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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핵심 2.hwp 두 핵심 2.hwp 번제단과 할례와의 관계


할례제도가 왜 생겨났는가? . 

할례가 처음 행해졌을 때의 목적을 알고자 할 때 

추축과 추론에 의지 할 수밖에 없다 

할례의 기원 역시 추론에 의지할 수밖에 없지만 

그 중에 언급할 가치가 있는 3가지를 들어본다.


1. 할례는 부부생활과 관련하여 여자에 대한 배려로 시행된듯하다. 

<필로>는 할례를 변론하는 글에서 부분적으로는 지나치게 현학적이다(on the special Laws I. 4-7). 

할례관습이 결혼을 위한 준비과정이라고 하는 논리에서 

남자와 여자의 오르가슴의 시제의 갭을 좁혀주는 방법론이라는 추론이다. 

남성의 예민성을 줄이면서 여성의 오르가슴과의 격차를 좁혀준다는 논리이다.


2. 성소제도는 구속의 경륜의 실습장이지만 

할례제도 역시 구속의 경륜을 상징하는 교육의 실습장이다. 

그러나 할례행위는 성소봉사와 관련이 없으므로 

제사장이 할례를 집행하지 않는다. 

AD 9세기에 회당에서 이루어지기까지는 주로 집에서 이루어졌다. 

하지만 출 4;24-26에 대한 탈금의 해석은 모세 아들의 할례가 

모세로 하여금 야훼의 진노를 벗어나는 속죄의 가치를 갖는 것으로 보았다.

또한 유대교는 탄나의 시대 이래로 할례에서 피 흘리는 것을 중시하게 되었다.

3. 후대에 히브리인들에게는 언약의 백성으로 가입하는 행위였다. 그러나 이것이 할례의 목적이었는지 어떤지는 단정해서 말할 수 없다. 할례가 시작되었을 당시 사람들이 발가벗고 사는 것이 관례였다고 간주하지 않는 한 부족적인 차이를 눈으로 확인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에게 내린 명령은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의 사이에 언약의 표징이니라.”였다. 나와 너의 사이에 언약의 표징이라는 절수가 성경에 네 번 나오는데 네 번 중 한번은 할례를 언급할 때 였고 (창 17; 11,) 3번은 안식일이다(겔 20;12,20, 출 31;13,17).


표징이라는 히브리 원어는 <오트>이다. 

오트는 표징 신호 증거 표시라는 뜻이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과 하나님의 사이에 안식일과 할례를 둠으로서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을 알아보는 표징으로 삼으셨다.

바울은 아브라함의 할례를 그의 의를 인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히브리인들은 오늘날 <뻬리트>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이사야 52장 1절에는 할례받지 않은 사람은 부정한 것이라했다. 

그렇다면 안식일과 할례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안식일이 자기 백성을 알아보는 표징이라고 말한 것과 같이 

할례도 자기 백성을 알아보는 표징이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할례의 중요성은 자못 대단하다. 

할례와 번제단의 위치가 동일지점이라는 것을 입증하게 위해서는 

우리의 몸이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말씀에서 힌트를 얻는다. 

성전의 평면도는 성소의 입구에서 시작하여 서쪽의 울타리 끝을 말한다. 

사람의 평면도는 발꼬락 끝에서 시작하여 팔을 들어 올린 손가락 끝까지를 말한다. 

성소의 문으로부터 1/4의 위치에 번제단이 있고 

또한 사람의 발끝으로부터 1/4의 위치에 할례가 있다. 

뿐만 아니라 성소에서 3/4의 위치에 돌비가 있고 

사람의 3/4위치에 심비가 있다. 

이렇게 단순한 진리가 왜 역사 속에 뭍혀 있었을까? 

빛이 강할수록 그늘이 짙다. 

그늘이 짙은 곳에는 어둠이 물체를 가려 보이지 않는다. 

정원의 마당이 거기에 있는데도 

꽃이 만개하기 까지는 시간의 손가락이 꽃봉오리를 터트릴 때까지 기다려야한다. 

늘 새로운 그림들이 시대에 따라 그려져 나가는 것은 현대 진리이다. 

이것들 중 부지기수가 잘못 그려지기도 하고 

어떤 경우 시대가 되기 전에 미심쩍은 느낌을 가지고 세상에 공개되기도 한다. 

추리의 빈약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시대의 어둠 속에서 

이 작업이 어떤 한 사람 또는 다른 어떤 한 사람의 머리에 

빛을 던지도록 하는 몫을 부여 받았다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다. 

상상과 추론은 신의 세계를 바라보는 눈이다. 

인간의 감각은 신의 세계를 감지한다. 

비유는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세계 인식의 수단이고 

그늘의 형상은 신의 문자이다. 

문자의 음영이 너무 짙거나 밝아 사물의 형상을 제대로 바라볼 수 없을 때 

빛이나 소리로 문자의 세계를 대신 하기도 한다. 

의문의 문장들이 새로운 혼돈의 물살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우리가 신의 세계를 엿볼 때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언제나 질서 속에 혼돈이다. 

무질서의 중심에서 빛나는 눈은 흑백의 질서와 혼동을 꿰뚫는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눈은 무질서 속의 혼돈을 직관한다. 

하나로 모아지는 밤하늘의 별빛 아래 

간구의 촛불이 비친다. 

사물의 중심에는 빛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어느 날 바닥에 엎드려 누었다. 

두 팔을 머리 위로 뻗고 발가락 끝으로부터 손가락 끝 부분까지 기지개 하듯 누었다. 

그리고는 그 길이를 자로 제어 보았다.

정확히 7피트였다. 

그리고 그 길이의 절반을 잘라 3.5피트 크기의 정 사각 두 개을 만들어 보았다. 

그리고 두 개의 정 사각에 각각 두 개의 중심점을 찾아보았다. 

이 두 개의 중심점은 인간 몸 구성의 중대한 역할을 하는 부분이다. 

그림을 공부하려는 학도는 인체 해부학(body anatomy)을 먼저 습득 한다. 

해부학이란 운동의 정지 또는 운동의 여러 상태 속에서 

외형의 변화를 연구함을 주된 목적으로 하는 예술 해부학을 말한다. 

나는 다시 한 번 정 사각 두 개 위에 가지런히 엎드려 누었다. 

이 두개의 정 사각을 나란히 놓은 한 개의 장방형 사각은 

나의 몸 길이로 만든 나의 몸의 청사진이다. 

순간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한 개의 정 사각의 중심점에는 나의 대뇌가 있고, 

다른 정 사각의 중심점에는 나의 할례 부위가 가지런히 맞닿고 있었다. 

얼마나 중대한 기관인가? 

이 두 개의 기능이 상실 될 때 이는 죽음을 뜻한다. 

다시 말하거니와 인간 삶의 목적과 보람은 이 두 기능에 있다. 

그러므로 삶의 목적은 두 개의 중심점에 의해 주어진다. 

하나님께서는 이 두 개의 기능에 영원한 언약을 세우셨다. 

이 기관의 알맹이는 안식일과 할례이다. 

성소의 길이를 네등분 한 것과 

사람 키의 길이를 네등분 한 기하학적 구도에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백성을 알아보는 핵심이 있다. 

이것이 곧 할례와 안식일이다. 

이 두 핵심의 닷(.)! 에 구속의 경륜이 있다.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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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4님의 댓글

no_profile 김영환4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에게 내린 명령은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의 사이에 언약의 표징이니라.”였다. 나와 너의 사이에 언약의 표징이라는 절수가 성경에 네 번 나오는데 네 번 중 한번은 할례를 언급할 때 였고 (창 17; 11,) 3번은 안식일이다(겔 20;12,20, 출 31;13,17)."




1. 흥미로운 주제를 게시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2. 필자는 게시판 기능과 글들을 공부하는 학도인데, 몇가지 질문을 드립니다:




    1) 첨부 [2]를 열다가, 못 열었습니다.  댓글에 올려주시든지, 여는 방법을 가르처 주시면 . . .

    2) '할례' - 히브리인의 관습/전통으로 보는 견해와 '신의 계시'로 보는 견해  - - 설명을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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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위덕님의 댓글

no_profile 강위덕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 첨부 [2] 여는 방법
님께서 여는 방법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입력입니다.
이 글에서 삽입하고자하는 도해는 님께서 질문하신 답에 매우 중대한 역할이 될듯 싶습니다.
선생님께서 첩부파일 넣는 방법과 본문 삽입 방법을 알려주십시요.




두번째질문
    히브리인의 관습과 전통으로 보는 견해와 
   신의 계시'로 보는 견해 에 대한 질문은 논문 수준의 답변이 필요한듯 합니다.


어릴 때의 저의 아빠의 질문과 비슷합니다. "너 배 아파" "응"
배는 아픈데 밥 한그릇을 다 비웠습니다. 아빠는 내가 배가 아픈것이 아니라 배가 고프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듯
배아픈 나에게 밥을 처방해 주었습니다.
깔끔이 아프던 배가 평안하고 풍만해 졌거든요.


답변을 알고 있는 어르신네쎄서 나의 배고픔을 채워주려는듯 아름다운 처방으로 알고 성심껏 답변을 찾아 다시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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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4님의 댓글의 댓글

no_profile 김영환4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박용진 1.  답글을 주셔서 고맙습니다.


2.  과거,  카스다 '칼럼'시절에 - 강위덕 장로님의 생각이 깊고, 다양한 예술적/예능적 표현/구사가 다른 글들과 달라서,
관심을 가지고 공부한 적이 있습니다. (감사)


3.  본문으로 돌아가서 . . . (할례)
1. 할례는 부부생활과 관련하여 여자에 대한 배려로 시행된듯하다.
&lt;필로&gt;는 할례를 변론하는 글에서 생식력을 높부분적으로는 지나치게 현학적이다(on the special Laws I. 4-7).
할례관습이 결혼을 위한 준비과정이라고 하는 논리에서
남자와 여자의 오르가슴의 시제의 갭을 좁혀주는 방법론이라는 추론이다.
남성의 예민성을 줄이면서 여성의 오르가슴과의 격차를 좁혀준다는 논리이다.



    * 남자와 여자의 오르가슴:  창조주께서 남자와 여자를 만드시고, 서로 사랑하고 그 성교라는 행위를 통해서

괘락을 경험하고, 즐거움이라는 것이 맞보고, 즐기면서 살라고 하신것 같은데 . .

종교에서는 지금까지 '타부'시 해오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입니다.



인간의 기본욕구인 [건전한 성 생활]에 관한 교육이 필요한 세대가 아닌가!  생각되면서 . .



[할례] - 히브리인들이 행하는 절차들을 살펴보면 - 구체적이든군요.



***  계약의 민족 유대인 할례식 장면 ***

http://www.amen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2363  (사진과 자세한 기사가 있슴)

http://www.amen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2363







    &lt;강 장로님의 '답변'을 들으면서 - 대화를 나누고자 함니다&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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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4님의 댓글

no_profile 김영환4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2.  . . . . 표징이라는 히브리 원어는 &lt;오트&gt;이다.
오트는 표징 신호 증거 표시라는 뜻이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과 하나님의 사이에 안식일과 할례를 둠으로서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을 알아보는 표징으로 삼으셨다.


?-1)  표징/증표: '안식일과 할례를 표징으로 삼으셨다면,  

안식일 교단에서,  할례도 안식일과 똑같이 중요시하고, 성별하고, 지키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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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위덕님의 댓글

no_profile 강위덕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오르가슴에 관하여; 종교에서는 지금까지 '타부'시 해오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입니다.
인간의 기본욕구인 [건전한 성 생활]에 관한 교육이 필요한 세대가 아닌가!  생각되면서.







답글
문정희 시인의 시가 생각이 납니다






문정희






햇살 가득한 대낮
지금 나하고 하고 싶어?
네가 물었을 때
꽃처럼 피어난
나의 문자
"응"

동그란 해로 너 내위에 떠있고
둥그란 달로 나 네 아래 떠있는
이 눈부신 언어의 체위

오직 심장으로
나란히 당도한
신의 방

너와 내가 만든
아름다운 완성

해와 달
지평선에 함께 떠있는

땅 위에
제일 평화롭고
뜨거운 대답
"응"


*

나의 시 속에는 사실 유머가 많다. 극심한 비장미悲壯美의 순간을 웃음과 해학으로 풀어내는 남도南道의 피의 유전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판소리처럼...

여기 소개하는 나의 시 「"응"」은 유머보다 관능을, 혹은 시각적, 청각적 효과에 더욱 관심을 둘 수도 있는 시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유머로 읽기로 하자.
언젠가 머리를 감다가 문자를 받고 젖은 손으로 긴 답장을 쓸 수 없어 그냥 "응"이라고 답을 보낸 적이 있다. 문제는 저쪽의 반응이었다.
"심장이 터지는 것 같아요" 아마 이런 답 문자를 보내 왔던 것 같다.
"응"이라고 한방 먹인 것뿐인데 심장이 터질 것 같단...... 폭탄보다 위력이 큰 호응의 언어가 "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응"은 청각적으로 응응응 마치 응가 눌 때처럼 편하고 좋고, 진도 아리랑처럼 응응응 콧소리 가락이 관능적이다. 또 시각적으로도 상하곡선 직선 완벽한 조화이다. 세계 어느 문자가 이토록 신비하고 아름다운가.

지난 봄, 프랑스 &lt;시인들의 봄&gt; 행사와 &lt;파리 도서전&gt;에 초대받아 갈 때 나는 랑송이 쓴 『프랑스 문학사』와 프랑스 시인들을 다시 수험생처럼 통독했었다.
문학의 나라 프랑스 시인들의 시 속에 유머와 냉소들이 사금처럼 박혀 있음을 재확인했다. 천부의 예술가들이 소유한 촌철살인, 삶의 허위를 꿰뚫는 유머는 마치 유성처럼 밤하늘을 쩍 쩍 갈라놓곤 했다. 심지어 묘비명에도 유머를 새겨 놓는 그들이 아닌가.

그래서 나는 뷔뤼노 두세 출판사가 나의 프랑스 역시집 『찬밥 먹는 사람』을 출판하기로 결정하면서 "파토스를 전제한 유머, 진솔하고 거침없는 어조. 낯설고 신선한 모더니티가 감동을 준다"고 한 말을 최대의 찬사로 받아들이고 싶었다.

그 시집에 「"응"」은 수록되지 않았지만 번역임에도 불구하고 나의 시 속의 유머를 정확하게 읽어준 프랑스 시인들에게 새삼 감탄했다.
여담 한 토막! 파리 행사 중 오페라 부근 한 옷가게에 들어갔더니 여기저기 응응응이 한글로 씌어 있지 않는가. 드디어 프랑스가 나의 시 「"응"」을 알아보는구나! 하고 소름이 돋다 얼른 사진부터 찍었다. 30%인가 50%의 세일 표시를 멋지게 세워 놓은 것이었다. "빌어먹을...유머가 심하십니다."하고 나는 부엉이처럼 큭큭 웃음을 삼키었다.

● 문정희
1969년 《월간문학》으로 등단. 시집 『남자를 위하여』『오라, 거짓 사랑아』『양귀비꽃 머리에 꽂고』『나는 문이다』『다산의 처녀』등과 시선집 등이 있음. 현대문학상, 소월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스웨덴 시카다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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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4님의 댓글의 댓글

no_profile 김영환4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정영근 ,,,
"응" ~ 응응응 ~
"응"은 청각적으로 응응응 마치 응가 눌 때처럼 편하고 좋고, 진도 아리랑처럼 응응응 콧소리 가락이 관능적이다. 또 시각적으로도 상하곡선 직선 완벽한 조화이다. 세계 어느 문자가 이토록 신비하고 아름다운가.

지난 봄, 프랑스 &lt;시인들의 봄&gt; 행사와 &lt;파리 도서전&gt;에 초대받아 갈 때 나는 랑송이 쓴 『프랑스 문학사』와 프랑스 시인들을 다시 수험생처럼 통독했었다.


    
“나는 시 속에서 자유롭고 용감하고 아름답다.” 문정희 시인
님도, '문정희 시인' 이상으로 '시적인 유모'가 풍부하신 분이십니다. ,,,,,,,,,,,,,,,,,,,,,,,,,,,,,,,,,,,,,,
        &lt;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 . &gt;
?-1)  표징/증표: '안식일과 할례를 표징으로 삼으셨다면,  

안식일교회 교단에서,  할례도 안식일과 똑같이 중요시하고, 성별하고, 지키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평면적 해학이든 직립적 해학도 - 도움이 되겠습니다!
'시'와 '그림'에도 표징/증표가 존재하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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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4님의 댓글

no_profile 김영환4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  (학습 - 위의 댓글을 복사: Opera 부라우저로)


김영환4
2015.01.06 09:06

,,,

"응" ~ 응응응 ~

"응"은 청각적으로 응응응 마치 응가 눌 때처럼 편하고 좋고, 진도 아리랑처럼 응응응 콧소리 가락이 관능적이다. 또 시각적으로도 상하곡선 직선 완벽한 조화이다. 세계 어느 문자가 이토록 신비하고 아름다운가.


지난 봄, 프랑스 &lt;시인들의 봄&gt; 행사와 &lt;파리 도서전&gt;에 초대받아 갈 때 나는 랑송이 쓴 『프랑스 문학사』와 프랑스 시인들을 다시 수험생처럼 통독했었다.




“나는 시 속에서 자유롭고 용감하고 아름답다.” 문정희 시인

님도, '문정희 시인' 이상으로 '시적인 유모'가 풍부하신 분이십니다.
,,,,,,,,,,,,,,,,,,,,,,,,,,,,,,,,,,,,,,

        &lt;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 . &gt;


?-1)  표징/증표: '안식일과 할례를 표징으로 삼으셨다면, 

안식일교회 교단에서,  할례도 안식일과 똑같이 중요시하고, 성별하고, 지키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평면적 해학이든 직립적 해학도 - 도움이 되겠습니다!

'시'와 '그림'에도 표징/증표가 존재하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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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위덕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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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례' - 히브리인의 관습/전통으로 보는 견해와 '신의 계시'로 보는 견해


 관습과 계시 재료를 수집하고나니 수십페이지에 달하는 군요. 이것을  요약하고 나니 두 단어로 요약이 되는 군요.
옛 언약과 새언약입니다. 그럼에도 수집한 재료들을 약 3페이지로 요약해 볼 생각입니다.
그래도 시간이 걸릴 뜻합니다.
우선 도해를 어떻게 첨부 파일로 전송이 가능한가를 먼져 노력해보려 합니다.
궁굼한 것은 이렇게 박사수준의 학도가 어떤 분인지 궁굼합니다.
맹자앞에 책장을 펴는 느낌이듭니다.
유대인들의 할례장면이  현대의학에서 성형외가 의사가 수술하는 장면과 흡사한점이 많군요. 다른 것이 있다면 손가락으로 표피를 잡아당기는 것과 기계로 잡아 당겨 홀드한 상태에서 돌기된 표피를 날카로운 수술칼로 싺뚱 도려내는 것이 다르군요. 
여하튼 좋은 재료를 보내주셔서 저의 저서에 삽화로 올릴 생각입니다


 안식일교회 교단에서,  할례도 안식일과 똑같이 중요시하고, 성별하고, 지키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와우!  놀라운 질문입니다. 팍! 하고 골때리는군요. 이때, 스파크가 일때, 팍하는 연쇄반응----!  다음으로 미루워 보죠.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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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위덕님의 댓글

no_profile 강위덕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시'와 '그림'에도 표징/증표가 존재하는지요?
이 질문도 다음으로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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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4님의 댓글의 댓글

no_profile 김영환4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김영환 1.  [첨부 파일 열기] 학습 - 두 핵심 2.hwp - 열리지가 않습니다.  방법은?
2.  (예)  몬트레이 교회 순서지 첨부 파일 (순서지.pdf)는 열림.  http://www.mksda.org/


3.  다음 주제들을 시간이 허용/나는대로, 공부/연구 하십시다. (감사)
4. (주제들)  절정감, 절정미, 절정음, 절정진, 절정선, 절정X, - 창조주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인체에 창조주의 뜻을
우리의 몸에 입력/프로그램하시고, 자신을 나타내시고자 한다는 논리입니다.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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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4님의 댓글

no_profile 김영환4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    [[학습]  카스다 첨부 파일 - 열기, 올리기, 수정, 등등을 위하여,  검색한 것임:  첨부 파일]
맛좋은 돼지고기!!!-파일첨부 [5]돼지에 대한 13가지 사실들 1. 돼지 창자는 쓰레기 청소를 위해 고안된 것이다. 소변, 대변, 흙, 썩은 짐승의 시체, 구더기, 썩은 채소 등 가리지 않고 먹는다. 암에 걸린 다른 돼지나 동물들도 마구 먹...김경철 | 2014-09-15 06:23 | 조회 수 824more댓글 (11)1.  [첨부 파일 열기] 학습 - 두 핵심 2.hwp - 열리지가 않습니다.  방법은? 2.  (예)  몬트레이 교회 순서지 첨부 파일 (순서지.pdf)는 열림.  http://www.mksda.org/ 3.  김영환4 | 2015-01-07 03:48언니 나도 한 장로님이 가르쳐 주었어요. 배운 것 나도 나누어야지요.  아래 파일 첨부 보이지요 거길 클릭하시고 올릴 사진을 선택하시면 사진이 다운 받아져요. 그다음 본분 삽입 하시면 사진이 게시판에 그려져 있어요. 언니 이 소이가 예전에 정 명순 입니다. 혹시 언니가 누군지 모를 가봐서 정 명순으로 거의 40년을 살았네요. 실수로 이 이름이 만들어 졌어요!이소이' | 2014-12-17 17:09장로님께서 첨부하신 파일을 컴퓨터에 저장한 후에  장로님께서 첨부한 파일이 PDF 이므로  이곳에 올리기 위해서 이를 JPG로 변환해야 합니다. 아크로벳리더에서 변환이 어려우시면 캡쳐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모니터에 보이는 이미지를 캡쳐하여 JPG로 변환하시면 됩니다. 박진하 | 2014-09-18 01:28박진하 목사님 목사님의 글을 항상 읽는 펜입니다. 저의 고향은 경기도 안성 일죽면 입니다. 목사님의 사무실에 수용되는 영광을 누리기를 기대합니다. 아무리 열심히 그림을 해도 수용될 장소가 없으면 쓰레기에 불과 하지요. 저는 칭찬에 약한 사람입니다. 칭찬 한마디에 아름다운 고리가 연결되기를 기도합니다.   목사님께서 그림을 직접 볼수 있도록 끄집어 내 주셨군요. 저는 그렇게 할 수 없어서요 옛날...강위덕 | 2014-09-17 11:10필요하신 분께서는 첨부 파일을 열어 보십시오.   1.[아담의 타락한 본성]과 [아담의 범죄의 실제 죄책(actual guilt)] 두 가지 다 후손이 물려받는다고 믿는 사람은 어느 부류에 드는지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original sin과 original guilt 둘 다를 성경적 혹은 재림교회적이라고 주장하는 분이 속하는 무리는 어느 무리에 속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자신도 받아들이고 믿는 사람은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 ...박성진 | 2014-08-12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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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4님의 댓글의 댓글

no_profile 김영환4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김영환4 1.  [카스다의 '첨부' 기능을 공부하면서 . . ]  -  Opera에서는 복사가 안되고, Chrome에서는 가능함)




  2.   &lt;파일 첨부 - 학습&gt; - 성우회 임원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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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4님의 댓글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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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4 ,,,  
황홀한 표절(剽竊)2014.11.02 07:16
이영희조회 수:658
황홀한 표절(剽竊)
이영희




단풍이 붉게 타오르고 있다.
저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불씨가 궁금했다.
뜨겁게 타오르는 불이 주체할 수 없어
강물로 뛰어 들면
어처구니없이, 불길이 번져
붉게 물든 강물이 내 안으로 흐른다  
붉은 표절이 화인(火因)이었지만
진화(鎭火)할 수 없는,
심증은 있어도 물증이 없는 표절이
활활 타오른다.
화끈하게 타올라  황홀한 표절로 물든 
단풍의 단심(丹心)은 무죄다
뜨겁게 타오르는 건 저작권이 없는
神의 사랑을 표절한 것이므로


 (2014/李寧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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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4님의 댓글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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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4 ,,,  


강위덕2014.11.02 18:55
표절이 가능한 순간, 축제가 가득합니다.
예술인이 받은 가장 고결한 선물은 표절이지요.
 
그런데 시 사랑에서 작가별 찾기에 한글로 표기했으면 해서요.
한문으로 이름을 표기하니 제일 뒤로 밀려나 있어서
찾기에 여간 고생스럽질 않습니다.
그리고 시도 많이 올려주시구요.언제 읽어도 님의 아름다운 시상
부럽습니다. 그리고 시짖는 마을에도 귀웃거려주시는 선촌님의 아름다운 마음에 감명을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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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위덕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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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호수 얼음 터지는 소리, 어둠을 쏘아올린 길을 찾아 나서다 보니 첨부 파일의 길이 열리던군요. 
궁굼한 것은 뎃글에 첨부파일을 올렸는데 본문에 올아붙어 있으니  그것도 님의 도움이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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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위덕님의 댓글

no_profile 강위덕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시'와 '그림'에도 표징/증표가 존재하는지요?


나의 시론
 
 

 나의 아방가르드는 갯벌 속으로 숨는 어린 게처럼
머리까지 침묵을 끌어 덮는 게릴라 전법이
이데아의 알갱이 속으로 스며드는 숨박꼭질이다.
며칠 전 주말에 난데없이 아들로부터 전화가 왔다.
이번 주말에 특별한 스케줄이 있느냐고 물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여러 번 왔다갔다해야하는 거리임에도
자기 식구 4명이 나의 식구 2명을 만나기 위해 이곳에 온단다.
두 달 전에 다녀갔는데도 또 온단다.
이틀 밤 자고 새벽에 떠난 아들 가족을 생각하며
침묵의 피륙에 활활 불붙는 소리로,
저물어가는 우리 두 부부의 머리맡이
불을 껐는데도 이리 환하다.
속 눈썹 차양 아래 실비듬이 뚝뚝 떨어진다.
 옛날 사람들은 왜 가슴을 마음이라 했을까
실질적으로 마음은 뇌에 있지만 마음을 둘러 싼 주위와 관계하면서 가슴이 설레고  박동하고 뛴다.
 심장 속에 계란만한 구멍이 있는 태아에게는 마음이 없다.
심장이 텅 비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발이 먼저 발육하고 죽을 때는 발이 먼저 죽는다.
발이 먼저 발육하는 태아는 발길질로 시를 쓴다.
고유한 파동의 경계까지 파장이 퍼져나가는 동안
헤아릴 수없이 많은 상형문자가
엄마의 뱃가죽에 시를 남긴다.
맹인이 점자를 더듬듯 상형문자의 골을 짚어가며 길을 찾아 가노라면
그곳엔 여인의 원초적 진실이 숨겨져 있다.
 철학은 개념을 만들고,
과학은 함수를 만들고,
예술은 감각을 만든다는 논리를 주장한 사람은
들뢰즈(G. Deleuze, 1925-1995)와 가타리(F. Guattari, 1930-1992) 두 사람이다.
내재평면(Plane of Immanence)이란 어려운 개념을 동원하지 않아도,
무한 복수성과 다충성에 비하면
자연스러운 이야기일 것이다.
창작이란 눈으로 보이는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은 나의 생각만이 아니라 메를로 퐁티(Merlean Ponty, 1908-1961)도
그런 생각을 가진듯하다.
사실 그는 시각과 관념의 사이에 있는
이상한 수동성을 승인하며 생각과 생각의 사이에
심신의 복합체란 차원을 도입한다.
책을 읽으며 밑줄을 긋는 것만이 독서 공간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마주 앉아 잠시 나눈 이야기 내용이
뇌 안에서 일정한 자리를 점유하고 의미 운동에 시동을 건다.
그때그때의 관심의 방향을 좌우하는 지표를 만들어 내는 것은 곧 창작의 근본이다.
애리조나는 눈이 내리지 않는 곳이다.
그러나 하늘의 별을 유추하여 눈이라 써 놓고
눈 내리는 애리조나를 상상한다.
봄이 되자 눈이 녹아내리고
물가가 폭동하고
가출한 소녀가 투신하는 사연들의 실마리는
1년을 가름하는 봄의 시작이다.
내재평면(Plane of Immanence) 논리를 언급했지만
생각에 잠긴 플라톤이 장미가 무엇인가? 라고 스승에게 물었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장미는 장미의 본질이 아니라고 스승이 대답했다.
그러니까 현실의 장미는 그림자에 불과하고
이데아의 세계에 본질의 장미가 있다는 것이다.
내재(immanence)는 현실 그 자체에 신이 깃들어 있다는 리얼리즘이다.
니체는 진리에 침몰당하지 않기 위해 시가 있다고 했지만
막상 시는 수면을 떠다니며
진리를 성희롱하고 있다.
시를 건지려는 인해전술이다.
진리와 비 진리의 전면전에서
블랑쇼는 不良 show로 시를 승자로 이끌어
그것의 시가 영원한 바깥이라고 형이상학을 만들어 낸다.
비진리가 진리의 자리에 설수 있는 계기가
블앙쇼에 의해 가능해진 셈이지만.
그러나 블랑쇼의 궁극적인 진리와 비 진리는 공존이 불가능한 그 너머의 어떤 영역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시는 쓰는 자들 안에 머물지 않는 방랑자이다.
진리가 작동하지 않고 혼돈의 장소에 시가 있다해도
이에 대한 블량쇼의 생각은
예술에서와 마찬가지로 수면의 바깥,
즉 물리적 형상의 바깥에서 비 진리에 두둥실 떠다니는 것이다.
바닥, 근거의 부재,
어느 것이 되었든 그는 진리가 작동하지 않는 위험과 혼동의 장소에 시가 있고
바깥의 사유에서 사유를 통해 시가 할 일을 찾아 해매고 있는 것이다.
시가 밖에 있으면서 헤맨다는 뜻은
그로인해 적어도 시의 중요해 보이는 어느 부분이 노출된다는 점이다.
여름날 철렁철렁 차오르는 수심 위로 은빛 돛폭을 펄럭여 항해하는 뜬 구름처럼,
느끼기도 전에 녹아 버리는
구름의 유전자는 아직 가 보지못한 바다와 산과 도시의 기억들을 겹겹이 소지하며
시간의 발자국으로 만든 작은 습기의 알갱이들은
내비게이션으로 코팅하기 전에 용해된다.
이런 문제가 우리에게는 직접적으로 초미(焦眉)의 문제가 되어 있지않는 것에 관하여
비 진리는 우리에게서 추방되어 있다고 보는 관점이 현실로 대두된다.
 

 &lt;사랑을 하면은 예뻐져요&gt;
 

 유행가 가사의 한 대목이다.
사랑을 할 때 분비되는 화학적 작용은 극히 조건적이다.
사랑 할때만 분비된다.
창조의 원리와 같다.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었을 때 만
마음이 열린다.
몸이 아프고 기력이 약해지면 생각도 희미해진다.
흙과 숨이 분리되면 생각은 사라져버린다.
 근세 사상가 중 소피스트를 그리스 철학의 역사 속에
다시 끼워넣은 최초의 인물은 헤겔이다.
헤겔은 자신의 변증법에 비추어
소피스트들이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의 '정립'에 대해 '반정립'을 제시했다.
탈레스·헤라클레이토스·파르메니데스와 같은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은
비 진리 세계에 대한 진리를 열정적으로 추구했다.
그러나 그들은 물질세계를 설명하면서 관찰자를 문제 삼지 않았고
현상세계 자체를 비실재적인 것으로 점점 배제해나갔다.
결국 파르메니데스의 엘레아학파는 모든 현상세계를 비실재적인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헤겔에 의하면 이러한 극단적 처지가 소피스트 운동이라는 반정립을 불러일으켰다.
헤겔은 소피스트들을 주관적 관념론자로 보았다.
헤겔이 보기에 그들은 오직 정신과 그 내용만이 실재라고 주장했고,
그결과 인식의 주관적 요소에 관심을 둠으로써 철학이 발전할 수 있었다.
소피스트들과 이전 철학자들의 대조적 사상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종합'되었다.
진리가 들어있는 알맹이와는 현저히 다른 바깥을 지배하는 것은 무엇인가이다.
진리를 설명할 수 있는 것처럼 바깥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인가?
지금부터 어려움에 부닥친다.
다만 말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궁극적인 아무것도 없는 것을 말하는 것뿐이다.
행위가 사건이 될 수도 없고 사건역시 행위가 되지 못한다.
바람 같다.
바람이 불어 집 100체가 부서지고
사람이 물에 빠져 죽어도
이것은 사건을 사건으로 다룰 수 없고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시작도 없이 발생하는 재난에 불과하다.
오직 불확실성과 불확정성이 흐르고 있는 세계,
이것이 곧 시인의 세계다.
만일 바다에 해일이 없다면
천길 태평양 깊은 밑바닥에 산소를 공급할 수 없다.
시는 우주를 아우르고 있지만
시는 막연히 진리의 편에 서지 않는다.
그것은 비 진리적 능률일 뿐이다.
시의 혼돈을 진리의 반대편에 세워 놓으면
시의 뇌관을 간단히 들어 낼 수 있다.
현대미학은 물리적 사건위에 오바렙되어 알맹이 역할을 하는 것은
굴렁쇠가 아니라 굴렁쇠를 굴리는 동네의 개구쟁이이다.
시가 진리를 벗어나 비 진리에 속해 있는 것이라면
시는 거짓이란 말인가 하는 동의 반복적 질문을 던지게 된다.
여기에는 불량쇼의 텍스트가 진리와 비 진리의 내포와
다중적인 모순을 생략하지 않으면서
양자의 대립에 대한 설정위에 시를 비 진리에 연관시키고 있다.
조용한 아침에 악어떼 우굴거리는 곳으로 운반되는 것도 모르고
아침 안개에 실려 가는 한라산처럼
시는 거짓으로 위치 짓는 또 다른 함정으로 기우는 것인지도 모른다.
무중력 상태에 있는 사과나무가 익어
체중이 무거워지면 아무데나 뒹굴러 언젠가 삿갓 안으로 귀환하게 될 것이라는 우리의 생각이지만
어쩌면 비진리라는 자리에 설정은 진리의 절정만큼이나 시를 확정짓는 것이다.
그래서 시는 생각해 보고 싶은 것이다.
진리를 논하고 비 진리를 논해도 그 자리를 영역화 시키기 어렵다면
이 어려움을 해소시키려고 하고 싶지 않다.
오히려 시가 진리라기보다 진리인 듯이 보이는 비 진리, 비 진리라기보다 비 진리처럼 보이는 진리이다.
제로의 두께까지도 허용하지 않는
그 무엇에 귀속하지 않는,
그러면서도 결정되기 전에 떠나버리는
편입과 완성되기 전에 시는 혼자 있음을 말해준다.
한발자국의 이탈도 하지 않고
진리와 비 진리에서 아지랑이처럼 어른거리면서
양자를 동시에 편들고 경계를 움직이게 한다.
시는 진리의 얼굴을 하고 있는 비 진리이거나 비 진리의 얼굴을 하고 있는 진리로 나타날 것이다.
모순을 유지하고 있는 시가 궤변으로 모든 모순을 제거하고 진리처럼
우뚝 서기보다는 모순을 생명으로 삼으면서
모순을 부끄러워 하지 않고 모순을 모순으로 들어내는 어느 순간
&lt;와!&gt;하고 경탄할 때가 있다.
모순이 광체를 발하는 순간이다.
언젠가 그랜드 케뇬에 다녀온 적이 있다
내가 발길을 딛은 곳은 렘 13 전망대이다.
난간의 손잡이에 가슴을 기데고 양손으로  핸드폰을 잡고
갈키로 가랑을 긁듯 넓은 케뇬을 핸드폰 안으로 긁어모았다. 


그렌케뇬
강위덕





와!
 
 




시제와 시인의 이름이 더 무겁다.
그날의 시는 &lt;와!&gt;이다
시는 진실을 원하는데 신은 거짓을 원한다.
성경에는 거짓을 싫어한다고했다.
거짓을 싫어하는 하나님은 거짓뿐이다.
온통 몰상식뿐이다.
상식에서 벗어난 모든 것은 모순이고 비 진리이다.
시인의 눈으로 본 하나님의 세계가 그렇다.
 진리는 평범하다.
그러나 비 진리는 평범, 그 이상이 아니라 경탄스러운 것이다.
추방된 동굴,
추방된 그랜케뇬을 누가 발견했는가?
본래는 보이지 않는 곳에 있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같다.
비 진리는 보이지 않기 때문에 비 진리다.
설정이 주는 강력한 효과에도 불구하고 &lt;정말 그러한가!&gt; 이다.
아이스타인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되자
아! 보이지 않는 것이 훨씬 더 좋다고 경탄했다.
시인은 보이지않는것을 더 좋아한다.
그래서 시는 비 진리에서 경탄을 맞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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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4님의 댓글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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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위덕 ,,,  


와우! 우와!  - [강위덕 교수님의 시론] - 메인 코스의 정찬을 먹고 나니 기운이 남니다.


1.  사람은 발이 먼저 발육하고 죽을 때는 발이 먼저 죽는다.
발이 먼저 발육하는 태아는 발길질로 시를 쓴다.


아니!  발이 먼저 죽는것을 어찌 아셨습니까?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은데 . .)

'40년대, 초딩 시절에, 어머님께서 밖에서 놀고있는 어린 나를 부르시더니, 외 할아버지가 오후에 돌아 가실것 같으니

나가서 놀지 말고 할아버지를 지켜보라고 하시든군요!  숨을 거두시기 3시간전인것 같습니다.  발을 만저보니 짜겁든구요 . .

한 시간쯤 지나서 다리가 차겁고, 차~차~ 몸이 온기가 없어지면서 돌아가시든군요!

그때, 저는 발이 먼저 죽는것을 배웠습니다. (신기)

,,,,,,,,,,,,,,,,,,,,,,,,,,,,,,,,,,,,,,,,,,,,,,,,,,,,,,,,,,,,,



2)  시론:  깊고,  넓고, 높은 시의 세계입니다.

[후식]으로 . .



시와 과학…사실, 이론, 존재 (28)
[특강] 김우창 교수의 ‘길’과 ‘길’ 사이



석학 인문강좌
38. 시의 형이상학적 의미와 종교적 교리의 차이

‘광채 속의 불타’는 시이지만, 여러 가지 의미를 갖는다. 첫째, 그 제목만으로도, 종교적인 의미를 가질 수 것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시 이외에도 릴케에는 부처를 주제로 두 편의  시가 있다. 간단한 요약이 있을 수는 없지만, 한 시는 부처를 금빛으로 빛나는 존재로서 상상할 수 있지만, 그 금빛이 세속적인 욕망을 뉘우치면서 신도가 시주한 금붙이들로 하여 생겨나는 금빛이 아니라고 말한다.

부처의 빛은 어떤 의미에서든지 세속적인 것을 초월하여 존재한다. 그것은 세상과는 관계 없는 신비의 빛이다. 다른 또 하나의 시는 부처가 너무 멀리 있어서 근접하기 어려우나 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세계를 통괄하는 원리이며, 인간에게 그 신비에 복속할 것을 요구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 시가 함축한 의미에 대하여 ‘광채 속의 불타’는 보다 적극적으로 부처와 세계의 관계를 설법하는 시이다.

그러나 이런 시를 통하여 릴케가 불교에 대하여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가를 분명히 알 수는 없다. 그리고 사실상 이러한 시들이 표현하고 있는 것은 특정한 종교의 특정한 교리를 말하려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릴케에는 모하메드에 관한 시도 있고, 기독교적인 관점에서는 동의할 수 없는 기독교에 대한 발언이 많지만, 대체적으로는 그는 기독교적인 테두리에 안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확실한 것은 차세[此世]에 대한 강한 긍정에도 불구하고 그가 종교적인 심성을 가졌었던 시인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이러한 시들은 종교적인 심성의 표현이면서, 철학적인 그리고 심리적인 시라고 할 수도 있고 궁극적으로는, 또는 더 간단히 시적인 체험을 표현한 시라고 할 수 있다. 이 시적인 시는 형이상학적 의미를 갖는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광채 속의 불타’와 같은 시는 과학적인 관점에서 살피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다는 점이다. 조금 지엽적이라면 지엽적인 사항들이지만, 가령, ‘광채 속의 불타’는 오늘의 천체 물리학에서 말하는 많은 것을 가리키고 있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 시적 상상력이란 경험이나 그 법칙적 제한을 넘어 가는 어떤 이상한 심적 기능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시나 과학의 상상력의 중첩은 그것들의 사고의 근본이 그렇게 다른 것은 아니라는 느낌을 가지게 한다.

‘광채 속의 불타’가 말하고 있는 것은 우주의 일체성이다. 그 원리가 부처이다. 그러나 부처가 기존의 우주 속에 내재하는 원리이고 그에 한정된다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 부처는 창조된 것을 넘어가는 창조력이다. 그는 이 우주를 넘어가는 다른 우주를 만들고 있는 존재이다. 이것은 근년의 천체 물리학에서 더러 이야기되는 다우주(multiverse)를 시사한다.

이 시에서 부처의 원리를 물질적으로 나타내는 것이 태양인데, 이 태양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인 것으로 말하여져 있고, 다른 우주가 마련되고 있다고 할 때, 그 우주에 존재할 태양도 하나가 아니라 복수로서 이야기된다. 그리고 이러한 우주는 정지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무한하면서 또 그 속에서의 균형과 안정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변화 팽창하고 있다. 즉 여기의 우주는 ‘팽창하는 우주 inflationary universe’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광채 속의 불타’가 쓰인 것은 1908년인데, 이 우주 속에 존재하는 별들이, 태양을 비롯하여, 헤아릴 수 없이 많고, 빅뱅으로부터 시작한 우주가 지금도 팽창하고 있으며, 지구와 태양계가 위치해 있는 우주 밖에 또 다른 우주들이 있을 수 있다는 등의 과학적 우주론의 발견, 이론 그리고 추측들이 20세기 후반 이후에야 등장한 것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릴케의 시와  천체 물리학의 사고 사이에 존재하는 기이한 일치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시와 과학은 다 같이 존재론적 상상력에 그 근본을 가지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물론 이때의 상상은 공상(空想)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방법론적 엄밀성을 요구한다. 그 시적 수사의 화려함에도 불구하고, 릴케의 시와 같은 데에서 발견하는, 시적 기율이 요구하는 것도 과학적 사고의 기율에서 과히 멀러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이 기율은 앞에서 본 “새가 날아가는 공간….”에 시사되어 있는 공간과 사물의 관계에 대한 직관에 강력하게 시사된다. 거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무엇보다도 객관적 진리에 이르기 위한 자기를 버리는 ‘체념’이다. 이것은 시적 직관, 철학적 반성, 그리고 과학적 사고에 공통되는 근본적인 요구 사항이다. ‘광채 속의 불타’와 과학과의 일치-또는 과학에 어긋나는 것이 아닌 근접은 이러한 방법적 절제에 기초한다고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채 속의 불타’가 전하는 것이 과학이 아님은 말할 것도 없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과학의 관점에서만 본다면, 내용적으로 극히 빈곤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참으로 빈곤한 것인가? 이 시가 주는 감동은 어떤 다른 것에 못지않게 풍부하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것은 그 나름의 강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감동이란 감정 상태 또는 정서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지만, 이 시의 감동은 무조건 사람을 흥분시키는 그러한 감동이 아니다. 그것은 형이상학적인 감동이다. 그러면서 그것을 철저한 심미적 절제 속에 구현한다. 이러한 감동의 원인이 무엇인가를 설명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일단 말할 수 있는 것은,  매우 작은 설명 같기는 하지만, 이 시가 보여주는 심미적 완성감이 감동을 주고 설득의 힘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과학에서 볼 수 있는 이론적 증명이 없이도 어떤 메시지를 전달해준다.

완성감은 시적 형식에서나 수학의 증명에서나 물리학적 사고에서나 설득의 중요한-또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그것이 어떠한 연관으로 지적인 감동 그리고 이어서 정서적인 감동을 주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것이 감동의 중요한 요소인 것은 틀림이 없다.

     &lt;김우창 전 고려대 영문과 교수&gt;


3.  다시 [원래의 주제]로 돌아 가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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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위덕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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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잘 들었습니다.
원래의 소제 !!  잡담하면서 주제을 잃지않으니 그것이 오늘의 매력입니다. 


이번에는 A--A'  ---B---A''  형식으로 할례의 그림을 그려 나갈까 합니다만 원고가 완성되는동안 덕담도 필요할 듯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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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위덕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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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고무신 한 짝


강위덕




 
길가에 버려진 낡은 고무신 한 짝


오랜 세월 걸어온 심장소리 울린다


맥박이 뛴다


저 몰입의 긴장


들숨 날숨 숨결따라


명창의 호홉과 북치는 소리 들리고


 


그 사이 짧은 침묵 같은 고독,


목 시린 삶의 빛깔이 숨쉰다 












시해설


"응" ~ 응응응 ~
"응"은 청각적으로 응응응 마치 응가 눌 때처럼 편하고 좋고, 진도 아리랑처럼 응응응 콧소리 가락이 관능적이다. 또 시각적으로도 상하곡선 직선 완벽한 조화이다. 세계 어느 문자가 이토록 신비하고 아름다운가.







이 시는 저의 문학 시부문 대뷔작 입니다만 진도 아리랑 응응응 소리를 들으면서 작시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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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4님의 댓글의 댓글

no_profile 김영환4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강위덕 ,,,  이 시는 저의 문학 시부문 대뷔작 입니다  -  몇년도인지요?  &lt;강위덕님의 내력을 죄금 살펴보았습니다&gt;- 참으로 좋은 세상에 삼니다!!
1.  
강위덕 - 시사랑 시의 백과사전www.poemlove.co.kr/bbs/board.php?bo_table=tb01&amp;sca=&amp;sfl=wr_1&amp;stx=������
157, 호수에 비친 나무 · 강위덕, 195, 2014-12-04,강위덕. 156, 흑해 앞바다에서 * · 강위덕, 159, 2014-12-04, 강위덕. 155, 흙(2) · 강위덕, 192, 2014-12-04,강위덕.


2.  
게시판 - 안승윤, 강위덕 대표작으로 새해 인사를 하면 어떨까 - Kasdawww.kasda.com/index.php?document_srl=113365
2014년 11월 23일 ... 안승윤 ( Harry Ahn ) 장로와 강위덕 장로의 대표작을. 신년 인사 카드로 만들었다. 1. 안장로님은 그의 최근 대표작 'Serenity 정온이 깃든 자연 ' 의


3.
미주시조사 | 상품 카테고리 찬양sijosausa.com/?product_cat=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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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4님의 댓글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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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위덕
@@@ - 안승윤 화백 - @@@

@@@ _  강위덕 화백 _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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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4님의 댓글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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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위덕 기회가 되시면금강산의 절경/묘경들 (사계절-하나님의 손 솜씨)을 화폭에 담으시기를 기대해 봄니다!
[천 국  시 민 의  사 랑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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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위덕님의 댓글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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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위덕 시 사랑 백과 사전 시인별보기에 보면 166개의 몇년전까지의 시를 올려놓았습니다. 앞으로 근래 작품도 올릴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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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위덕님의 댓글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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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위덕 히브리인의 관습과 전통으로 보는 견해와 신의 계시'로 보는 견해



할례를 마음으로 하라는 성경의 기록은 
새 언약의 도래가 아니라 
창세때부터 모세, 예레미아에 이르기까지 
경계도 없이 끈질기게 마음, 마음, 마음으로 이어져 왔다. 
할례는  마음으로 하라. 이다. 
마음은 대뇌에 있으므로 성소학적으로는 지성소이고, 
할례는 성소학적으로는 번제단이다. 
할례는 무겁고 충격적인 심리적 총량으로서의 사실감을 자기의 것으로 받아드리는 것이다. 
처음 믿음을 생각하라는  에베소 시대의 주된 특질은 
성 행위에 담겨있는 소박한 전제를 앞세운다. 
성행위는 천방지축의 초혼 때보다 
잇빨 빠진  호랑이 시대에 돌입 할수록 
처음을 상기케 하는 좋은 실습장이다. 
행위의 오르가슴은 해가 갈수록 농도 깊은 오르가슴으로 발전하기 때문이다.
 이 논리는 할례(번제단)에서 마음(시은소)에로의 조감도이다. 
이 논리가 융의 심리학적 설명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실험 할 수 있는 구속적 경륜의 예행 실습장이다. 
믿음의 세계는 변화하는 세계이다. 
똥 눌 때와 끝난 후의 마음이 다르듯 
행위와 비행위의 차이는 
변화를 관류하여 흐르고 있는 동질성이다. 
할례로부터 마음에로의 심리적 감성은 
모든 사람이 다르기 때문에 생략 하더라도, 
이런 전제들이 당연한 결과로  치닫는 
행위 위에 따르는 행위라 할지라도 
이 논리는 행함으로 말미암는 의가 아니고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개념이다. 
할례에서 행하고 마음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행함이 있되 마음으로 하라는 감성법은 하나님이 세우신 믿음의 경이다.



시간의 육신이 부서지고 있다. 
들쥐들이 갉아먹은 뒤뜰같다.
논리의 분쟁을 제기하는 나무들에
구멍이 뚫린다. 
나무 잎이 흔들이는 소리가 보인다
나무 잎과 나무 잎 사이로 도둑이 들더니
도둑이 나뭇잎이 된다.
보아야지, 보아야지
듣지말고 보아야지
직접 보아야지


남녀 행위로 논문을 써서 박사학위를 받는 학도가 총각이이다.
제까짓 게 뭘 안다고
가장 불길한 눈은 보지 않는 사람이다. 
직접 보아야한다는 결의와 믿음, 보지 않는 것은 불길한 길이다. 
할례를 거부하는 총각박사는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관념을 즐긴다. 


동내의 끝에 가면 풀밭속에 마을의 발이 보인다. 
주저앉은 마을의 바짓가랑이에도 
허여므리한 발이 보인다. 
할례는 잘생기든 못생기든
종일 
죄 죄 죄하며 
내리는 눈보라 속을 거니는 것이 아니라 따뜻한 구들목이다.



 할례의 미학은 인류 구속의 3대 대 사건 속에 포함되어 있다. 
이 삼대 대 사건은 화산폭발보다도 태풍이 동반된 엄청난 사건이다. 
오순절의 목적은 성령의 역사이지만 
성령의 역사는 포장에 불과하다. 
포장 속에 들어 있는 알맹이는 할례와 시은소이다.



* 일차 대 사건 ;
천지창조(할례,)-----------------선악과



* 2차 대 사건
시내산(할례)-------------------십계명



 * 3차 대 사건
다락방(할례)-------------------사랑




 창세기 3장 24절은 범죄 이후 그들이 제물을 드릴 장소를 제공한다. 
이 절에는 하나님이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로부터 2500년 후 그 그룹들은 지성소의 시은소 위에 두 그룹으로 등장한다. 
번제단으로부터 시은소의 사건이다.
“사람의 타락 후에 생명나무를 지키도록 즉시 거룩한 천사들이 명령을 받았다. 
이 천사들 주위에는 번쩍이는 칼 모양의 광선이 빛났다".
“하나님의 영광이 그룹 천사들이 경비하는 낙원의 문에 나타났다." 
하나님의 영광이 그룹 사이에 나타났으며 
후에는 이것을 &lt;쉐키나&gt;라고 불렀다. 
아담과 그의 아들들은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하여 이곳으로 나아 왔다.
이곳에 저들의 제단이 쌓이고 저들의 제물이 바쳐졌다. 
가인과 아벨이 제물을 가져오고 하나님께서 저들과 교통하시려고 내려오신 곳도 이곳이었다.

 하와는 참으로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올마다 하늘의 은하수처럼 포근하고 넓고 귀품이 있었다. 
우주와 같은 섬유질 조직처럼 꼬아 만든 머리카락 속으로 치렁치렁 윤기가 흐르고 있었다. 
염색채 지도 완성에 대하여 마귀가 하와에게 설명했는지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신비롭고 아름다운 하와에게 
선악과 밑에서 제한된 생활은 하는 것은 영원한 삶에 굴레를 씌우는 것이라고 말한다. 
마귀의 꼬임을 받은 하와는 
신의 완전성에 대하여 황홀해 한다. 
하나님의 도움 없이도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와는 왜 혼자서 선악과의 근처를 서성이었는가?
 번제단이 있는 곳에 시은소가 있어야하고, 
할례가 있는곳엔 마음이 있어야했다.



"혼자"



다음은 신문 사회면에 기사화된 실화 이야기다. 
혼 전 미녀가 혼자 살았다. 
결혼 굴레가 싫어서 혼자 인기를 누리며 살았다. 
그러다가 몸 잃고 돈 잃고 함정에 빠져 사형대에 올랐다. 
배심원들은 그의 미모 때문에 살리자는 의견이 제시됐다. 
그러나 예쁘다고 죄를 묵고 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내려져 
결국 그는 형장의 이슬로 살아졌다. 
이 기사를 읽으며 하와를 생각해본다. 
꼬임을 받았다는 공통점 때문에 내 마음에 분통이 인다.



 할례는 불문율이다. 
비단 성문화 되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절대법인 십계명을 감성으로 접근시켜나가는 것은 
예수께서 가르키신 심비의 언약이다. 
율법을 감성으로 이해되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율법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오늘 날 많은 기독교인들은 
감성과 이성의 궤리 때문에 해매고 있다. 
왜 하나님은 율법의 강령을 사랑이라는 단어로 함축시켰는가? 
율법의 요구를 감성으로 이해시키려는 노력은 할례의식이다. 
감성법은 결국 하나님의 사랑이란 감성법을 통해서 사회법으로 귀화시킨다. 
의학공부를 하여 박사학위를 받지 않아도 
인간의 생리적 변화를 스스로 습득하여 
화장실 가고 싶을 때 화장실에 가고 
배가 고플 때, 먹는 것은 
노력으로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본능이다. 
유대인들은 모세의 오경에 바탕을 둔 사회법을 가지고 있었고 
또한 로마법에 의한 사회법을 공용하고 있었다. 
간음한 여인을 놓고 
유대법과 로마법을 교묘히 이용하여 
예수님을 시험하려 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사회법을 이용해 답하셨다(요 8:5). 
유대인의 사회법은 모세오경에 기초했다고는 하지만 
이 법의 내용을 보면 모든 국가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것이다. 
이스라엘에는 사회법 이외에도 
의식법이 있었는데 
그 법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과 미래에 다시 오실 예수님을 가리키기 위해 제정되었다. 
십계명과 안식일 존폐 논란이 벌어질 때 
이 의식법은 항상 그 중심에 있었다.
 안식일 준수론 자들은 십계명을 의식 법으로부터 분리시키려고 한다. 
그래야 십자가로 인해 안식일계명이 폐하지 않았음이 증명될 것이기 때문이다. 
안식일 폐지론자들은 십계명을 이 의식법과 합치려 한다. 
랍비의 법 본문 이해를 위해 바리새인들의 학문적 틀을 이룬 랍비들은 
모세 오경의 법들을 그들 나름대로 해석하여 지켜왔는데 
처음에는 구전되어 내려오다가 
나중에는 책으로 기록되었다. 
  반면에 랍비의 법은 안식일을 준수하는 방법을 논할 때 
단골로 등장하는 주제이다. 
모세의 의식 법은 안식일의 존폐문제와 관련이 있는 주제이고 
랍비의 법은 안식일준수의 방법문제를 다루고 있다.
 신약에 기록된 예수님과 랍비들의 안식일에 관한 논란은 
의식법에서 비롯되었을까? 아니면 랍비들의 전통에서 비롯되었을까? 
단연 랍비들의 전통이다.
 의문의 법은 총 613개가 있다. 
그중 365개의 명령문으로 된 법이 있고 
나머지 248개의 법은 부정적 언어로 되어있다. 
여러분은 치치트라는 히브리 용어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 치치트를 한국성경에는 술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은 랍비들의 옷에 수실처럼 매달아 하나님의 법을 지키려는 의지를 상징한 것이다. 
옷은 성도의 행위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치치트는 우리의 몸에 기능적 역할을 하기도 한다. 
우리의 몸은 365개의 경혈이 있고 
248개의 뼈가 있다. 
합하면 613이다. 
경혈은 우리ㅡ이 몸의 오장육부를 관할하고 
뼈는 몸을 지탱하는 지주의 역할을 한다. 
이것은 훈련과 노력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다. 
몸이 알아서한다. 
613개의 율법이 우리의 몸을 관할하듯 
십계명은 우리의 심비에 기록 되여 
대뇌의 기능으로 하나님을 경외한다. 
이것이 곧 감성법이며 
심비에 기록된 하나님의 법이다. 
안식일의 존폐문제는 이미 식상한 주제이다. 
타성에 젖어있을지 모르는 우리의 안식일 준수 문화에 대해 
은혜롭게 다루는 것이 더 유익할 듯싶다. 
로마법, 모세 법, 랍비들의 법들이 
1세기 당시 로마의 지배권 아래에 있는 팔레스타인 안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에게는 
지대한 영향을 주고 있지만 
팔레스타인 밖이나 제국 로마의 국경에서 떨어진 지역에 사는 이스라엘 종교를 따르는 많은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큰 역할 못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따른다고 공언하는 사람들은 
로마법, 모세 법, 랍비들의 법에 영향을 받는 부류의 사람이건 아니건 상관없이 하나님의 십계명을 고수하려고 하였다.
 로마법이란 
로마가 부족연맹체 형태의 소도시국가로 시작하여 
대제국으로 발전하여 멸망할 때까지의 장구한 시간 동안 변천, 발전한 모든 법을 말한다. 
학문으로서의 법학(legal science, Rechtswissenchaft)으로까지 끌어올린 
고대 사회에서는 로마가 유일하다. 
기원전 451-449년에 제정된 12表法, 
그리고 기원후 529-533년 동로마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에 의해 편찬된 로마법대전이 
그 시작과 종결이 될 수 있다. 
로마법학의 최고 전성기라 할 수 있는 시기는 기원후 1-2세기이며, 
이 시기의 법을 고전 로마법(classical roman law)이라고 부른다. 
이처럼 로마법은 기원전 5세기에서 기원후 6세기에 이르는 
약 1000년간 발전 유지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로마법 대전을 통하여 우리에게까지 전해지고 있는 것은 
일부에 불과하지만, 
그 일부만 하더라도 엄청난 분량이기 때문에 
로마법은 우리를 그 양적인 측면에서도 압도한다. 
로마법은 넓은 의미에서 고대 로마에서 시행된 법만이 아니라 
18세기 말까지 유럽 전체에서 사용된 사법제도라고 볼 수 있으며, 
독일과 같은 국가에서 로마법의 실제 적용은 더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현대 유럽 국가들과 
그 국가들로부터 영향을 받은 나라들의 사법제도는 
로마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으며, 
특히 민법에 있어서의 영향은 더 크다. 
영국은 로마법의 영향을 상대적으로 적게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영국과 북아메리카의 관습법은 로마법에 의존하는 정도가 크다.
 “의문의 율법이 더 이상 지켜지지 않게 된 후에도 
바울은 그것의 참 위치와 가치를 나타내 보였고 
메시아의 초림 때까지 사람들의 마음속에 간직되어 살아남아 있었다”(부조와 선지자, 367참조). 
이 구전법의 이름은 ‘걷다’라는 뜻의 ‘할라카(halakah)’로 알려졌다. 
랍비들은 백성들이 ‘할라코트(halakoth: halakah의 복수)를 고수하면 
613개의 율법의 길을 걷게 되리라고 생각했다. 
비록 그것들은 처음에 구전의 형태였지만, 
나중에는 수집되어 책의 형태로 기록되었다. 
예수님 당시의 해설들 가운데 일부는 ‘미드라쉬(Midrash)’로 알려진 해설집에 남아있고, 
다른 해설들은 ‘미쉬나(Mishnah)’로 불리는 법률집에 기록되었다. 
오랜 세월 동안 심지어 오늘날에도 수많은 경건한 유대인이 
이 법들을 엄격하게 지키려고 노력한다. 
십계명은 1세기 유대인들에게 알려진 모든 법체계를 능가했다. 
613개의 모세법을 달달 외웠던 바리새인들조차 
십계명의 중요성을 인정했다. 
미쉬나의 타미드(Tamid)장에는 
날마다 십계명을 암송하라는 랍비의 법이 있다. 
사실 예수님과 동시대의 유대인 철학자 필로는 
모든 성경의 법에서 십계명이 차지하는 핵심 위치에 대하여 한 권의 책을 저술하기도 했다.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것은 
십계명이 의문의 법인가 하는 문제이다. 
의문의 법은 제사제도, 시민법, 이런 것들이 의문의 법이다. 
의문의 법은 폐지가 되었으나 
도덕적인 법은 폐지가 되지 않았다는 흐름은 
마지막 시대까지 이르고 있다. 
그러나 고린도 후서에는 의문의 법에 대하여 돌에 새긴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돌에 써서 새긴 것이 무엇인가? 
십계명이다. 
구전으로 내려오던 의문의 법과 
돌비에 새긴 십계명을 포함하여 모두 의문의 법으로 명시된 것이다. 
의문의 법이라는 것은 문자 화 되었다는 뜻이다.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군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을 인하여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영의 직분이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영광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을 인하여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 (고후3:6-11절)”

 새 언약이 누구인가? 
예수 그리스도이다. 
옛 언약은 글로 명문화 한 것이다 
예수는 글로 써서 새긴 것이 아니라 영으로 한 것이다 
새 언약은 사람을 죽이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살리는데 목적이 있다. 
성령께서 심비에 새긴 법을 깨우쳐 성령에 순종케 하여 하나님의 법을 이루어지게 하신다.
 
 






 빙산의 일각이라는 말이 있다. 
바다에 떠 있는 얼음덩이 조각이 작게 보여도 그 밑에는 10배가 넘은 크기의 얼음이 숨어 있다. 
언어학에서는 얼음덩이를 &lt;형식지&gt;와 &lt;암묵지&gt;로 분류한다. 
형식지는 들어난 일각을 말하고 
숨어있는 엄청난 크기의 빙벽을 암묵지라고 말한다. 
율법사나 바리세인들처럼 모세의 율법을 통달한다 할지라도 
빙산의 일각에 불가하다. 
막상 지혜와 통찰력의 보고(寶庫)는 바다 밑에 숨겨져 있는 암묵지이다.

 안식일과 할례문제는 너무나 방대하여 
평생을 공부해도 입이 딱 벌어질 엄청난 주제다. 
그럼에도 이 법들은 유대인들의 유수(幽囚)기간에는 지킬 수 없었던 것들이다. 
할례는 번제단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성소의 뜰에는  번제단이 있고 
성소를 거쳐 지성소에 이르면 법궤가 있다. 
중간에 있는 성소의 첫째 칸은 법궤에 이르는 통로이다. 
사람으로 친다면 오장 육부이다. 
첫째 칸 성소에는 떡상이 있고 7 촛대가 있고 향단이 있다. 
향단은 떡상과 7 촛대에서 발생된 사연을 흠향하여 지성소로 내 보낸다. 
향단의 직접적인 상징은 기도인데 
향을 피우면 향의 연기가 첫째칸 성소를 채우고 커튼을 타고 지성소의 공간을 채운다. 
결국 성소와 지성소는 향단의 연기로 씻어낸 죄의 흔적을 파악한다. 
십계명은 죄인을 사형대에 올려놓는 역할을 하지만 
십계명을 법궤안에 가두어 놓고 정금으로 된 뚜껑으로 법궤를 덮고 
궤안에서는 생명으로 꿈틀거리는 아론의 삯낸 지팡이로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의 죄을 없에고 새생명을 부여한다. 
시은소에서 흘러나오는 쉐키나의 광체는 
향단의 연기를 감지하는 센서의 역할을 한다. 
만일 시은소가 이 역할을 하지 않는다면 
결코 하나님은 지성소에 임재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의 몸 구성도 성소와 같은 역할을 한다.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을 모시는 지성소이다.”
 이 거룩한 사상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영물이기에 가능하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은 인간 성전 사상을 주지시키면서 
우리의 몸으로 하나님께 산제사를 드리라고 명하신다. 
우리의 마음은 바로 성전이기 때문이다. 
결국 번제단에서 새로 태어나는 것과 똑 같은 원리로 
할례는 번제단과 십자가를 상징하며 
할례를 통해 잉태된 신생아는 
엄마의 배 속의 과정을 통해 새 생명으로 탄생된다. 
인류가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는 결코 새 생명을 얻지 못하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이 확호한 구속의 진리는 
할례를 통해서 입증된다. 
성기를 통하지 않고는 새 생명이 태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우연인가? 섭리인가? 
우연에 돌리기에는 너무나 심오한 성소의 메시지가 
나의 심장 중심부를 강타한다. 
번제단은 양을 잡아 제사를 드리는 곳이다. 
거기서 죽은 동물의 피는 제단 바닥에 뿌렸으며 
그리고 그 몸은 제단 위에서 불로 태워졌다. 
그곳은 죽음의 장소로서 성소를 향하여 나아가는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이 번제단을 통과하지 않고는 성막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번제단처럼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모든 죄인들을 차단한다. 
성소의 번제단은 죄지은 한 인간의 생명이 새롭게 태어나는 곳이다. 
죄 지은 인간은 반드시 “죽는다”라는 법칙은 
죄를 속하기 위해 양을 잡아야 한다는 대속의 원리를 만들었다. 
바로 이 행위적 봉사가 번제단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번제단의 봉사는 새로운 생명을 뜻하며 
번제단에서 태어나 시은소에 이르기까지 충분히 자라나 
비로소 “인간”이라는 새로 성숙된 하나님을 닮은 인간의 모습이 지성소에서 탄생된다. 
할례와 번제단과의 목적의 동일성은 
십자가에서만 찾을 수 있다. 
할례 행위는 남자(man)의 생식기의 표피를 잘라내는 물리적 봉사 의식이다. 
이로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인 이스라엘과 이방과를 구별 짓는다. 
이방인과 구별 짓는다는 의미가 무엇인가? 그 의미는 명백하다. 
할례는 구속의 경륜이다. 
반면에 이방인은 구속주가 없다. 
번제단에서 양이 피를 흘려야 되었던 것처럼 
할례는 돌을 쳐서 이 성기에 피를 흘려야 했다.
이 행사는 하나님께로 나아가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 해당된다. 
이것이 곧 할례이다. 
무엇보다도 할례는 언약의 공동체에 가입하는 행위이다.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에게 내린 명령은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에 언약의 표징이니라.”였다(창 17:11). 
안식일이 너와 나 사이에 표칭인것처럼 할례의 의미는 하나님과 나 사이의 표징이다. 
바울은 아브라함의 할례를 그의 의를 인친 것이라고 말했고(롬 4:11). 
히브리인들이 언약의 아들임을 가리키는데 기여했다. 
오늘날 유대교에서 할례식을 가리키는데 신명기 30:6의 하단 절에 할례는 
곧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예식은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하며 
따라서 예수님은 생명의 시여 자 이심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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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4님의 댓글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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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위덕 감사합니다!
한 두 시간 공부할 주제가 아니군요.(놀램)

프린트해서, 조목 조목 공부한 다음에, 대화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의학도이신 이상구 박사는 - [세포 DNA 성소론]을 강변하고,
2. 미학도이신 강위덕 박사는 - [할례 C 성소론]을 심층적인 미학으로 풀이하고,   흥미 진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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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4님의 댓글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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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위덕 ,,,  
시간의 육신이 부서지고 있다. 
들쥐들이 갉아먹은 뒤뜰같다. 
논리의 분쟁을 제기하는 나무들에 
구멍이 뚫린다. 
나무 잎이 흔들이는 소리가 보인다
나무 잎과 나무 잎 사이로 도둑이 들더니
도둑이 나뭇잎이 된다.
보아야지, 보아야지
듣지말고 보아야지 
직접 보아야지
,,,,,,,,,,,,,,,,,,,,,,,,,,,,,,,,,,,,,,,,,,,,

동내의 끝에 가면 풀밭속에 마을의 발이 보인다. 
주저앉은 마을의 바짓가랑이에도 
허여므리한 발이 보인다.

할례는 잘생기든 못생기든 
종일 
죄 죄 죄하며 
내리는 눈보라 속을 거니는 것이 아니라 따뜻한 구들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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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위덕님의 댓글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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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위덕 동질성과 이질성의 두 불꽃
동질성과 동질성의 연합, 연합
동질성과 이질성의 연합, 에큐메니칼
두 불꽃의 무대
더러움 타지않는 검정와이셔츠를 좋아해요.
암울한 시대의 삶을 삭이는 삶의 지혜입니다.
저는 예수를 사랑합니다.
따라서
저는 예술을 사랑합니다.
예수의 표절 예술, 아마 “ㄹ” 또 다른 이름의 예수일런지도 모릅니다.
히브리인의 관습과 전통으로 보는 견해와, 신의 계시'로 보는 견해
장미를 장미로 보는 견해와 장미의 뒤에 숨어있는 실체!
눈으로 보는 것과 마음으로 보는 것이 차이겠지요.
바울은 평생 먼곳을 바라보며 현실과 싸웠는지도 모릅니다.특히 갈라디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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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위덕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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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면적 그림자로서의 성소의 평면도와 
직립적 인간의 투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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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위덕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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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와 인간의 평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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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위덕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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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이번 님의 답글을 통해서 많은 재료들을 수집하게 된것을 아주 기쁘게 생각합니다. 이런 자료들을 사용하게 될 때에 님의 허락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참으로 참으로 감사합니다.
저는 이상구 박사님의 펜입니다만 그런 거대한 분에 비유하시다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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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4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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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례]라는 열차를 타고
아름다운 간이역들을 통과하면서
[시]라는 간이역을 통과할 때가 아름답고, 보람이 있었습니다.


세상에는 수 많은 시인과 시들이 있습니다.
님의 200여 시중에 No. One . .
세상에 존재하는 시중에서, 가장 사랑하는 시 한편(No. 1)을 소개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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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4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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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POD  -  01112015  (Study of Chrome)  (v108)
Cataclysmic Dawn 
Illustration Credit &amp; Copyright: Mark A. Garlick (Space-art.co.uk)Explanation: Will this dawn bring another nova? Such dilemmas might be pondered one day by future humans living on a planet orbiting a cataclysmic variablebinary star system. Cataclysmic variables involve gas falling from a large star onto an accretion disk surrounding a massive but compact white dwarf star. Explosive cataclysmic events such as a dwarf nova can occur when a clump of gas in the interior of the accretion disk heats up past a certain temperature. At that point, the clump will fall more quickly onto the white dwarf and land with a bright flash. Such dwarf novas will not destroy either star, and may occur irregularly on time scales from a few days to tens of years. Although a nova is much less energetic than a supernova, if recurrent novas are not violent enough to expel more gas than is falling in, mass will accumulate onto the white dwarf star until it passes its Chandrasekhar limit. At that point, a foreground cave may provide little protection, as the entire white dwarf star will explode in a tremendous superno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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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위덕님의 댓글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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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4

상대성 원리 *




 
강위덕







 




 
아무것도 아닌 흙덩이에 바람이 잠시 먼지를 피우고 지나간다 



 

 
어떻게 살다보면 엄청난 비바람도 맞닥트릴 수 있는 엉킨 실밥에 빨간 색의 생명이 스며든다 



 
 
총총히 박혀 있는 티끌 속에는 




 
광막하게 펼쳐진 우주가 찬란하게 빛난다 




 
나는 노래를 불렀다 




 
꿈틀거리는 그 뒤에 희미해지는 생의 그림자가 




 
엉키며 함께 보낸 시간이 별의 꿈으로 총총해지고 




 
절망은 어둠과 더불어 나를 위로한다. 




 
염색체의 줄기를 타고 굽이굽이 흐르는 푸른 물살의 염기서열은 




 
억 겹에 자승하여 아직 도 끝나지 않은 이야기 속에 머물고 있고




 
숨겨진 가슴의 불이 쓰러지고 




 
내 삶은 아직도 흔들리는 거기에 있다 




 
희미하게 드러나는 마음과 육체의 능선에는 




 
숫자가 별처럼 박혀 있어 거기에서 분출하는 에너지가 없어져 버린 나를 찾고 있다 




 
격변의 새벽, 백색왜성은 전자 축퇴압을 통해 중력붕괴를 이겨내고 있다*. 




 
속도에 제곱한 질량을 입으로 삼켜 버리니 




 
짭짤한 세상이 무너져 가다가 벌떡 일어선다 




 
에너지는 팽이처럼 뱅글 매를 맞고 




 
이루지 못한 전설의 한쪽 끝을 잡고 




 
영원히 마르지 않는 대지위에 흐른다 




 
바람에 일렁이는 눈빛, 생겼다가는 사라지는 




 
그런 무너짐의 연속, 극복하지 못한 절망의 깊은 모습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치지만 




 
가장 안타까운 건 세포가 흔들리는 일, 




 
아직 견고하지 못한 뿌리로 작은 바람에도 견디지 못하고 온몸으로 휘청거릴 때 




 
달려오는 수많은 유혹의 물질들은 




 
진실의 순간조차 유린당하여 침몰한다 




 
호수는 침몰하는 물체에 중심을 내어주고




 
과녁에 명중된 물체는 고요와 격랑의 아득한 존재 속으로 깊이 빠져든다 




 
염기는 새 식구가 된 내가 주은 심장의 구겨진 파편 잔해를 위해 




 
까닭 모를 물꼬를 트고 




 
상대성 원리는 비린내 나는 호수에 굴절하고 있다 *




 



 


 
 


 


*  상대성 원리는; 1905년 당시 26살의 무명과학자였던 아인슈타인이 발표한 상대성 이론


* 광파(光波)나 음파(音波)가 한 매체에서 


다른 매체로 들어갈 때에 


경계면에서 이제까지와 다른 방향으로 나가는 현상을 말함


* Chandrasekhar limit; 천체물리학에서 백색왜성(白色矮星)이 


이론적으로 안정할 수 있는 최대 질량. 


이 한계값은 1930년에 이것을 공식화한 인도 태생 미국의 천체물리학자 


수브라마니안 찬드라세카르의 이름을 따서 붙였다. 


찬드라세카르는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의 원리를 이용하여 


축퇴된 전자 가스에 의해서만 유지되는 백색왜성의 질량이 


태양질량의 1.44배보다 더 크면 안정할 수 없음을 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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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위덕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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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 일라스트레이션에 카피 라잇이 있다면 제가 또다는 삽화를 창작해야 되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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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4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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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백, 시인이 될바엔
@@@ 살아있는 그림! . . . 생명이 있는 시  @@@

부탁을 드리면서 ! ! !  할례의 물건이 인간 생명의 시작이듯이 . . 
,,,  정연출 화백 노송 풍경화- 솔거의 부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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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4님의 댓글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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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4 ,,,  
[학습] . . 휴식시간, 중간 중간에 '음악 감상'도 하면서 . .
        @@  재스민 최, 신이 내린 완벽한 연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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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위덕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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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연주 공간의 기능이 이번 에 도착한 간이역에서 연주되고 있군요. 정연출 화백의 전시 공간에서 소리꾼으로서의 활약  재스민 최의 클레식 연주자, 
그외 감성적 멀티연주, 귀신일까 사람일까의 이번 간이역 오락 시스템, 참으로 흥미로웠습니다.
화백, 시인이 될바엔
@@@ 살아있는 그림! . . . 생명이 있는 시  @@@

부탁을 드리면서 ! ! !  할례의 물건이 인간 생명의 시작이듯이 . .
,,,  정연출 화백 노송 풍경화- 솔거의 부활인가?
참으로 살아 있군요.
어떤 바이올린니스트 왈 나도 본래는 클레식을 했어요
그런데 이제는 흥미를 점목, 바오린으로 팝,롹, 쨎, 등등 현대?!%^7#(*.*)
와우 호화롭군요.
 
연출능력은 없어도 감탄킁력은  아직도,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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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위덕님의 댓글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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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위덕 저도 약 40년 전 동양화 생활을 한적이 있는데 미국에 온후 서양화로 전향
지금은 삼육대 총장실에 걸려 있다고 하는데 크기는 72인찌에 46인찌 화선지에 묵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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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위덕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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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 빠진 일요일
강 위 덕


시답잖은 TV에 한 눈 팔려 킬킬
감정의 국수 가닥 훌훌 삼켜 넣다가 그것도 지겨워 책을 뒤적거려 본다 그래도 불 꺼진 창처럼 식어버린 마음은 달궈지지 않는다 밖을 보니 동면하는
뱀처럼 가로수 가지엔 생선뼈 같은 나뭇잎 몇 개가 살충제에 쏘인 나방이처럼 살 사르르 떠는 몇 점 아슬아슬하다 채널을 돌리던 아내가 "축구,
축구" 하기에 TV 앞에 다시 앉았다 TV에도 아슬아슬한 장면이 살얼음처럼 퉁기고 있었다
&nbsp;
"앗, 센터링 지금
우리 선수가 뒤로 볼을 넘기고,
다시, 논스톱으로, 왼발로, 슛! 꼬~ㄹ-------앗,

헛것들을
끌어안는 적막 속에 살아 있는 건 아나운서의 괴성! 숨 가쁘게 질주하던 초조가 폭팔하는 소리다 싱겁다 축구도 우습게 끝이 났다 타다 남은 재가
폭삭 꺼지듯 힘겹게 불 붙여 보려던 마음도 폭살 내려앉는다

조이고 싶어도 조여 지지 않는 不隨意筋인데도 마음
사그라지지 않는 난감한 일요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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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위덕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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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에 님의 지성이 무서워 감히 답글 한번 못 달았는데 이렇게 인간미가 있군요. 다시 시한수




육십이순(六十耳順)
강위덕





몸,
저문 몸속에
셀폰에 찍힌
1자 하나
늘어져있다
간에 고춧가루 흣뿌리고
심장을 불태워
새카맣게 타버린
1자 하나
늘어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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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4님의 댓글의 댓글

no_profile 김영환4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강위덕 ,,,  
육십이순(六十耳順)
강위덕
,,,,,,,,,,,,,,,,,,,,,,,,,
耳順?  -  궁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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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위덕님의 댓글의 댓글

no_profile 강위덕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강위덕 논어에 나오는 말인데 직접적인 뜻으로서는 귀가 순해 진다는 말이지만
개떡같은 성질도 나이들면 성질이 순해지고 얌전한 사람이 된다는 말입니다만
그래도 60은 넘어야 효과를 발하는 성격 치료법이지요.
저도 현대의학 방법으로 할례를 받았으나
성격은 꽃꽃하더니 이제사 잇빨빠진 호랑이
신세타령이지요.
 
한국에 살때 어느 한분이 하수도에 빠져 불행하게도 사망을 했는데
지나가던 어느 노인왈
 
유유화화(柳(柳花花)로다
 
 
버들유자 2개  꽃화자 2가  보들보들하더니 꽃꽃해 졌다는 사망진단이지요 ㅎㅎㅎ
 
 
 
 
두번째질문
    히브리인의 관습과 전통으로 보는 견해와
  신의 계시'로 보는 견해 에 대한 질문은 논문 수준의 답변이 필요한듯 합니다.


어릴 때의 저의 아빠의 질문과 비슷합니다. "너 배 아파" "응"
배는 아픈데 밥 한그릇을 다 비웠습니다. 아빠는 내가 배가 아픈것이 아니라 배가 고프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듯
배아픈 나에게 밥을 처방해 주었습니다.
깔끔이 아프던 배가 평안하고 풍만해 졌거든요.


답변을 알고 있는 어르신네쎄서 나의 배고픔을 채워주려는듯 아름다운 처방으로 알고 성심껏 답변을 찾아 올린 것입니다.
님의 질문처방이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니  이번 여행의 종착역이 되는듯 아쉬움이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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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4님의 댓글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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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위덕 ,,,  고맙습니다!  감사드립니다!님의 덕분에 많은 것을 배우고, 게시판 공부를 재 정리하는 시간이였습니다.
無爲自然  無用之用
人爲를 버리고 자연에 따르라.  이것이 하지 않고도 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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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위덕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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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 않는것도 행위이지요
아담하고 아름다운 행위이지요.
창조의 새로운 터전이기도 하구요..
 
고맙습니다!  감사드립니다!님의 덕분에 많은 것을 배우고, 게시판 공부를 재 정리하는 시간이였습니다 기립박수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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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4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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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t;Over time&gt; 올시다! ㅎ ㅎ 



강위덕
2015.01.12 15:11


하지 않는것도 행위이지요
아담하고 아름다운 행위이지요.
창조의 새로운 터전이기도 하구요..


    하나님꺼서 사람에게 3 눈을 주셨습니다.

1. 보는 눈 (肉眼)

2. 생각할수 있는 눈 (心眼)

3.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눈 (靈眼)



강위덕님은 이 3눈의 소유자 이심니다! (감탄) ~ ~ "하지않는것도 행위'로 볼수 있는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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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위덕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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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이 없는 대화가 있는 것은 님이 주신 답글들을 듣고 보고 느끼고, 보고 듣고 느끼고 100번 200번을  열어보고 들어보고 느껴보고
끝이 없는 재료들!
 성도들이 아침에 일러나면 기도하듯이
화가가 화랑에 도착하면 뎃상으로 하루의 일과가 시작되듯이!
카스다를 열먼
생략
 
 
다음은 김수영시
 
 
풍경이 풍경을 반성하지않는 것처럼
곰팡이가 곰팡이를  반성하지않는 것처럼
여름이 여름을 반성하지않는 것처럼
속도가 속도를  반성하지않는 것처럼
출열과  수치가 그들 자신을 반성하지않는 것처럼
 
바람은 딴데서 오고
구원은 예기치 않는데서 오고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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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위덕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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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무제
김연화4
 
 
肉眼
心眼
靈眼
 
 
저도 시한수;  육안(肉眼)
 
 
뒷 풍경
강위덕
 

여인이 내 옆을 지나간다 그의 뒷모습이 궁금하여 흘깃 뒤를 돌아다보니 그 여인의 뒤에도 풍경이 있다 불현듯 상식 뒤편을 상상해본다 한걸음 뒤에 물러 있으면 여인의 궁둥이처럼 이렇게 마음이 평안한 것을, 앞으로만 능숙했던 근육질, 승부의 핏발을 가라앉히고 마음 부대끼는 경계도 없는 뒤편의 풍경, 치렁치렁 머리칼은 어깨를 타고 개미처럼 짤쏙한 허리에서 멈추고 허리는 아기죽 아기죽 문자를 보낸다 근심 밖으로 잠깐 튕겨 나가도 좋겠다 앞서 걸어간 해와 뒤 미쳐 당도한 달이 비척 간에 얼룩지우는 파문은 심금이겠다 곽란의 길보다 더 헝클린 꿈결을 건너와서 허리와 궁둥이 사이에서 기아학적으로 속삭이며 사향노루처럼 참 아름답게 앞서가고 있다

그 여인을 돌아서 보는 순간, 그 여인의 뒤편이 나의 정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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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4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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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t;This is our daily bread&gt;    [독자 여러분들에게: 댓글이 장문일 경우 -  1) File Open, 2) Press 'End"  3) Page Up -2,3 번 정도]

,,,  
성도들이 아침에 일러나면 기도하듯이  (일어나면)
화가가 화랑에 도착하면 뎃상으로 하루의 일과가 시작되듯이!  (뎃상?)
카스다를 열먼   (열면)
생략

 AKAURA 小百合 Google+를 통해 공유
Our Father which art in heaven, Hallowed be thy name.
我们在天上的父,愿人都尊你的名为圣。

Thy kingdom come. Thy will be done in earth, as it is in heaven.
愿你的国降临,愿你的旨意行在地上,如同行在天上。

Give us this day our daily bread.
我们日用的饮食,今日赐给我们。

And forgive us our debts, as we forgive our debtors.
免我们的债,如同我们免了人的债。

And lead us not into temptation, but deliver us from evil: For thine is the kingdom, and the power, and the glory, for ever. Amen.
不叫我们遇见试探,救我们脱离凶恶,(或作脱离恶者)因为国度,权柄,荣耀,全是你的,直到永远,阿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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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위덕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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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ile Open, 2) Press 'End"  3) Page Up -2,3 번 정도]
신학란은 연구하는 난이기 때문에 가끔 답글이 길어질 수 있는데 윗  1) File Open, 2) Press 'End"  3) Page Up -2,3 번 정도 어떻게 작동하는지요.
알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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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4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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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지 보내기 학습 겸] . . 쪽지로 발송했습니다.


열어 보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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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위덕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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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ift를 눌리고 end를 눌리니까 끝이 되는군요. 쪽지 잘 받았습니다.
현대적 텍을 많이 가르쳐 주십시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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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4님의 댓글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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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위덕 강 장로님:
일주일 이상 열심히, 어렵게 농사한 농산물들이 - 안 보임니다!!
혹시 창고에 보관하고 계시면 . .
이-메일 [kimseoul8@yahoo.com]으로 전송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attachment 하시면 됨니다)


필자가 게시글이든, 댓글을 달 때는 세가지 기본요소를 염두에 간직합니다:
첫째는 - 독자들
둘째는 - 상대방
셋째는 - 본인인 자신,  제일 마지막에 줄을 세움니다.  (쉽지가 안아요!  실수를 여러번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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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위덕님의 댓글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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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위덕 농산물의 내용이 무엇인데요. 일주일의 원고라면 대단한 것인데요.
안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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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4님의 댓글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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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위덕 강 장로님:

일주일 이상 열심히, 어렵게 농사한 농산물들이 - 안 보임니다!!

혹시 창고에 보관하고 계시면 . .




    @@  강 장로님과의 [일주일 이상의 댓글과 답글들 - 52번] - 아름다운 댓글들이 없어졌습니다.

             궁금하군요!!

              바로 아래 "신학 &amp; 신학의 종류" 원글의 댓글에 [어느 정도] 재생을 학습해 보았습니다. (열어 보세요)


&lt;추서&gt; 마침 열려있든 한 Tab에는 [원글과 댓글들]이 살아 있어서, 재생/복사가 가능했는데
           중간에 작업을 하다가, 자판을 잘못 눌어서 사라저 버렸습니다. (섭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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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위덕님의 댓글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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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위덕 없어진 것이 아니라 어제저녁에 검토를 해 보니 답글이 길어지다보니 페지수가 증가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lt;&lt; 첫뻬이지  1/2/ 끝페이지&gt;&gt;
이렇게요 어제의 경우 2페이지를 눌리니까 답글 전체가 나오드니 오늘은 1 페이지에 나오는군요  아마 님께서 고쳤는가보다 생각했었지요.
아마도 기네스북에 신청할 정도로 오고가는 신학이 깊어졌었습니다. 참으로 님의 아름 다운 연구 재료와 일등 답글들이  참으로 소중한 시간이였습니다.
 
참으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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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4님의 댓글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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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위덕
게시판을 통해서도 - 소통과 대화의 중요성을 또 다시  배움니다.
오늘도 [게시판 기능]을 또 하나 습득하는 기회입니다.  독자들도 알고 싶을겁니다 (감사)
[첨부[보다도 더 편리한 방법인것 같습니다!


&lt;&lt; 첫뻬이지  1/2/ 끝페이지&gt;&gt;

    * [첫 페이지, 1, 2, 끝 페이지]로 댓글을  옮겨서, 게시/첨부하는 방법을 교시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  독자들과 필자가 배우는 시간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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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위덕님의 댓글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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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위덕 몇일전 카톡이 왔다. 몇초안에 답신을 보냈다.
그는 놀랐다고 했다. 헛일삼아 보냈단다. 시급한 문제를 전화보다 신속히 해결할 수 있었던 그의 요구에
첨단 문명으로 해결을 본것이다. 그는 내 나이를 알고 있기때문에 시급한 해결을 못볼 것으로 생각했단다. 
배움에는 끝이 없다고 생각했다. 카스다의 기능과 여러글을 통에 배우는 학도라고 말머리를 시작한 김영환님으로 부터 스승으로 모시고 배우려는 
나의 코드와 중력 상수하는 대목이다. 
 
 
 
시; 중력상수
강위덕
 

방주로 가는 대 장정,
달팽이 등에 무거운 짐이 있다
폭염으로 후물거리는 내 마음 서랍에
먼지 자욱한 엽서와 중력 상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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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위덕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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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taclysmic Dawn
Illustration Credit &amp; Copyright: Mark A. Garlick (Space-art.co.uk)Explanation: Will this dawn bring another nova? Such dilemmas might be pondered one day by future humans living on a planet orbiting a cataclysmic variablebinary star system. Cataclysmic variables involve gas falling from a large star onto an accretion disk surrounding a massive but compact white dwarf star. Explosive cataclysmic events such as a dwarf nova can occur when a clump of gas in the interior of the accretion disk heats up past a certain temperature. At that point, the clump will fall more quickly onto the white dwarf and land with a bright flash. Such dwarf novas will not destroy either star, and may occur irregularly on time scales from a few days to tens of years. Although a nova is much less energetic than a supernova, if recurrent novas are not violent enough to expel more gas than is falling in, mass will accumulate onto the white dwarf star until it passes its Chandrasekhar limit. At that point, a foreground cave may provide little protection, as the entire white dwarf star will explode in a tremendous supernova.

 
이 재료 때문에 곧 출판하려던 성소예수 제 2집 출판을 약 1년 연기하려합니다.
제료를 재공한 님의 협력부탁드립니다.
그러나 이 재료를 근거로한 저의 일라스트레이션 작품을 엘에이 전시회에 내놓을 생각입니다.
제목은 우주의 태 중력입니다.
이번 전시 는 한국의 임교수와 미국의 헬리안 교수와 저와 삼인전 프로젝트입니다.
 
그림의 구성은 많은 돌들, 돌들 사이로 물이 흐르고 사이사이 꽃이 피어있고 여기에 중력으로 추락한 여인의 누드상,
이 누드상은 마치 웅크린 아기의 태처럼 쭈그리고 있는 여인 뒷자태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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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4님의 댓글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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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위덕 @@@  창조주 여호와의 화폭(그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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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위덕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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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폭의 상단만 보이는 느낌입니다. 전면이 필요합니다. 책합해 주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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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4님의 댓글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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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4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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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의 누드상' !!  (유색을 통해서 無色을 보는 눈靈眼 = 강위덕님의 눈)


1. 미학(아름다움의 학문)을 전공하는 분들은 무색/유색을 논하고,


2.  물리학을 전공하는 분들은 Something/Nothing을


3.  신학을 전공하는 분들은 생명/사망 (사람이 죽어도 다시 살수있는)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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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위덕님의 댓글

no_profile 강위덕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 미학(아름다움의 학문)을 전공하는 분들은 무색/유색을 논하고,
2.  물리학을 전공하는 분들은 Something/Nothing을
3.  신학을 전공하는 분들은 생명/사망 (사람이 죽어도 다시 살수있는)을  . . .
 
아직 작품을 공개할 수는 없지만
작품명 Amnion of Cosmos, Gravity
36"x36' oil on the Canvus
님은 이 누드(nude)화를 영안의 눈으로 보셨군요.
&lt;하늘에서 추락한&gt;으로 표출 했음에도
바른 이해를 가지신 님의 압축력에 존경을 표합니다.
흰 두루마기(?누드, 교회?)를 입을 자의 탯줄, 중력!
 
목에 풍선을 달고는 결코 물속, 바닥에 가라 앉을 수 없듯, 신격을 지닌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는 이 지상으로 결코 결코 내려 오실 수 없기때문에 여인의 탯줄로!
Gravity라는 영화, 왜 미 연방정부가 샷다운 되었을 때, 어느 기자가 이 영화를 상기시켯을 까요.
 
그 기자, 백악관 회견에서 이런 질문을 던졌지요.
 제가 얼마전 심장마비에 걸려 죽게되었을때 심장 박동 시술을 연기하자는 공화당 주장과 오바마의료 프렌을  바꾸면 어떨까요.
제갈공명같은 질문, 우주 중간에서 인공위성 안에서  텟줄에 메달린 여인. 태아처럼 텟줄에 목숨을 걸고 있는  순간과 순간들 !  
 
 
비밀
 파스칼 키냐루는 &lt;생각을 가진다는 것은 비밀을 가진 다는 것을 의미한다.&gt;라고 말했다.
하늘을 떠 다니는 물수제비 구름은
하나님의 비밀을 간직한 듯
우리의 생각 위에 떠 다니지만
구름의 행간에 머물지 못하는 내 마음엔
하나님의 비밀이 부재중이다.
그러나 가끔 구름의 그늘이 바위에 머물때는
바위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구름이라고 생각해 본다.
하나님은 예측히 못하는 비밀을 가지신 분이다.
그러나 가끔은 이 비밀을 선지를 통에 인간에게 계시하기도 하지만
때가 되기를 기다리시는 비밀도 가지고 계신다.
나는 한평생 하나님의 비밀을 풀기 위하여
상상력에 빠지기도 하고
상상력에서 새로운 그 무엇을 찾을 때마다 달라지는 의미의 맛을 새롭게 느끼기도 했다.
무수한 언덕을 넘어 서며
강행해야하는 이 비밀의 탄광은 황홀한 작업이다.
어떤 때는 위험이 찾아올 때도 있고
수많은 비밀을 넘어
일생 나를 매료시키는 기쁨이 되기도 한다.
때때로 비밀과 비밀이 겹쳐지기도 하지만
많은 비밀이 겹친 비밀 섞인 비밀 중에서도
가장 빛나고 매혹적인 비밀은 율법을 통한 구속적 비밀이다.
 
마음은 이완과 타성이라는 타기의 관습이 아니라
그러한 타기의 관습조차 다 걸러 낸 생체 그 자체로 응집된 진실이다.
초월을 꿈꾸는 자는 초월을 버리고
마음은 일상성 즉 생활주변을 맴도는 자연의 일상성을 찯아야한다.
사람이 살아가는 경험의 모습은
객관적인 질서의 세계
혹은 우주의 모습과는 다른 개념의 모습이다.
등질적인 시공간 안에서 숨 막히는 세계를 벗어난 구체적인것,
즉 보기도하고 생각도하는
그리고 경험하기도하는 세계 곧 마음의 세계이다.
가설과 선입관을 지워버리고
순수한 경험자체를 승인하는 방법이다.
심비라 함은 우리를 전 생활이 실제로 그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바의
직관되고 경험되고 경험 될 수 있는 세계라 규정할 수 있다.
더 연역하면 그 세계는 지각 가능성과 인간적인 관심을 전제로 하고 있은 세계이다.
태양은 아침을 앞세워 동에서 뜨고
그와 함께 따듯해진다.
그것은 엄밀한 수학적인 인과성에 바탕을 둔 천동설 지동설을 말하는 객관세계와 다르다.
메를로-퐁티는 자연적 태도에 대하여 다른 여러 태도와 나란히 서는 태도가운데 하나가 아니다.
 모든 태도와 입장을 선행하는 근원적 태도이다.
모든 인식은 선행하는 세계의 개시(開示)이다.
이러한 자연적 타도는
&lt;세계가 먼저 있고 그 안에 인간이 있다는 근대인식론의 주체&gt;가 바로 생각위에 운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도식은 의식적으로 제지하여 의식의 순수한 표상을 잡는  소위 현상학적 환원이다.
많은 사람들은 일상성에서 자기를 잊어버리고 살고 있는데
그 안에서 눈을 뜨는 상태를 믿음이라고 말한다.
형이하학적 우주의 중심은 핵이며
이 핵은 생명의 씨를 품고있어
핵분열을 통해 생명을 연장시킨다.
마찬가지로 형이상학적으로
우주의 중심점은 안식일이고
안식일 안에 생명이 있어 7일이라는 마디를 통해 영원을 향해 생명을 연장시킨다.
영생은 두 가지 요인이 공존할 때 가능하다.
안식일과 생명과(生命果)이다.
이 두 요소는 절대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영원으로 존속한다.
영생의 등거리 선이다.
철로와 같다.
안식일을 범하는 죄를 지으면
생명과가 있는 곳에서 추방당을 당하고
선악과를 생명과로 오인 잘못 먹을 때
사랑, 사랑, 사랑을 저버리고 안식일을 떠나 외도하는 죄를 범한다.
생명과는 공간적이고 안식일은 시간적이다.
그러므로 영생으로 이끄는 시공간의 함수관계는 안식일 준수와 비례한다.
사도 시대에 생존했던 그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직접 들은 자들이다. 
그들은 왜 안식일 지켰을까? 라는 논증은 시대적 교회의 마지막 시대인 라오디게아 교회에도 같은 기별로 적용된다.
사도들은 라오디게아교회시대에 태어나도 안식일을 지켰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주의 중심은 생명과와 안식일이다.
이 두 등거리노선은 번제단과 지성소, 할례와 대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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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4님의 댓글의 댓글

no_profile 김영환4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강위덕 1.   2015.01.26  [댓글 옮기다] . . 1029 로,  (댓글이 너무 길어짐니다.)  (죄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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