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신앙의 자유와 불 시련 (다니엘서 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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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자유와 불 시련 (다니엘서 3장)
1. 느브갓네살의 금 신상
앞서의 다니엘서 2장은 하나님께서 느브갓네살에게 보여주신 두려운 신상이 그 주제였다. 그런데 3장에서 이번에는 "느브갓네살 왕이 금으로 신상을 만들었"(3:1)다는 또 하나의 신상 이야기로 시작된다. 이 또 하나의 신상이 세워지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 금 신상을 만들어 경배하게 하는 의도의 배후는 무엇이며 그 영향과 결과는 어떠했는가.
느브갓네살에 의하여 세워지고 경배하도록 명령되는 금 신상의 제막(除幕)사건은 그 배후를 이루고 있는 종교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를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선악의 대쟁투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여러가지 목적으로 헤아릴수 없이 많은 조각상(彫刻像)이 만들어지고 세워져 왔다. 예술적인 목적, 정치적, 역사적인 목적, 종교적인 목적 등 여러 경우 가운데 경배를 목적으로 하는 종교적인 것일 때, 그것은 우상(偶像) 곧 신상(神像)이 되는 것이다.
1. 신상의 크기
고대 세계에서는 거대한 신상들이 흔히 세워졌다. 이집트 제4왕조 카프르(Kh- afre)왕의 모습인 스핑크스는 밑에서 머리 끝까지 70피트(약 21미터)였고 아멘 호텝 3세(Amenhotep Ⅲ)의 거대한 멤논(Memnon)의 조각상들도 그 높이가 69피트였다. 이것들은 천 톤씩이나 되는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다. 누비아(Nubia)의 아부심벨(Abu Simbel)에 있는 신전에는 람세스 2세(Ramses Ⅱ)의 거상들도 그 높이가 65피트나 된다.
그런데 느브갓네살이 만든 신상은 그 높이가 육십 큐빗(약 103피트) 폭이 6 큐빗(약 10피트)로 대단히 높은 것이었다. 그러나 마치 미국의 뉴욕항에 세워진 자유의 여신상(女神像)의 총 높이가 305피트이지만 받침대(台座)의 높이를 빼면 실제 높이는 발뒷꿈치에서 머리 끝까지 111피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금 신상의 실제 높이와 폭도 30 큐빗(52 피트) : 6 큐빗(10 피트)의 비례가 될 것이다.
신상의 높이를 60 큐빗 폭을 6 큐빗으로 한 것은 의미심장한데 이는 6이라는 숫자와 그 배수(倍數)는 고대 바벨론의 종교와 연결되어 흔히 쓰던 숫자이다. 주신 마르둑 신의 고유 숫자가 60이었는데 이는 그 이전의 바벨론의 주신이었던 아누(Anu)신의 숫자가 60이었던 것을 마르둑이 들어서면서 그대로 이어 받았다.
계시록 13장 18절에서 짐승의 숫자를 600-60-6으로 하여 666이라고 한 것에는 심상치 않은 배후가 있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7을 그 분 자신이 택하신 숫자로 삼은 반면에 사단은 6을 그가 택산 숫자로 삼았음을 보게 된다. 동시에 고대 바벨론에서는 십진법(十進法)이 아니라 60을 기초로 한 60 진법(六十進法)을 썼음을 알게 된다.
2. 신장의 자료-금
참으로 그렇게 엄청난 금이 어떻게 쓰였을까. 기원전 5세기의 희랍(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터스(Herodotus)는 바벨론 신들의 예배에 엄청난 금이 쓰였음을 바벨론에 있던 한 신전을 예로 들면서 증언하고 있다.
[바벨론 성에 있는 두번째 신전에는 모두 금으로 된 제우스(Zeus)신의 좌상(座像)이 있다. 그 신상이 자리잡고 있는 앞에는 금으로 만든 큰 테이블과 신상이 좌정한 보좌와 그 보좌가 놓여진 받침이 있는데 모두가 금이었다. 갈대아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그 금을 모두 합치면 800 달란트(30톤 이상)가 된다고 했다. 그 신전 밖에는 두 개의 제단이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속까지 금으로 된 것이었다. (페르샤 왕)고레스 당시 이 신전에는 모두 금으로 된 높이 18 피트의 사람 모양의 상(像)이 있었다. 나는 직접 이 상을 보지는 못했지만 갈대아 사람들이 그 것에 관해 알려 준 것을 말한다.]
느브갓네살은 비록 우상을 섬기는 이교도였지만 자기의 신의 영광을 위해 자신의 종교를 번영하게 하기 위해 모든 것을 아낌 없이 바쳤다. 그는 엄청나게 큰 신상을 제작했고 그 막대한 금을 아낌없이 사용했다. 그러나 참 하나님이시요,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학 2:8)고 말씀하신 그 분의 사업을 위하여 드리는 헌금과 그 분을 예배하는 전(殿)인 교회의 유지와 건축을 위해 바치는 일에 그리스도인들이 나타내는 인색함과 이기심은 느브갓네살에 의해 견책을 받는다.
3. 장소-두라 평지
느브갓네살의 금 신상이 세워진 곳은 "바벨론 도(道)의 두라(Dura) 평지"라고 했다(3:1). 그런데 이 지명은 지금의 힐라(Hilla) 아래 약 4 마일 지점에 있는 유프라테스로 흘러 들어가는 지류(支流)에 연한 "나르 두라"(Nahr Dura)라는 평지에서 발견된다. 그 이웃에 있는 언덕들도 두라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다.
2. 금 신상을 만든 목적
3장의 금 신상 사건이 언제 있었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아마도 기원전 594/593년 경이 아닌가 한다. 그 까닭은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가 그의 재위 4년에 바벨론을 방문했다는 기록이 있는데(렘 51:59), 이는 느브갓네살이 "각 도 모든 관원"(단 3:2)들로 와서 자기의 금 신상에게 경배하도록 명령했기 때문에 당시 바벨론의 봉신(封臣)이었던 시드기야가 이를 계기로 바벨론을 방문한 것으로 추측될 수도 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3장의 금 신상 사건이 2장의 꿈에 본 신상의 사건 후에 있었음에 틀림 없으며 4장의 정신 이상이 된 사건보다는 먼저 있었음이 확실하다.
3장의 금 신상을 만든 때 쯤에 느브갓네살은 대제국의 기반을 공고히 하고 한번도 패한 적이 없는 승승장구의 기록을 자랑하며 자신감(自信感)에 넘쳐 있었음에 틀림 없다. 다니엘 2장의 사건에서 받은 인상과 교훈에도 불구하고 이제 그는 자신의 위대함과 그의 왕국의 확고부동함을 과시하고 공인받기를 바란 것이다.
「그 후 한 동안 느브갓네살은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으로 감동되었으나 그의 마음은 아직도 세속적인 야심과 자신을 높이려는 욕망을 버리지 아니하였다. 그의 통치에 따른 번영은 그를 교만심으로 충만하게 하였다. 차제에 그는 하나님께 광 돌리기를 그치고 더욱 증가된 열심과 고집을 가지고 우상 숭배를 다시 시작했다」(선지자와 왕, 481,482).
이러한 배경을 기초로 그가 금 신상을 세운 몇가지 가능한 이유를 들어 본다.
가. 만세(萬歲) 왕국을 위한 몸부림
1. 그가 만든 금 신상은 다니엘서 2장에서 하나님에 의하여 계시된 각종 쇠붙이로 이루어진 신상에 대한 불만을 충족시키고 해석이 가져다 준 불안을 일소하려는 보완(補完)이요, 대안(代案)일 수가 있다. 금으로 확인된 그의 나라가 목의 한계를 넘지 못한다는 선언은 불쾌하고 불만스러운 것이다. 그는 이제 머리 뿐만 아니라, 전신을 금으로 함으로써 앞서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시도한 것이다.
「'왕은 곧 그 금 머리니이다'(2:38)라는 말은 이 통치자의 마음에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 나라의 박사들은 이러한 인상과 왕이 우상숭배로 복귀한 것을 이용하여 왕이 꿈에 본 우상과 비슷한 우상을 만들어 그의 나라를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된 금 머리를 모든 사람이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세우자고 제의했다. 이 아첨하는 제안을 좋게 여긴 왕은 이 일은 수행할 뿐더러 그 이상의 일을 하려고 결심했다. 그가 본 바와 꼭 같은 신상을 만드는 대신에 그 원형보다 더 뛰어난 것을 만들고자 했다. 그의 신상은 머리에서 발가락으로 내려오면서 그 가치가 떨어져서는 안 되어야 할 뿐더러 영원하고 멸망하지 않을 강대국이 되어 다른 나라들은 산산이 부숴뜨리고 영원히 설 상징으로서 전체를 금으로 만들어야 했다」(선지자와 왕, 482).
그의 뇌리를 맴도는 흉몽(凶夢)을 길몽(吉夢)으로 바꾸고 화액(禍厄)을 제해 보려는 화려한 푸닥거리를 벌인 것이다.
2. 느브갓네살은 그가 꿈꾸고 있는 통일된 세계적인 대제국을 이룩함에 있어 종교가 가지고 있는 힘을 이용하려 했으며 이 일을 위해 하나로 통일된 강력한 종교가 필요함을 절감했다.
이러한 시도는 그 후 로마제국의 역대 황제들이 통일된 대제국을 유지하려는 방편으로 황제예배(emperor worship)를 강요하고 그리스도교를 끈질기게 핍박한 것과도 일치한다. 또한 동로마 황제 유스티니아누스(Justinian)가 분열된 동서 로마 제국을 재통일시키기 위해 533년 로마 교회의 감독을 세계 교회의 머리로 인정하여 교황이 되게 한 것이라든지 신성 로마제국의 촬스 5세가 사분오열된 유럽의 통일된 대제국을 재건하려는 일념으로 방금 일어나고 있는 루터의 종교개혁을 억압하고 교황권을 뒷받침한 까닭도 그것이었다.
영국에서도 같은 시도가 강행되어 국교(國敎) 이외의 신앙을 일체 용납지 않은 것이며, 프랑스가 개혁파를 핍박한 것도, 일본이 식민지 정책의 일환으로 신사 참배를 강요한 것등은 모두 같은 조치였다. 이른 바 현명한 듯한 통치자들이 하나의 국가와 하나의 종교를 이상으로 하여 종교를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하고 정교(政敎)일치의 정책을 취할 때는 언제나 유혈의 핍박이 뒤따랐고, 신앙과 양심의 자유가 짓밟혔다. 그것이 바로 계시록(13:14,15)에 예언된 세상의 마지막 파멸을 가져 올 요인이며 그 결과가 짐승의 표, 곧 일요일 휴업령인 것이다. 레바논에서 발견된 느브갓네살의 고대 기념 비명(碑銘)에는 이런 인상깊은 문귀가 적혀있다.
「이전의 어느 왕도 성취하지 못한 것을 (나는 했다) 아무도 혼란을 일으키지못하도록 하기 위해 나는 나의 왕다운 상(像)을 영원하도록 세웠노라.」
3. 사람은 사람 스스로를 여러가지 양상으로 신격화(神格化)하려는 심리적인 경향을 지니고 있다. "너희가 하나님 같이 되"리라(창 3:5)는 사단의 유혹에 따라 범죄가 시작되었다. 느브갓네살의 금 신상은 자아 숭배의 전형이다. 사람 모양의 금 신상을 경배하려는 경향은 범죄한 인간의 빗나간 신앙심을 심리적으로 만족시켜 주는 대용물이 되어 왔다.
이러한 의도는 정치가는 물론 철학자, 과학자, 사회학자, 교육자, 빗나간 다수의 종교인들에게 매력있는 일이 되어왔다. 황제 숭배, 위인(偉人) 숭배, 소련의 레닌 숭배, 북한의 김일성 우상화, 로마 카톨릭의 성자(聖者)숭배, 스포츠계와 연예계의 스타 숭배, 이 모든 것들이 사람 스스로가 사람을 신격화하려는 타락한 본성의 노골적인 발로(發露)인 것이다. 하나님을 첫째로 삼지 않는 모든 사람에게는 사람 자신이 신이되는 것이며 그것이 우상 숭배가 되는 것이다(눅 14:25-27, 마 10:37, 38).
4. 금 신상이 세워진 것은 더욱 근본적으로는 사단의 시도였다. 사단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우상숭배에 빠뜨리는데 성공하는 한편 자신의 지상 대리자인 느브갓네살과 바벨론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전을 짓밟고 그 백성을 포로로 함으로써 승리가 확정된 듯한 순간에 앞서 2장의 사건으로 느브갓네살이 하나님을 인정하고 공공연히 그분 앞에 굴복함으로써 일대 위기를 겪는다. 특별히 엄청난 영향력을 가진 히브리 포로들을 그의 영역으로부터 완전히 제거하기 전에는 그의 왕국이 결코 안전하지 않음을 확신했다. 이리하여 이들을 우상숭배로 굴복시키거나 아니면 제거할 수 있는 방편으로 금 신상 제막식을 이용한 것이다. 이러한 사단의 저의(底意)는 제막식 벽두에 들어났다(3:7-12).
이 의식에 왜 다니엘은 참석하지 않았는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으나 몇 가지 가능한 추측은 있을 수 있다. 즉 왕 자신이 앞서 2장의 사건을 통해 스스로 어리석음을 인정한 우상숭배를 다시 공식화하고 확실함을 고백한 꿈의 진상과 해석에 역행하는 처사를 단행함에 있어 거북스러운 입장과 분위기를 고려하여 다니엘을 어떠한 구실을 주어 불참시킬 수 있음직하다. 국사를 위한 먼 여행, 혹은 와병, 또는 궁전 당직(當職) 근무등도 있을 수 있는 여건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만약 그가 참석했더라면 그의 세 친구와 같은 길을 택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나. 고고학의 새로운 빛
근년에 대영제국 박물관에 소장되었던 점토판 가운데서 발견되어 출판된 느브갓네살의 연대기(年代記)는 다니엘서 3장의 배경 이해에 새로운 빛으로 풀이되고 있다.
1. 이 연대기가 알려지기까지는 그토록 유능한 전제군주였던 느브갓네살의 통치는 평탄했던 것으로 여겨져왔다. 그런데 근년에 판독된 느브갓네살의 연대기 가운데 다음과 같은 구절이 적혀있다.
「아카드(註: 신바빌로니아를 가리킴)왕 제10년 그의 땅에서, 제9월로부터 제10월까지 아카드의 반역이 있었다. 그는 무기를 가지고 그 자신의 군대 가운데 다수를 죽였다. 그 자신의 손으로 그의 원수를 사로 잡았다.」
이토록 너무나 긴박하여 대왕 자신이 무기를 들고 백병전을 해야했던 이 반역은 느브갓네살의 재위 10년 제9월과 제10월이라 했는데 이는 기원전 595년 12월과 594년 1월 쯤에 해당된다.
2. 그런데 예레미야 51장 59-64절을 보면 유다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가 그의 재위 4년 째에 바벨론을 방문한 사건이 나온다. 방문 이유는 밝혀져 있지 않지만, 봉신왕(封臣王)이었던 그는 종주국에 어떤 형식이든 충성을 다짐하기 위해 갔음은 있음직하다. 유다가 최후로 망한 것은 시드기야 11년째였으므로 아직은 그가 바벨론을 반역하지 않은 때였다. 가을부터 시작되는 유대의 민력으로 계산하면 시드기야 4년은 기원전 594년 가을에 시작된다.
3. 그렇다면 시드기야가 바벨론을 방문한 것은 느브갓네살에 대한 반역이 일어난지 1년이 채 못되는 때로 그의 바벨론 방문이 느브갓네살 재위 10년째에 일어난 반역과 필경 어떤 관계가 있을 것이다. 즉 본국에서 일어난 반역에 자극을 받아 다른 종속국들이 덩달아 반역하지 못하도록 충성을 재다짐시키려 했을 것이다.
4. 이러한 배경을 두고 볼 때 이때 일어난 반역을 계기로 느브갓네살은 자신의 왕위를 다시 한번 공고히하고 그의 제국을 영구하게 함으로써 그렇잖아도 불안을 주는 다니엘서 2장의 예언이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각 계급의 신하들에게 충성을 다짐받기 위해 3장의 금 신상을 세우고 그 제막식에 그들을 참석시켜 자신의 권위에 복종시키려 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단 3:2).
5. 3장의 금 신상 사건에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또 하나의 고고학적 사실이 바벨론에서 발견되어 지금은 터키의 이스탄불 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점토 각주(角柱) 기념비가 읽혀짐으로써 나타났다. 이 점토 각주 (角柱) 기념비의 다섯 면 위에는 다섯 단(段)으로 된 기록이 쓰여 있는데 마지막 두 단에는 느브갓네살이 친히 임명하는 50명 이상의 각계 각층의 공무원들의 이름과 직위가 또박 또박 적혀 있다(상당 부분은 훼손됨).
"나는 (다음)의 궁중 관리들을 나의 공식적인 수행자로서의 지위를 차지하여 (그들의) 의무를 수행하도록 임명한다"는 서언을 시작으로 관직과 명단이 쓰여 있다.
그 가운데 기원전 586년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불태웠던 시위대 장관 느브사라단에 해당하는 이름이 맨 먼저 나오고(왕하 28:8, 렘 39:13), 역시 이 때 참전했던 고위 방백인 네르갈사레셀에 해당되는 이름도 나타난다(렘 39:13).
6. 만약 느브갓네살이 이렇게 많은 고위 관리를 한꺼번에 새로이 임명한 것이 그의 재위 10년째에 있었던 반역의 결과로 불충성한 자들을 숙청(肅淸)한 까닭이라면 다니엘 3장의 사건으로 오히려 "바벨론 도에서 더욱 높아"진 히브리의 세 젊은이의 이름들도 나올 법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든다(단 3:30).
7. 이러한 관심을 두고 이 명단을 살펴 보면 제일단 맨 마지막에 수석 상무관(商務官; chief trader)의 직책을 가진 "하누누"(Hanunu)라는 이름이 나온다. 이 이름은 바벨론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서방 즉 페니키아나 이스라엘 계통의 이름인 것이다. 이 이름은 세 젊은이 가운데 하나인 "하나냐"(Hannaniah; 단 3:30)의 이름과 어학적으로 밀접히 일치하고 있다.
8. 또 다른 이름은 아벳느고(Abed-Nego)의 이름인데 "아벳"(abed)은 히브리어나 아람어로 "종"(servant)을 뜻하는데 이 말이 고대 아카드어(Akkadian)로는 "바르둠"(wardum)이었고 신바빌로니아 당시에는 앞의 글자가 떨어져나가 "아르두"(ardu)가 되었다. 그래서 "아벳-느고"를 바벨론식으로 부르면 "아르디-나부"(Ardi-Nabu)가 되는데 바로 이 이름이 바벨론의 왕 세자(世子)인 아멜-마르둑(Amel-Marduk)의 비서관의 이름으로 점토 각주에 쓰여 있다.
9. 만약 이 비서관이 참으로 다니엘서 3장의 그 아벳느고라면 열왕기하 25장 27, 28절의 기사가 새로운 이해를 받게 된다. 즉 아버지 느브갓네살을 이어 왕위에 오른 아멜-마르둑(성경에는 에윌므로닥으로 불리움)이 "즉위한 원년 12월 27일에 (포로되어 온) 유다왕 여호야긴을 옥에서 내어 놓아 그 머리를 들게 하고 선히 말하고 그 위를 모든 왕의 위보다 높이고 죄수의 의복을 바꾸게 하고 그 일평생에 항상 왕의 앞에서 먹게"한 후대(厚待)가 아마도 그의 비서관이었던 다니엘의 친구 아벳느고의 영향이 아니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10. 나머지 한 사람인 "메삭"(Meshak) 혹은 "미사엘"(Mishael)의 이름을 찾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바벨론 사람들이 "미사엘"의 이름에서 "하나님"을 뜻하는 "엘"(el)을 떼어버리고 바벨론의 신인 마르둑의 이름을 대신 넣었을 경우 그 점토 각주의 제일단에 나와 있는 궁전의 여자 노예들의 감독자 이름인 무샬림-마르둑(Mushallim-Marduk)에 가깝게도 여겨진다.
3. 강요되는 예배- 우상 숭배
나는 새라도 떨어뜨릴 전성기의 느브갓네살이 반포한 명령에 따라 바벨론 전역으로부터 각계 각층의 지도자와 "각 도 모든 관원이 느브갓네살 왕이 세운 신상의 낙성 예식에 참집하여 신상 앞에서"게 되었다(3:3). 그 가운데 2장의 사건 후에 지방 행정의 고관이 된 세 친구도 참석했다(2:49). 마침내 의식이 시작되고 돈으로 고용된 관인(官認) 반포자에 의해 예배가 명령된다.
「백성들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들아 왕이 너희 무리들에게 명하시나니 모든 악기 소리를 들을 때에 엎드리어 느브갓네살 왕이 세운 금 신상에 절하라. 누구든지 엎드리어 절하지 아니 하는 자는 즉시 극렬히 타는 풀무에 던져 넣으리라」(단 3:4-6).
하나님께서도 사람들에게 합당한 예배를 요청하신다. 그러나 그 요청은 얼마나 판이한가.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 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4, 5).
예배는 성질 상 명령될 수 없고 강요될 수 없는 것이다. 마치 사랑을 강요할 수 없고 믿음을 명령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예배는 의지의 최고 결정으로 심령에서 우러나와야 한다. 자유 의지가 보장되지 않으면 진정한 사랑도 참된 예배도 있을 수 없다. 금 신상의 예배에는 왕권(王權)과 관권(官權)이 뒷받침한 모든 수단과 방법이 총동원되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음악의 악용(惡用)이다.
음악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천사들에 의해 불리운 것이요(욥 38:7), 하나님을 찬양하는 힘 있는 방편이다(시 150편). 이토록 숭고하고 유력한 음악이 타락과 함께 퇴폐적인 오락이 방편으로, 전쟁의 수단으로, 거짓 신앙을 고취시키는 방편으로 사용되고 있다. 음악이 하나님께 속하지 않을 때 그것은 쉽사리 사단의 점유물이 되고 만다.
이제 이 금 신상에게 예배하라는 명령은 이미 종교와 양심의 영역을 넘어 정치적이며 사회적인 문제로 번지게 되었다. 거절한다면 그것은 왕의 명령에 대한 항명(抗命)이요, 국가의 권위에 대한 반역(反逆)이 되는 반국가적 행위로 해석되어 법적으로 응징될 것이었다. 또한 바벨론의 안전과 번영을 보장하는 바벨론의 종교와 바벨론의 신에 대한 모독(冒瀆)으로 간주되어 가장 혹독한 증오의 대상이 될 것이다. 아울러 바벨론 신민(臣民)의 번영과 국익(國益)을 증진시키기 위해 의도된 이러한 범국민적인 염원을 저버리는 것은 곧 반사회적인 행동으로 낙인 찍혀져 대중의 분노를 면치 못하는 입장에 서게 될 것이다.
1. 느브갓네살의 금 신상
앞서의 다니엘서 2장은 하나님께서 느브갓네살에게 보여주신 두려운 신상이 그 주제였다. 그런데 3장에서 이번에는 "느브갓네살 왕이 금으로 신상을 만들었"(3:1)다는 또 하나의 신상 이야기로 시작된다. 이 또 하나의 신상이 세워지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 금 신상을 만들어 경배하게 하는 의도의 배후는 무엇이며 그 영향과 결과는 어떠했는가.
느브갓네살에 의하여 세워지고 경배하도록 명령되는 금 신상의 제막(除幕)사건은 그 배후를 이루고 있는 종교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를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선악의 대쟁투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여러가지 목적으로 헤아릴수 없이 많은 조각상(彫刻像)이 만들어지고 세워져 왔다. 예술적인 목적, 정치적, 역사적인 목적, 종교적인 목적 등 여러 경우 가운데 경배를 목적으로 하는 종교적인 것일 때, 그것은 우상(偶像) 곧 신상(神像)이 되는 것이다.
1. 신상의 크기
고대 세계에서는 거대한 신상들이 흔히 세워졌다. 이집트 제4왕조 카프르(Kh- afre)왕의 모습인 스핑크스는 밑에서 머리 끝까지 70피트(약 21미터)였고 아멘 호텝 3세(Amenhotep Ⅲ)의 거대한 멤논(Memnon)의 조각상들도 그 높이가 69피트였다. 이것들은 천 톤씩이나 되는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다. 누비아(Nubia)의 아부심벨(Abu Simbel)에 있는 신전에는 람세스 2세(Ramses Ⅱ)의 거상들도 그 높이가 65피트나 된다.
그런데 느브갓네살이 만든 신상은 그 높이가 육십 큐빗(약 103피트) 폭이 6 큐빗(약 10피트)로 대단히 높은 것이었다. 그러나 마치 미국의 뉴욕항에 세워진 자유의 여신상(女神像)의 총 높이가 305피트이지만 받침대(台座)의 높이를 빼면 실제 높이는 발뒷꿈치에서 머리 끝까지 111피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금 신상의 실제 높이와 폭도 30 큐빗(52 피트) : 6 큐빗(10 피트)의 비례가 될 것이다.
신상의 높이를 60 큐빗 폭을 6 큐빗으로 한 것은 의미심장한데 이는 6이라는 숫자와 그 배수(倍數)는 고대 바벨론의 종교와 연결되어 흔히 쓰던 숫자이다. 주신 마르둑 신의 고유 숫자가 60이었는데 이는 그 이전의 바벨론의 주신이었던 아누(Anu)신의 숫자가 60이었던 것을 마르둑이 들어서면서 그대로 이어 받았다.
계시록 13장 18절에서 짐승의 숫자를 600-60-6으로 하여 666이라고 한 것에는 심상치 않은 배후가 있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7을 그 분 자신이 택하신 숫자로 삼은 반면에 사단은 6을 그가 택산 숫자로 삼았음을 보게 된다. 동시에 고대 바벨론에서는 십진법(十進法)이 아니라 60을 기초로 한 60 진법(六十進法)을 썼음을 알게 된다.
2. 신장의 자료-금
참으로 그렇게 엄청난 금이 어떻게 쓰였을까. 기원전 5세기의 희랍(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터스(Herodotus)는 바벨론 신들의 예배에 엄청난 금이 쓰였음을 바벨론에 있던 한 신전을 예로 들면서 증언하고 있다.
[바벨론 성에 있는 두번째 신전에는 모두 금으로 된 제우스(Zeus)신의 좌상(座像)이 있다. 그 신상이 자리잡고 있는 앞에는 금으로 만든 큰 테이블과 신상이 좌정한 보좌와 그 보좌가 놓여진 받침이 있는데 모두가 금이었다. 갈대아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그 금을 모두 합치면 800 달란트(30톤 이상)가 된다고 했다. 그 신전 밖에는 두 개의 제단이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속까지 금으로 된 것이었다. (페르샤 왕)고레스 당시 이 신전에는 모두 금으로 된 높이 18 피트의 사람 모양의 상(像)이 있었다. 나는 직접 이 상을 보지는 못했지만 갈대아 사람들이 그 것에 관해 알려 준 것을 말한다.]
느브갓네살은 비록 우상을 섬기는 이교도였지만 자기의 신의 영광을 위해 자신의 종교를 번영하게 하기 위해 모든 것을 아낌 없이 바쳤다. 그는 엄청나게 큰 신상을 제작했고 그 막대한 금을 아낌없이 사용했다. 그러나 참 하나님이시요,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학 2:8)고 말씀하신 그 분의 사업을 위하여 드리는 헌금과 그 분을 예배하는 전(殿)인 교회의 유지와 건축을 위해 바치는 일에 그리스도인들이 나타내는 인색함과 이기심은 느브갓네살에 의해 견책을 받는다.
3. 장소-두라 평지
느브갓네살의 금 신상이 세워진 곳은 "바벨론 도(道)의 두라(Dura) 평지"라고 했다(3:1). 그런데 이 지명은 지금의 힐라(Hilla) 아래 약 4 마일 지점에 있는 유프라테스로 흘러 들어가는 지류(支流)에 연한 "나르 두라"(Nahr Dura)라는 평지에서 발견된다. 그 이웃에 있는 언덕들도 두라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다.
2. 금 신상을 만든 목적
3장의 금 신상 사건이 언제 있었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아마도 기원전 594/593년 경이 아닌가 한다. 그 까닭은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가 그의 재위 4년에 바벨론을 방문했다는 기록이 있는데(렘 51:59), 이는 느브갓네살이 "각 도 모든 관원"(단 3:2)들로 와서 자기의 금 신상에게 경배하도록 명령했기 때문에 당시 바벨론의 봉신(封臣)이었던 시드기야가 이를 계기로 바벨론을 방문한 것으로 추측될 수도 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3장의 금 신상 사건이 2장의 꿈에 본 신상의 사건 후에 있었음에 틀림 없으며 4장의 정신 이상이 된 사건보다는 먼저 있었음이 확실하다.
3장의 금 신상을 만든 때 쯤에 느브갓네살은 대제국의 기반을 공고히 하고 한번도 패한 적이 없는 승승장구의 기록을 자랑하며 자신감(自信感)에 넘쳐 있었음에 틀림 없다. 다니엘 2장의 사건에서 받은 인상과 교훈에도 불구하고 이제 그는 자신의 위대함과 그의 왕국의 확고부동함을 과시하고 공인받기를 바란 것이다.
「그 후 한 동안 느브갓네살은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으로 감동되었으나 그의 마음은 아직도 세속적인 야심과 자신을 높이려는 욕망을 버리지 아니하였다. 그의 통치에 따른 번영은 그를 교만심으로 충만하게 하였다. 차제에 그는 하나님께 광 돌리기를 그치고 더욱 증가된 열심과 고집을 가지고 우상 숭배를 다시 시작했다」(선지자와 왕, 481,482).
이러한 배경을 기초로 그가 금 신상을 세운 몇가지 가능한 이유를 들어 본다.
가. 만세(萬歲) 왕국을 위한 몸부림
1. 그가 만든 금 신상은 다니엘서 2장에서 하나님에 의하여 계시된 각종 쇠붙이로 이루어진 신상에 대한 불만을 충족시키고 해석이 가져다 준 불안을 일소하려는 보완(補完)이요, 대안(代案)일 수가 있다. 금으로 확인된 그의 나라가 목의 한계를 넘지 못한다는 선언은 불쾌하고 불만스러운 것이다. 그는 이제 머리 뿐만 아니라, 전신을 금으로 함으로써 앞서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시도한 것이다.
「'왕은 곧 그 금 머리니이다'(2:38)라는 말은 이 통치자의 마음에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 나라의 박사들은 이러한 인상과 왕이 우상숭배로 복귀한 것을 이용하여 왕이 꿈에 본 우상과 비슷한 우상을 만들어 그의 나라를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된 금 머리를 모든 사람이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세우자고 제의했다. 이 아첨하는 제안을 좋게 여긴 왕은 이 일은 수행할 뿐더러 그 이상의 일을 하려고 결심했다. 그가 본 바와 꼭 같은 신상을 만드는 대신에 그 원형보다 더 뛰어난 것을 만들고자 했다. 그의 신상은 머리에서 발가락으로 내려오면서 그 가치가 떨어져서는 안 되어야 할 뿐더러 영원하고 멸망하지 않을 강대국이 되어 다른 나라들은 산산이 부숴뜨리고 영원히 설 상징으로서 전체를 금으로 만들어야 했다」(선지자와 왕, 482).
그의 뇌리를 맴도는 흉몽(凶夢)을 길몽(吉夢)으로 바꾸고 화액(禍厄)을 제해 보려는 화려한 푸닥거리를 벌인 것이다.
2. 느브갓네살은 그가 꿈꾸고 있는 통일된 세계적인 대제국을 이룩함에 있어 종교가 가지고 있는 힘을 이용하려 했으며 이 일을 위해 하나로 통일된 강력한 종교가 필요함을 절감했다.
이러한 시도는 그 후 로마제국의 역대 황제들이 통일된 대제국을 유지하려는 방편으로 황제예배(emperor worship)를 강요하고 그리스도교를 끈질기게 핍박한 것과도 일치한다. 또한 동로마 황제 유스티니아누스(Justinian)가 분열된 동서 로마 제국을 재통일시키기 위해 533년 로마 교회의 감독을 세계 교회의 머리로 인정하여 교황이 되게 한 것이라든지 신성 로마제국의 촬스 5세가 사분오열된 유럽의 통일된 대제국을 재건하려는 일념으로 방금 일어나고 있는 루터의 종교개혁을 억압하고 교황권을 뒷받침한 까닭도 그것이었다.
영국에서도 같은 시도가 강행되어 국교(國敎) 이외의 신앙을 일체 용납지 않은 것이며, 프랑스가 개혁파를 핍박한 것도, 일본이 식민지 정책의 일환으로 신사 참배를 강요한 것등은 모두 같은 조치였다. 이른 바 현명한 듯한 통치자들이 하나의 국가와 하나의 종교를 이상으로 하여 종교를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하고 정교(政敎)일치의 정책을 취할 때는 언제나 유혈의 핍박이 뒤따랐고, 신앙과 양심의 자유가 짓밟혔다. 그것이 바로 계시록(13:14,15)에 예언된 세상의 마지막 파멸을 가져 올 요인이며 그 결과가 짐승의 표, 곧 일요일 휴업령인 것이다. 레바논에서 발견된 느브갓네살의 고대 기념 비명(碑銘)에는 이런 인상깊은 문귀가 적혀있다.
「이전의 어느 왕도 성취하지 못한 것을 (나는 했다) 아무도 혼란을 일으키지못하도록 하기 위해 나는 나의 왕다운 상(像)을 영원하도록 세웠노라.」
3. 사람은 사람 스스로를 여러가지 양상으로 신격화(神格化)하려는 심리적인 경향을 지니고 있다. "너희가 하나님 같이 되"리라(창 3:5)는 사단의 유혹에 따라 범죄가 시작되었다. 느브갓네살의 금 신상은 자아 숭배의 전형이다. 사람 모양의 금 신상을 경배하려는 경향은 범죄한 인간의 빗나간 신앙심을 심리적으로 만족시켜 주는 대용물이 되어 왔다.
이러한 의도는 정치가는 물론 철학자, 과학자, 사회학자, 교육자, 빗나간 다수의 종교인들에게 매력있는 일이 되어왔다. 황제 숭배, 위인(偉人) 숭배, 소련의 레닌 숭배, 북한의 김일성 우상화, 로마 카톨릭의 성자(聖者)숭배, 스포츠계와 연예계의 스타 숭배, 이 모든 것들이 사람 스스로가 사람을 신격화하려는 타락한 본성의 노골적인 발로(發露)인 것이다. 하나님을 첫째로 삼지 않는 모든 사람에게는 사람 자신이 신이되는 것이며 그것이 우상 숭배가 되는 것이다(눅 14:25-27, 마 10:37, 38).
4. 금 신상이 세워진 것은 더욱 근본적으로는 사단의 시도였다. 사단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우상숭배에 빠뜨리는데 성공하는 한편 자신의 지상 대리자인 느브갓네살과 바벨론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전을 짓밟고 그 백성을 포로로 함으로써 승리가 확정된 듯한 순간에 앞서 2장의 사건으로 느브갓네살이 하나님을 인정하고 공공연히 그분 앞에 굴복함으로써 일대 위기를 겪는다. 특별히 엄청난 영향력을 가진 히브리 포로들을 그의 영역으로부터 완전히 제거하기 전에는 그의 왕국이 결코 안전하지 않음을 확신했다. 이리하여 이들을 우상숭배로 굴복시키거나 아니면 제거할 수 있는 방편으로 금 신상 제막식을 이용한 것이다. 이러한 사단의 저의(底意)는 제막식 벽두에 들어났다(3:7-12).
이 의식에 왜 다니엘은 참석하지 않았는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으나 몇 가지 가능한 추측은 있을 수 있다. 즉 왕 자신이 앞서 2장의 사건을 통해 스스로 어리석음을 인정한 우상숭배를 다시 공식화하고 확실함을 고백한 꿈의 진상과 해석에 역행하는 처사를 단행함에 있어 거북스러운 입장과 분위기를 고려하여 다니엘을 어떠한 구실을 주어 불참시킬 수 있음직하다. 국사를 위한 먼 여행, 혹은 와병, 또는 궁전 당직(當職) 근무등도 있을 수 있는 여건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만약 그가 참석했더라면 그의 세 친구와 같은 길을 택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나. 고고학의 새로운 빛
근년에 대영제국 박물관에 소장되었던 점토판 가운데서 발견되어 출판된 느브갓네살의 연대기(年代記)는 다니엘서 3장의 배경 이해에 새로운 빛으로 풀이되고 있다.
1. 이 연대기가 알려지기까지는 그토록 유능한 전제군주였던 느브갓네살의 통치는 평탄했던 것으로 여겨져왔다. 그런데 근년에 판독된 느브갓네살의 연대기 가운데 다음과 같은 구절이 적혀있다.
「아카드(註: 신바빌로니아를 가리킴)왕 제10년 그의 땅에서, 제9월로부터 제10월까지 아카드의 반역이 있었다. 그는 무기를 가지고 그 자신의 군대 가운데 다수를 죽였다. 그 자신의 손으로 그의 원수를 사로 잡았다.」
이토록 너무나 긴박하여 대왕 자신이 무기를 들고 백병전을 해야했던 이 반역은 느브갓네살의 재위 10년 제9월과 제10월이라 했는데 이는 기원전 595년 12월과 594년 1월 쯤에 해당된다.
2. 그런데 예레미야 51장 59-64절을 보면 유다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가 그의 재위 4년 째에 바벨론을 방문한 사건이 나온다. 방문 이유는 밝혀져 있지 않지만, 봉신왕(封臣王)이었던 그는 종주국에 어떤 형식이든 충성을 다짐하기 위해 갔음은 있음직하다. 유다가 최후로 망한 것은 시드기야 11년째였으므로 아직은 그가 바벨론을 반역하지 않은 때였다. 가을부터 시작되는 유대의 민력으로 계산하면 시드기야 4년은 기원전 594년 가을에 시작된다.
3. 그렇다면 시드기야가 바벨론을 방문한 것은 느브갓네살에 대한 반역이 일어난지 1년이 채 못되는 때로 그의 바벨론 방문이 느브갓네살 재위 10년째에 일어난 반역과 필경 어떤 관계가 있을 것이다. 즉 본국에서 일어난 반역에 자극을 받아 다른 종속국들이 덩달아 반역하지 못하도록 충성을 재다짐시키려 했을 것이다.
4. 이러한 배경을 두고 볼 때 이때 일어난 반역을 계기로 느브갓네살은 자신의 왕위를 다시 한번 공고히하고 그의 제국을 영구하게 함으로써 그렇잖아도 불안을 주는 다니엘서 2장의 예언이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각 계급의 신하들에게 충성을 다짐받기 위해 3장의 금 신상을 세우고 그 제막식에 그들을 참석시켜 자신의 권위에 복종시키려 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단 3:2).
5. 3장의 금 신상 사건에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또 하나의 고고학적 사실이 바벨론에서 발견되어 지금은 터키의 이스탄불 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점토 각주(角柱) 기념비가 읽혀짐으로써 나타났다. 이 점토 각주 (角柱) 기념비의 다섯 면 위에는 다섯 단(段)으로 된 기록이 쓰여 있는데 마지막 두 단에는 느브갓네살이 친히 임명하는 50명 이상의 각계 각층의 공무원들의 이름과 직위가 또박 또박 적혀 있다(상당 부분은 훼손됨).
"나는 (다음)의 궁중 관리들을 나의 공식적인 수행자로서의 지위를 차지하여 (그들의) 의무를 수행하도록 임명한다"는 서언을 시작으로 관직과 명단이 쓰여 있다.
그 가운데 기원전 586년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불태웠던 시위대 장관 느브사라단에 해당하는 이름이 맨 먼저 나오고(왕하 28:8, 렘 39:13), 역시 이 때 참전했던 고위 방백인 네르갈사레셀에 해당되는 이름도 나타난다(렘 39:13).
6. 만약 느브갓네살이 이렇게 많은 고위 관리를 한꺼번에 새로이 임명한 것이 그의 재위 10년째에 있었던 반역의 결과로 불충성한 자들을 숙청(肅淸)한 까닭이라면 다니엘 3장의 사건으로 오히려 "바벨론 도에서 더욱 높아"진 히브리의 세 젊은이의 이름들도 나올 법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든다(단 3:30).
7. 이러한 관심을 두고 이 명단을 살펴 보면 제일단 맨 마지막에 수석 상무관(商務官; chief trader)의 직책을 가진 "하누누"(Hanunu)라는 이름이 나온다. 이 이름은 바벨론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서방 즉 페니키아나 이스라엘 계통의 이름인 것이다. 이 이름은 세 젊은이 가운데 하나인 "하나냐"(Hannaniah; 단 3:30)의 이름과 어학적으로 밀접히 일치하고 있다.
8. 또 다른 이름은 아벳느고(Abed-Nego)의 이름인데 "아벳"(abed)은 히브리어나 아람어로 "종"(servant)을 뜻하는데 이 말이 고대 아카드어(Akkadian)로는 "바르둠"(wardum)이었고 신바빌로니아 당시에는 앞의 글자가 떨어져나가 "아르두"(ardu)가 되었다. 그래서 "아벳-느고"를 바벨론식으로 부르면 "아르디-나부"(Ardi-Nabu)가 되는데 바로 이 이름이 바벨론의 왕 세자(世子)인 아멜-마르둑(Amel-Marduk)의 비서관의 이름으로 점토 각주에 쓰여 있다.
9. 만약 이 비서관이 참으로 다니엘서 3장의 그 아벳느고라면 열왕기하 25장 27, 28절의 기사가 새로운 이해를 받게 된다. 즉 아버지 느브갓네살을 이어 왕위에 오른 아멜-마르둑(성경에는 에윌므로닥으로 불리움)이 "즉위한 원년 12월 27일에 (포로되어 온) 유다왕 여호야긴을 옥에서 내어 놓아 그 머리를 들게 하고 선히 말하고 그 위를 모든 왕의 위보다 높이고 죄수의 의복을 바꾸게 하고 그 일평생에 항상 왕의 앞에서 먹게"한 후대(厚待)가 아마도 그의 비서관이었던 다니엘의 친구 아벳느고의 영향이 아니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10. 나머지 한 사람인 "메삭"(Meshak) 혹은 "미사엘"(Mishael)의 이름을 찾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바벨론 사람들이 "미사엘"의 이름에서 "하나님"을 뜻하는 "엘"(el)을 떼어버리고 바벨론의 신인 마르둑의 이름을 대신 넣었을 경우 그 점토 각주의 제일단에 나와 있는 궁전의 여자 노예들의 감독자 이름인 무샬림-마르둑(Mushallim-Marduk)에 가깝게도 여겨진다.
3. 강요되는 예배- 우상 숭배
나는 새라도 떨어뜨릴 전성기의 느브갓네살이 반포한 명령에 따라 바벨론 전역으로부터 각계 각층의 지도자와 "각 도 모든 관원이 느브갓네살 왕이 세운 신상의 낙성 예식에 참집하여 신상 앞에서"게 되었다(3:3). 그 가운데 2장의 사건 후에 지방 행정의 고관이 된 세 친구도 참석했다(2:49). 마침내 의식이 시작되고 돈으로 고용된 관인(官認) 반포자에 의해 예배가 명령된다.
「백성들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들아 왕이 너희 무리들에게 명하시나니 모든 악기 소리를 들을 때에 엎드리어 느브갓네살 왕이 세운 금 신상에 절하라. 누구든지 엎드리어 절하지 아니 하는 자는 즉시 극렬히 타는 풀무에 던져 넣으리라」(단 3:4-6).
하나님께서도 사람들에게 합당한 예배를 요청하신다. 그러나 그 요청은 얼마나 판이한가.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 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4, 5).
예배는 성질 상 명령될 수 없고 강요될 수 없는 것이다. 마치 사랑을 강요할 수 없고 믿음을 명령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예배는 의지의 최고 결정으로 심령에서 우러나와야 한다. 자유 의지가 보장되지 않으면 진정한 사랑도 참된 예배도 있을 수 없다. 금 신상의 예배에는 왕권(王權)과 관권(官權)이 뒷받침한 모든 수단과 방법이 총동원되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음악의 악용(惡用)이다.
음악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천사들에 의해 불리운 것이요(욥 38:7), 하나님을 찬양하는 힘 있는 방편이다(시 150편). 이토록 숭고하고 유력한 음악이 타락과 함께 퇴폐적인 오락이 방편으로, 전쟁의 수단으로, 거짓 신앙을 고취시키는 방편으로 사용되고 있다. 음악이 하나님께 속하지 않을 때 그것은 쉽사리 사단의 점유물이 되고 만다.
이제 이 금 신상에게 예배하라는 명령은 이미 종교와 양심의 영역을 넘어 정치적이며 사회적인 문제로 번지게 되었다. 거절한다면 그것은 왕의 명령에 대한 항명(抗命)이요, 국가의 권위에 대한 반역(反逆)이 되는 반국가적 행위로 해석되어 법적으로 응징될 것이었다. 또한 바벨론의 안전과 번영을 보장하는 바벨론의 종교와 바벨론의 신에 대한 모독(冒瀆)으로 간주되어 가장 혹독한 증오의 대상이 될 것이다. 아울러 바벨론 신민(臣民)의 번영과 국익(國益)을 증진시키기 위해 의도된 이러한 범국민적인 염원을 저버리는 것은 곧 반사회적인 행동으로 낙인 찍혀져 대중의 분노를 면치 못하는 입장에 서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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