아 땅에나 바다에나 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하더라고 했다. 무서운 환난의 바람이 불지 못하게 전쟁을 잠깐 멈추게 하겠다는 것이다. 각종 나무는 여러 민족과 모든 백성을 상징적(象徵的)으로 표현한 것이다(참고. 삿 9:8-15). 
계시록 7장 3절에는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印)치기까지라고 기한을 정해 놓았다. 이마에 하나님의 인을 친다고 했는데 이마에 인침을 받는다는 것은 어떤 도장을 이마에 찍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역사를 뜻하는 것인데 늦은 비 성령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 권세가 임하게 되므로 사탄의 세력을 굴복시키는 능력을 인의 역사라고 표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시대 시대마다 하나님과 의합(意合)된 종들을 불러 비밀을 알려주시고 역사하게 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종들이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각종 나무에 환난의 바람이 불지 못하게 한다는 것은, 잠깐 동안 전쟁을 억제(抑制)하고 평화를 주어서 그 틈에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는 역사를 하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종들에게 인친다는 것은 요엘서 2장 29절의 남종과 여종에게 내리는 늦은 비 성령의 역사를 말한다. 이 인은 예수를 처음 믿을 때 보증(保證)으로 우리 마음에 인치는 것과는 다르다(고후 1:21-22). 

이마에 인치는 역사는 그 시대의 선구자 된 종들에게 늦은 비 성령의 권세를 주어 양떼를 찾아내는 일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비한 종들에게 말씀 권세를 주어서 거짓 선지자의 손에 잡혀 있는 양들을 다 찾아내고 그들에게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주며 모세와 엘리야와 같은 역사를 하게 된다.
앞으로 큰 복을 받을 자는 이마에 하나님의 인을 받은 자로서 마지막 추수꾼의 종이 되어 양떼를 살리는 일을 하는 것이다. 교회가 어두워지고 세상은 극도로 혼란해질 때 악한 인간 황충 떼가 쉴 새 없이 나타나서 더욱 극성을 부릴 것이며, 전 삼년 반 말기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나서 인 맞지 아니한 성도들을 괴롭히게 된다(계 9:5). 
하나님은 천지 창조 때부터 인생들에게 엿세 동안에는 힘써 일하라고 주 6일 근무제를 명령하였으나 인간들은 육의 즐거움을 위하여 주 5일 근무제를 실시하여 주말이 금요일이 되었다. 국가와 사회가 이런 추세로 흘러가고 모든 생산 기업체나 교육기관뿐 아니라 서비스 업체까지 이 법을 따르고 있을 때에 성도가 주일성수를 바르게 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쾌락과 향락의 물결 속에 경제의 지출은 더 많아지고 인심은 물질 앞에 노예가 될 때 황충떼는 그 사람들을 노리고 있으며 또 그냥두지 않을 것이다. 

주님의 나라에는 날도적이든 재물 도적이든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자가 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말라기서를 볼 때에 부분적인 구절에만 집착(執着)하지 말고 앞뒤 구절을 다 보면서 해석을 해야 한다. 
말라기 1장은 마지막 때에 교회가 세속화되어 빛을 잃게 되면 하나님을 향한 예배 의식은 인본주의로 변하고 신앙생활은 부패할 것을 말하고 있다. 교회가 말씀의 파숫꾼이 되지 못하고 타락의 길로 가면 준비 없는 성도들은 황충떼 앞에 피할 길이 없고 그들에게 삼킨 바 될 때에 빠져 나올 방법이 없다. 그래서 말라기 1장 10절에 의하면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가 되지 않으면 그 제사는 받지 않겠다고 하신 것이다. 
말라기 2장에는 지도자의 부패가 나온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도 않고 알지도 못하여 바로 가르치지 못하는 지도자는 더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3장은 평신도를 통해 재림의 역사를 하겠다는 말씀을 하면서 십일조 문제를 거론했다. 말라기 3장 8절에 황충떼의 피해를 입지 않고 천국에 들어갈 자들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주일을 지키지 않으면 날도적질하는 것이요, 십일조와 헌물을 안 내면 알(곡식) 도적질하는 것이다. 재물은 십일조가 되지만 주의 날은 칠일조가 되는 것이다. 주의 날인 칠일조나 재물의 십일조는 아예 내 것이 아니라고 하는 확고한 신념(信念)을 세워야 한다. 


2) 하나님의 집에 양식이 풍성해야 한다 

말라기 3장 10절에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라고 했다. 성전의 모형인 성막에는 지성소와 성소가 있는데, 성소에는 분향단과 등잔과 떡 상이 있다. 하나님의 집에는 떡이 있어야 한다. 즉 말씀의 양식이 있어야 한다. 주의 몸 된 교회인 우리는 이 시대의 말씀의 양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떡 - 주의 종은 때를 따라 나눠줄 수 있는 생명의 떡이 풍성해야 한다(마 24:45). 언제나 성도들이 와서 진리의 떡을 먹고 만족해야 된다. 양들이 진리의 양식이 없어 굶주려 병이 들게 하면 안 된다. 
   등잔(촛대) - 주의 종은 빛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말씀의 빛을 밝게 비추어 어두운 시대에 양들을 바른 길로 인도해야 하기 때문에 빛을 항상 밝혀야 한다(마 5:14). 어두운 미혹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나타나는 악한 자들의 손에서 양들을 보호하고 잘 지도해야 하기 때문이다. 
   분향단 - 주의 종은 기도의 능력이 있어야 한다. 기도 외에 다른 방패가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막 9:29)? 기도의 힘은 하나님의 뜻까지도 바꾸어 놓았다. 니느웨가 40일이면 멸망받기로 결정되었지만 왕과 국민이 식음을 전폐(全廢)하고 회개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뜻을 돌이키셨다(욘 3:10). 심지어 기도 중에는 짐승까지도 먹이를 중단했었다. 그리고 이사야 38장 1절에서 8절까지 보면 히스기야 왕은 죽을 병이 들었으나 하나님께 충성한 업적을 내어놓고 벽을 향하여 통곡할 때 눈물의 기도를 보시고 그 뜻을 돌이키셨다. 이같은 역사는 기도 외에 더 큰 힘이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말씀의 양식과 진리의 빛과 하나님께 대한 기도의 향은 교회가 꼭 갖추어야 할 3대 조건이다. 양들은 진리의 빛 속에서 생명의 떡을 얻고 기도의 능력을 얻게 되면 어떠한 미혹에도 이기고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다.


3) 합당하게 봉사해야 한다

이사야 55장 2절에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糧食) 아닌 것을 위하여 은(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聽從)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고 하였다. 
은(@s,k, 케세프)은 돈을 말한다. 돈을 달아서 낸다는 것은 십일조인데 십일조를 드리되 정성없이 아무 곳이나 아무렇게나 드리면 안 된다. 영혼의 양식이 되는 곳에 정성을 다하여 드려야 하는데 생명의 양식이 되지 못하는 데에 내는 십일조는 합당치 않으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도 않고 받으시지도 않으신다는 것이다. 
또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해 수고하느냐”라고 했는데, 배부르게 하는 것은 영의 만족한 양식으로 배부른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봉사를 해도 마지막에는 살리는 말씀이 있는 곳, 즉 시대의 양식이 되는 곳에서 봉사하지 않는 것은 주님께서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종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 영이 살아갈 수 있는 양식이 될 때에 온전한 십일조를 정성드려 내고 감사헌금이나 봉사와 충성도 아낌없이 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섬기는 교회에 말씀의 양식이 풍성하도록 온 성도는 기도하며 노력하여야 영혼의 양식을 만족하게 얻어 먹을 수 있다.
 

황충이란 단어가 들어 있는 중요한 구절

 왕 상 8:37

 (대하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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