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영혼에 관한 질문과 대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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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영혼에 관한 질문과 대답
1. 문 : 제단 아래 있는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하나님께 탄원하고 있습니까?
【답】"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계 6:9-10).
이 성경절은 순교한 사람들의 영혼이 하늘 제단 아래 모여 자기들을 핍박한 자들을 복수해 달라고 하나님께 탄원하는 것 같다. 이 성경절에 대한 이해는 요한계시록 6장의 문맥이 상징이냐 실제냐에 따라 결정된다. 바클레이, 델리취, 느웰 등 많은 주석가들이 하늘의 실제적 제단 밑에 무형체의 순교자들의 영혼들이 모여 있는 것으로 주장한다. 터툴리안도 "순교자의 영혼들은 제단 아래 편히 쉬면서 그들의 영광의 교제체가 완성되기까지 인내의 정신을 연마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는 10절의 영혼들의 탄원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지옥불로 갚아 주실 것이라고 하면서 그의 책 '구경거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방인의 구경거리가 되었던 성도들이 왕, 장관, 학자, 시인, 배우, 무희들이 불꽃 속에서 고통하고 있는 것을 구경하게 될 때, 얼마나 감격하고 웃고 즐거워하고 감탄하랴." 과연 순교자들의 영혼들이 하늘 제단 아래 모여서 하나님께 복수를 탄원하고 있을까? 그리고, 그 복수가 이루어질 때 통쾌하고 즐거워하고 감탄할 것인가?
이 성경절은 상징적이다. 요한계시록 6장은 일곱 인에 대한 것인데, 앞에 네 인이 떼어질 때 발생한 일들은 결코 실제적인 것이 아니다. 즉 실제적인 백마, 적마, 흑마, 청황색마가 등장했다고 믿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맥에 따라 다섯째 인을 뗄 때 발생한 것도 상징적인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것을 실제라고 믿는 사람들에게 렌스키는 "왜 순교자들의 영혼은 모두 특별한 공간에 배치되어야 하는가? 또 순교자들이 모두 제단 아래 모일 만한 규격이 있는가?"라고 반문한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순교자들의 영혼들이 하늘에 가서도 그의 박해자들을 잊지 못해서 하나님께 복수해 달라고 탄원하는가? 그것이 그리스도의 정신과 일치하는가?"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으면서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 7:60)라고 기도했다. 그가 죽은 후에 하늘 제단 밑에 가서는 "나의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라고 하겠는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늘에는 복수가 없다. 거기는 "여호와의 속량함을 얻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사 35:10)는 곳이다. 그러므로, 순교자들의 영혼이 실제적으로 하늘 제단 밑에 모여서 하나님께 탄원하는 것이 아니다.
이 말씀은 전체적으로 상징적인 의미를 띠고 있다. 우선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다는 것은 구약 성소 제도의 "제물의 피를 단 밑에 쏟"(출 29:12; 레 4:7)는 것에서 왔다. 번제물의 피를 단 앞에 전부 쏟는 것은 그 번제물의 생명을 하나님께 온전히 바쳤다는 뜻이다. 성소 제도에서 번제물의 피는 생명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레 17:11). 순교자들의 영혼이 제단 아래 있다는 뜻은 그들의 희생이 온전히 하나님께 드려졌다는 의미이다. 결국 "영혼"들의 외침도 실제적인 것이 아니다. "아우의 핏소리가…호소한다"(창 4:10), "삯이 소리 지른다"(약 5:4)는 표현처럼 의인화 된 것이다. 또한 "신원하여 달라"는 탄원에서 신원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강조점은 "어느 때까지", "그 수가 차기까지"에서 보듯이 그 "시기"에 있는 것이다. 그 시기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순교자들의 희생이 온전히 하나님께 드려졌으며, 그 순교의 행렬이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의해 일정 기간 더 계속된다는 뜻이다(교회지남, 1988. 12. 8-9 참조).
2. 문: 십자가에 달린 강도가 죽던 날에 낙원에 갔습니까?
【답】"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 23:43). 이 말씀은 사람이 죽는 그날에 즉시 낙원, 곧 하늘에 가는 것처럼 보인다.
문제의 핵심은 "오늘"이라는 부사의 위치에 있다. 우리말 성경대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면 그 "오늘"은 "있으리라"는 동사를 수식하게 되어 강도가 그날 예수님과 함께 낙원에 있게 된다는 뜻이 된다. 수많은 주석가들은 이것에 근거하여 인간 사후에 즉시 그 영혼이 낙원에서 기쁨을 얻게 된다고 하였다. 매튜 헨리도 "신앙이 깊었던 자들의 영혼은 육체의 짐을 벗은 후에 즉시 기쁨과 행복 안에 거하게 된다"라고 하였다. 예수님은 결코 이러한 사상을 말씀하지 않으셨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시기 하루 전에 그의 제자들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2-4)고 말씀하셨다. 주께서 제자들에게는 재림 때에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시고, 강도에게는 죽은 즉시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시는 분이신가? 결코 그렇지 않다. 성경의 일관된 가르침은 주의 재림 때 상급을 주시는 것이다.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으리라."(마 16:27, 25:31; 고전 15:20-23, 살전 4:16).
예수님은 일요일 아침 부활 때까지 낙원, 즉 아버지가 계신 하늘에 올라가지 않았다. 부활한 예수님을 마리아가 만지려고 했을 때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요 20:17)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이 성경절의 문제의 핵심은 "오늘"이라는 부사의 위치에 있다. 이 성경절을 헬라어 원어 순으로 우리말로 풀어서 쓰면 다음과 같다. "진실로 네게 말하노니 오늘 함께 나와 있으리라 낙원에." 이 문장에서 구두점을 오늘 뒤에 찍게 되면, "진실로 네게 오늘 말하노니,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가 되고, 구두점을 오늘 앞에 찍게 되면 "진실로 네게 말하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가 된다. 그러면 헬라어 원어 성경에는 구두점이 어디에 있는가? 헬라어 원어 사본에는 구두점이 없다. 구두점은 후대에 첨가한 것이다.
이 말씀의 바른 해석은 "진실로 오늘 네게 이르노니,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이다(상동).
3. 문: 영, 혼, 몸은 과연 무엇입니까?
【답】"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 5:23). 이것은 히브리 4장 12절과 함께 인성 삼분론 자들이 인용하는 주요 성경절이다. 사람이 세 부분으로 구성되었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인용하는 성경절이다.
그것에 대하여 본교회 성경주석은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말하려는 것이 아니요 생애의 모든 부분이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라고 전제한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이분론적 입장을 지지한 후에 "영"과 "혼"의 차이점을 설명하고 있다. 즉 "영(퓨뉴마 - Spirit)"은 "사상과 생각"(눅 8:55)이 작용하는 곳이며, "혼(푸쉬케 - Soul)"은 "본능과 감정"이 작용하는 곳(마 10:28)으로 구분한다. 영과 혼은 다른 두 개가 아니라 한 비물질적 실체가 기능상 다른 관계를 맺는 것이다. 인간 본성에 있어서 비물질적 요소와 물질적 요소라는 이분론을 유지하면서도 또한 세 낱말의 차이를 유지할 수 있다. 이러한 이해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가장 휼륭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또 다른 견해는 찰스 메이슨(Charles Mason)이 "온 영"을 전인(全人)으로 해석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성경절의 의미는 "너희 전인, 곧 너희 혼과 몸이" 된다. 이것은 성경 전체 사상과 조화를 이룬다.
결론적으로 이 성경절의 의도는 재림 때까지 전인을 거룩하게 보존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인간의 구성 요소들을 구분하려는 것은 본 의도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본 성경절을 전인주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 전체 성경 사상과 조화되는 것이다(교회지남. 1988. 12. 10 참조).
4. 문 : 부자와 거지 나사로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사실적인 묘사입니까?
【답】"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가로되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눅 16:19-31).
이 성경 말씀은 예수께서 당시 유대인들에게 주신 비유이다. 예수께서 비유를 많이 쓰셨는데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셨다"(마 13:34)고 하실 정도였다. 비유란 어떤 사물을 논할 때 다른 사물과 비교해서 가르치는 것이다. 천국이나 영적 사물을 지상의 물질적인 사물들을 들어 비교하여 가르침으로서 이해를 돕는 것이다. 사람들의 영적인 안목이 어두워 영적인 사물들을 분별할 수 없기 때문이다(마 13:13-15). 비유로 가르칠 때는 상당한 효과가 있다. 비유는 상당한 진리성이 있으나 그 비유 자체는 진리가 아니다. 비유를 해석할 때 그것을 교리의 기초로 삼아서는 안된다. 새로운 진리를 가르치기 위함이 아니요 이미 주어진 말씀을 영속적인 이해로 이끌려는 것이 목적이다. 특이한 목적의 비유는 한번에 다양한 진리를 특별한 장소와 환경의 청중들에게 전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같은 비유라도 장소와 환경과 청중에 따라 다른 의미로 해석되거나 곡해될 가능성이 적지 않다. 비유 자체에는 진리도 교리와 연관성이 없고 다만 교훈만 있는 것이다.
혹자는 이 이야기가 사후의 상태를 묘사한 실제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만약 이 이야기가 실제적인 것이라면 거기에 표현된 모든 사실에 모순이 없어야 한다. 그 내용들을 분석해 본다.
1) 사후의 즉각적인 보상
이 이야기에서 거지 "나사로"와 "부자"는 죽은 즉시 심판을 받아서 각각 상급을 받은 것으로 표현되었다. 성경은 사람이 죽자 즉시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요 심판은 세상 끝에 있다(마 13:39-43; 요 12:48; 행 17:31, 24:25; 벧후 2:4, 9, 3:7; 유 1:6)고 말한다. 이 이야기에서 즉시 낙원과 음부에 갔으니 성경의 진리와 모순된다. 그러므로 사실이 아닌 비유이다.
2) 낙원과 음부와의 거리
낙원과 음부 사이의 거리가 "큰 구렁"을 사이에 두고 있을 만큼 너무 가깝다는 것이다. 만약 천국과 지옥이 이렇게 가까워 지옥불에 타는 모습을 볼 수 있다면 그 곳이 천국이라 할 수 있을까? 새 하늘과 새 땅에는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계 21:4)다고 하였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사 65:17)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다.
3) 마귀가 없는 지옥불의 심판
부자가 음부의 고통에서 신음하면서 세상에 살고 있는 다섯 형제들이 회개하여 음부로 오지 않게 해 주기를 간청하였다. 성경은 지옥불에 죄의 장본인인 마귀가 악인과 함께 불의 심판을 받고 소멸된다고 하였다.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계 20:10). 부자를 범죄하도록 미혹한 마귀는 그의 다섯 형제들 가운데 지금도 역사하고 있다. 즉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엡 2:2)으로서 살아 있는데, 사단에게 미혹 당한 부자만 음부에서 심판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에 일치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비유이다.
4) 음부에 있는 부자의 육체
음부에 있는 부자의 모습, 즉 눈, 손, 혀에 대한 모습이 나온다. "영은 살과 뼈가 없다"(눅 24:39)고 하였는데, 이 이야기에서는 실제적인 몸이 있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만약 실제 사건이라면 죽은 자의 영혼에 무슨 살과 뼈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사실이 아닌 비유이다.
5) 구원과 소유의 관계
이 이야기에서 지옥은 단순히 부자란 이유 때문에 가고 천국은 거지라는 이유 때문에 갈 수 있는 곳인가? 현세에서 부유한 자는 내세에서 고통을 당하고, 현세에서 고난을 당한 자는 내세에서 큰 복을 받는가? 이것은 그 소유 때문에 정해진 결과가 아닌가? 구원은 소유로 결정되지 않고 믿음으로 결정된다.
6) 낙원과 아브라함의 품
거지 "나사로"는 천국이 아닌 "아브라함의 품"에 갔다. 아브라함의 품이 모든 거지들이 들어갈 만큼 그렇게 넓은가? 아브라함 이전에 죽은 사람들은 어디로 갔는가? 천국과 지옥에 나타난 몸, 혀, 눈, 손가락과 부활 때에 갖게 되는 영광의 몸과 어떻게 일치시킬 수 있는가? 천국과 지옥의 거리와, 또 부부가 갈라져 있듯이 가족 관계에서 일어나는 사실이라면 그 천국도 지옥이 아닐까?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사실이 아닌 비유이다.
7) 유대인들의 선민 사상
예수께서 이 이야기를 통해서 무슨 교훈을 주시고자 하셨을까? 이 비유는 당시 유대인들에게 특별한 교훈을 주기 위한 것이다. 선민 의식에 사로잡혔던 유대인들의 교만심을 지적한 것이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므로 모두 구원을 받는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주님은 유대인들의 잘못된 사상을 지적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눅 3:8, 9).
8) 재물과 구원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인들의 사상을 비판하신 것이다. 그들은 물질적인 부요함이 영적 부요함의 증거로서 하나님의 큰 복을 받은 것이라고 믿었다. 가난한 자들은 저주를 받았다고 믿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 앞에 부요나 가난함이 구원의 조건이 아님을 말씀하신 것이다.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눅 12:15). 내세의 구원은 현세의 믿음에 달려 있음을 가르치신 것이다.
9) 아브라함과 나사로
비유 가운데 특정인의 이름을 거론한 일이 없다. 이 이야기 가운데 아브라함과 나사로의 이름이 등장한다. 이것은 특별한 경우로써 당시 유대인들이 나사로를 부활시킨 사실을 보고도 그리스도를 믿지 않을 것을 책망하신 것이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믿는 대신 자신들의 이기심과 오류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살해할 것이며, 주께서 부활하신 것을 보고도 믿지 않을 것을 책망하신 것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진 자만이 구원을 얻는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것이다.
10) 당시의 민속 설화
이 비유의 출처는 당시 유대인들이 익히 알고 있던 이집트의 민속 설화였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살던 유대인들이 팔레스틴으로 옮긴 이야기인데 시-오시리스(Si-osiris)라는 사람이 사후에 지하 세계를 여행하는 이야기에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이집트 민속 설화가 유대판으로 변형되었다. 바르 마잔(Bar Majan)이라는 한 부자 세리와 한 가난한 서기관이 죽어 장사되었는데, 이 서기관의 친구가 꿈 가운데서 이 두 사람의 형편을 보았다는 것이다. 가난했던 서기관은 광활한 낙원을 거닐고 있었고 부자 세리는 냇가에서 있었는데 목이 말라 애쓰면서 물에 접근할 수가 없었다. 예수께서 당시 민화를 인용하여 유대인들의 죄악을 책망하신 것이다. 그들의 죄악을 은유적인 방법으로 지적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비유이지 사람의 사후의 상태를 묘사한 천국과 지옥이 아니다(신계훈, 어두움이 빛을 이기지 못하더라, 219, 220 참조).
5. 문 : 욥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뵙기를 원하였습니다. 육체 밖이란 무엇입니까?
【답】"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내가 친히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외인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조급하구나"(욥 19:25-27).
이 성경절은 사람의 사후에 영혼이 하나님을 보는 것으로 오해할 가능성이 있다. 본 성경절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육체 밖에서"의 "밖에서"의 의미이다. 그것은 히브리어 전치사 "민(min)"을 번역한 것인데 다양한 의미를 나타낸다. 영어 성경은 다음과 같이 번역하였다. 흠정역(KJV)은 "안에(in)", 개정역(RV)은 "…부터(from)", 미국 개정역(RSV)은 "…의 밖에(without)"라고 번역하였다.
구약에서 이 단어가 쓰여진 곳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출애굽기 19장 14절에서 "모세가 산에서 내려"왔다고 번역하였다. 출애굽기 2장 10절에서 "그가 그 이름을 모세라 하여 가로되 이는 내가 물에서 건져 내었음이라"고 번역하였다. 우리말 개역 성경은 여기서 "…에서"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우리말 성경처럼 "밖에서"라고 번역하여도 결코 영혼 불멸설을 주장할 수 없다. 욥은 극심한 시련 중에서도 구주를 바라보았다. 그는 부활의 아침에 영광스러운 몸으로 주님을 대면하기를 원하였다.
바울도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고전 15:50-53)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육체 밖에서의 표현은 사후에 주님을 보는 것이 아니고, 부활의 날에 불멸의 영화로운 몸으로 변화된 후에 주님을 만나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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