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죽은 자에 관한 질문과 대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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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죽은 자에 관한 질문과 대답
1. 문 : 죽은 자를 위한 침례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답】"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침례 받는 자들이 무엇하겠느냐 어찌하여 저희를 위하여 침례를 받느뇨"(고전 15:29). 이것은 바울의 서신 가운데 가장 난해한 성경절 중의 하나이다.
이 성경절의 문제가 되는 것은 "죽은 자를 위한 침례"이다. 이것을 사실로 받아들이면 큰 문제가 생긴다. 즉, 죽은 자를 위하여 대리 구원이 가능하고, 대리 속죄, 대리 침례의 공로를 누리게 된다. 이것을 근거로 소위 "대리 침례"(Vicarius Baptism)가 주후 2세기부터 마르씨온파(Marcionists), 케린트파(Cerinthist), 몬타누스파(Montanists)에 의해 거행되었다. 현재도 몰몬교도들은 여전히 이 의식을 행하고 있다.
신앙은 다른 사람이 대신해 줄 수 없다. "하나님께는 손자가 없다.”부모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고 해서, 자녀가 "할아버지"라고 부르지 않는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어야 한다. "아들은 아비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할 것이요 아비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하리니 의인의 의도 자기에게로 돌아 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겔 18:20). "비록 노아, 다니엘, 욥, 이 세 사람이 거기 있을지라도 그들은 자기의 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겔 14:14). 그러므로 죽은 자를 위해 대리 침례를 받음으로 영혼을 구원한다는 것은 이설(異說)이다.
그렇다면 이 성경절의 의미는 무엇인가? 본교회 성경주석의 세가지 해석 중에 두 견해를 통해서 살펴본다. 첫째, 바울은 당시에 행해지고 있던 이방인의 풍습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터툴리안, 에피파네스, 크리소스톰 같은 교부들은 마르시온 파들과 이교도들이 그와 같은 풍습을 행하고 있었음을 보고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뜻은 의식 자체를 찬성한 것이 아니요 이교도들도 부활의 소망을 소중히 하였거든, 하물며 우리일까 보냐! 이러한 해석은 이 대리 침례가 바울 당시에 있었다고 가정할 때 가능한 것이다. 둘째, 여기서 침례는 상징적으로 극심한 고난과 죽음을 의미한다(마 20:20; 눅 12:50). "침례 받는 자들"은 사도들이고(고전 4:9-13; 고후 1:8-10), "죽은 자들"은 숨진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부활이 없다면 어찌하여 사도들이 그들을 위해 고난과 죽음을 당했겠느냐의 의미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부활이 없다면 복음 전파도 믿음도(고전 15:14, 17)헛 것이라 했으므로, 사도들이 헛되게 고난과 죽음을 당했겠느냐의 뜻이다.
그러므로 이 성경절은 결코 대리 침례를 지지한 것이 아니다. 베드로는 오순절에 "너희가…각각…침례를 받"(행 2:38)으라고 했다. 주후 393년 "히포 종교회의"는 "대리 침례"를 금지시켰다. 죽은 자를 위한 침례는 그 당시 실제했던 이교도의 풍습이든지 아니면 그리스도를 위한 사도들의 고난을 뜻한다(교회지남, 1988. 9. 6-7 참조).
2. 문 : 죽은 자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답】"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처럼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 하려 함이니라"(벧전 4:6). 혹자는 이 성경절을 베드로전서 3장 18, 19절과 연결시켜 예수께서 무덤에 계신 3일 동안에 영으로 지옥에 있는 영혼들을 전도했다고 주장한다. 어거스틴, 씨릴, 루터, 에라스무스, 맥나아드, 클락 등 유수한 주석가들은 여기의 죽은 자를 영적으로 죽은 자 곧 불신자로 해석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문자적 진술이 상징적으로 바뀌었다는 문맥상 암시를 찾을 수 없다. 여기의 죽은 자는 실제적으로 죽은 자이다.
바클레이는 이것은 사후의 제2의 기회가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만약 그렇다면 "복음이 전파되었으니"(과거)라고만 하지 말고 "전파되니"(현재), "전파되리니"(미래)라고 써야 한다. 왜냐하면 죽은 자들은 베드로 당 시대와 그 이후에도 계속되기 때문이다. 여기 "전파되었으니"라는 말의 헬라어 원어는 "유앙겔리쌔"로써, "유앙겔리조마이"의 부정 과거 시제 형태이다. 헬라어의 부정 과거 시제란 과거에 완전히 끝나 현재는 전혀 없는 그런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모든 시대의 죽은 자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그렇다면 "지금 죽어 있는 사람에게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뜻이다. 베드로의 말은 그 당시 죽어 있던 사람들이 살아 있을 때에 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었었다는 뜻이다.
"육체로는 사람처럼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 하려 함이라"의 뜻은 '인생으로 심판을 받으나 불멸의 몸으로 하나님처럼 살게 하려 함이니라'는 뜻이다(상동).
3. 문 : 몸은 죽여도 영혼을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답】"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 10:28).
이 성경절은 몸은 죽을 수 있으나 영혼은 살아 있다는 뜻으로 이해할 가능성이 있다. 본 성경절의 의미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것이다. "몸은 죽여도 영혼을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은 핍박자들을 가리키고, "몸과 영혼을 능히 멸하시는 자"는 하나님을 가리킨다.
마태복음 10장은 12제자 파송에 대한 장이다. 주께서 12제자를 보내면서 각종 핍박을 열거하신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영혼"의 의미이다. 영혼의 헬라어 원어는 "푸쉬케"인데, 신약 성경에서 생명(마 2:20, 6:25), 영혼(마 10:28), 사람(행 7:14), 감정(막 14:34), 식욕(계 18:14), 마음(행 14:12) 등으로 번역되었다.
여기서 영혼(푸쉬케)은 물질적인 몸의 상대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부루스(Bruce)는 "박해자를 두려워 말고 유혹자를 두려워하라 그가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을 떠나게 할 것이라"고 하였다. 영혼은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믿음과 정신이 작용하는 곳이다. 또한 영혼 불멸을 믿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불멸하는 영혼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절 후반부에 "영혼"도 몸처럼 멸해지는 것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 영혼(푸쉬케)은 몸의 반대 개념으로 "정신과 마음"을 가리킨다. 벵겔(Bengel)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는 하나님 외에 아무것도 두려워 아니하고,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 외에 모든 것을 두려워한다"라고 하였다. 같은 내용의 말씀을 로마서 8장 38절에서 발견하게 된다. "내가 확신 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그러므로, 이 말은 몸은 죽여도 마음 혹은 정신을 죽이지 못하는 사람을 두려워 말고, 우리의 몸과 마음을 다 멸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뜻이다(교회지남, 1988. 10. 12-13 참조).
4. 문 :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신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 입니까?
【답】"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살전 4:14). 여기서 "자는 자들"은 죽은 자를 의미한다. 혹자는 예수께서 오실 때에 죽은 자들을 데리고 온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하면 죽은 자의 영혼을 데리고 온다는 뜻이 된다. 실제로 렌스키, 모리스, 헨드릭슨 등 많은 주석가들은 그런 식으로 해석하였다. 특별히, 모리스는 "우리는 이 성경절로 예수님의 강림(파루시아) 때, 하늘에 가 있던 영혼과 무덤 속에 있던 육신이 번갯불처럼 한 순간에 만나게 될 것을 안다"고 하였다.
본문이 말하는 것은 "영혼 불멸"이 아니라 "자는 자들"이라는 사실이다. 본문에는 영혼이란 말이 없다. "데리고 오시리라"는 말과 조화시키려고 덧붙인 것이다. 그러나, 이 말도 헬라어 원어를 직역하면 "인도하시리라"이다. 이 말의 원어 "악세"는 "인도한다"는 뜻인 "아고"의 미래 단수 3인칭 형이다. 우리말 번역대로 "데리고 온다"고 하면, 가있던 것을 데리고 온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본문의 뜻대로 "하나님께서 죽은 자들을 예수님과 함께 인도하실 것이다"라고 해석하면, 그 뜻은 하나님께서 죽은 자들을 그냥 내버려두지 아니할 것이라는 뜻이다.
바울은 16절에서 죽은 자들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무덤에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증거한다. 라이트푸트와 플라머 등의 주석가들은 하나님께서 죽은 자들을 영광으로 인도한다는 뜻이라고 해석하였다. 우리말 새번역 성경은 "그렇다면 예수 안에 잠든 사람들도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예수와 함께 일으키실 것입니다"라고 번역했다.
우리말 공동번역 성경은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믿다가 죽은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예수와 함께 생명의 나라로 데려가실 것을 믿습니다"라고 번역했다. 이러한 번역은 예수님의 부활시에 일어날 사건이 헤어져 있던 영혼과 육체의 만남을 거부하는 것이다.
만약 예수님의 강림시에 "하늘에서 내려온 영혼과 땅에서 일어난 육체가 번갯불처럼 만난다"고 하면, 참으로 문제가 많아진다. 사람의 사후에 영혼이 천국을 누렸다면 즉 이미 판결을 받았다면 무엇 때문에 재림시에 또 심판을 받아야 하는가? 땅에서 영혼 없는 몸이 일어난다면, 나인 줄도 모르는 나의 육체만이 일어난다는 말인가? 부활은 "없던 아담"을 만드신 창조가 아니라 "있던 사람"을 되살리는 재창조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하나님께서 죽은 자들을 "인도하시리라" 혹은 "데려가시리라"는 뜻이다(상동).
5. 문 :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답】"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니라"(고후 5:8). 이 성경절은 죽음으로 영혼이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것으로 표현한 것 같다. 핸드릭슨은 죽음은 무존재나 잠이 아니라, 현재의 삶보다 "더 좋은 것"이라고 하였다. 영혼이 몸을 떠나 행복을 누린다는 것은 영지주의나 헬라의 이원론 사상이다. 이러한 사상에 영향을 받은 유대인 철학자 필로는 "유한한 육체에 머물러 있는 동안은 사람의 영혼에 하나님과의 사귐이 없고 몸에서 풀려 나올 때 드디어 하나님의 영이 흘러 들어오는 것"이라고 죽음을 미화하였다. 그러나 성경의 일관된 사상은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고전 15:26)는 죽음이라고 하였다.
바울은 고생하느니 차라리 죽어 영혼이나 편히 살고자 한 것이 아니다. 바울은 오히려 살아서 주님을 만나게 되기를 고대하였다. 3, 4절에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 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여기 "입음"은 현재의 생명을 가리키고, "벗음"은 죽음을 가리키고, "덧입음"은 영원한 생명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4절의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를 쉽게 풀이하면 "죽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영생을 얻고자 함이라"이다. 그는 이 세상에서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를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였다"(2절). 그렇게 말한 그가 "우리가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고 했을 때, 그 의미를 9절에서 찾게 된다.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강조점은 "몸을 떠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주를 기쁘시게 하는 것"에 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라면 순교도 불사하겠다는 뜻이다.
사람의 사후의 즉시 불멸의 옷을 덧입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날 의인의 부활시에 홀연히 모두 함께 변화를 입는다.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고전 15:51-52),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니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 4:7-8). 즉 마지막 나팔 때, 그 날에 주님을 기다리던 모든 사람들이 하늘로부터 오는 옷을 덧입을 것이다. 주님 안에서 죽은 사람은 소망이 있으므로, 그 죽음은 재림 때까지 한 순간의 잠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주 안에서 죽은 자는 사망의 잠을 자는 동안 주님 안에서 쉬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사후에 "그 영혼이 몸을 떠나 주님과 함께 한다"는 뜻이 아니다. 바울 자신도 죽지 않고 곧 바로 변화를 입어 영생에 들어가기를 소망했다. 그러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라면 소망을 가지고 담대히 순교도 불사하겠다"는 뜻이다(교회지남, 1988. 10. 12-1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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