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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열매로 알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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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마 7:20

한 여성이 차를 몰다가 뒤따라오던 경찰차에 의해 갓길에 세워졌다. 경찰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권총을 빼들었다. 그 여성 운전자는 깜짝 놀랐다. 그녀는 도대체 무슨 일을 저질렀단 말인가?

“당신이 신호도 주지 않고 함부로 차선을 바꾸고, 다른 운전자들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욕설을 퍼붓고 저주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경찰의 말이 끝나자 운전자가 대답했다.

“아니, 그런 걸 가지고 경찰이 권총을 빼들어요?”

“당신 차 뒤 범퍼에 「크리스천」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기에 분명히 도난차량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이 웃지 못 할 이야기는 우리에게 하나의 중요한 교훈을 던져 주고 있는데, 즉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고백하는 바대로 높은 도덕적 표준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모본으로 삼아야 함을 말해 준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 5:22,23

바울이 ‘성령의 열매는(the fruit of the Spirit is)…’이라고 말한 사실을 주목해 보라. 그는 성령의 열매를 단수(單數)로 취급하였다. 성령의 열매는 제각각 개별적으로 나타나는 분리된 속성들이 아니라 단 하나의 실체임을 지적하고 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고후 3:18

예수님 안에 거하는 자들은 언제나 성령의 열매를 맺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약속이 정말 나에게도 이루어질 수 있을까 하고 의문을 갖는가? 성경은 ‘예’라고 대답한다. 우리는 이것을 확신할 수 있다. 즉 우리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분께서 그것을 이루실 것이기 때문이다(빌 1:6). 그분의 이 말씀을 기억하자.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요 15:16

그리고 가장 좋은 소식은 성령께서 우리의 삶 속에 행하시는 선한 일이 단지 현재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영원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성령 받았습니까?”

라는 질문을 받아본 적이 있는가? 대개 이런 질문은 ‘방언’을 말하는지를 묻는 질문이다. 그들은 방언 말하는 것을 성령의 내재를 증명하는 결정적 증거로 생각한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어떤 외형적 표적이나 이적을 어떤 것의 증거로 생각하는 것에 대해 경고하셨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태복음 7:21-23

저희는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임금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 계 16:14

예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부정할 수 없는 이적들이 그분의 이름으로 행해지겠지만, 그러한 이적을 행한다고 해서 이 사람들이 그분의 신실한 제자라는 증거는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딤후3:5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눅 6:43,44

나무는 그 열매로 알 수 있다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은 그 자신이 고백하는 바를 통해서보다는 그의 됨됨이를 통해서 나타난다. 봉사를 위해 성령의 선물들이 교회에 주어졌다. 성령의 열매가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어질 때 삶에는 변화가 일어난다.

우리는 선하게 보일 수 있고 선한 말을 할 수 있으며, 심지어 선한 행동을 나타내 보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성령께서 우리에게 새 마음을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선한 사람이 될 수 없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듯이


마치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듯이 참으로 주의 정원에 심겨진 나무는 영생에 이르는 선한 열매를 맺는다. 그를 두르고 있는 죄들을 이기고 마음에는 악한 생각들을 용납하지 않으며, 영혼의 전에서 악한 습관들을 말끔히 씻어낸다. 악한 쪽으로 치우친 성향들은 옳은 방향으로 돌이킨다. 나쁜 성벽들과 감정들은 변하여 새로운 행동 원칙이 생기고 품성은 새 표준을 갖게 된다. 이제 그리스도인이라는 나무에는 거룩한 기질들과 성화된 감정이라는 열매가 열린다. 온전한 변화가 일어난다. 이것이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다. 엘렌 G. 화잇 언급, 재림교 성경주석, 6권, 1080

우리가 좋은 나무 나쁜 나무라고 할 때 착각하지 않아야 할 것은 같은 종류의 나무가 질이 좋다든지,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즉 포도나무인데 하품 포도나무라거나 극상품 포도나무라는 뜻이 아니다. 나쁜 나무는 가시나무나 엉겅퀴이고, 좋은 나무는 포도나무나 무화과이다. 당연한 사실을 이야기 하는 것은 이 당연한 것을 오해하고 있는 것 같은 경우를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여러 재림성도들이 인식의 혼란을 겪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어떤 사람들은 마가복음의 자라나는 씨앗의 비유를 성화의 과정이라고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틀린 이해는 아니지만 무엇이 성화되는 지에 대한 바른 인식이 필요하다. 어떤 씨가 자라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것은 가라지가 자라면서 알곡이 되어가는 것이 아니다.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삼키운 바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사6:13

인자께서 심은 좋은 씨가 자라는 것이다. 이사야의 표현을 빌리면 거룩한 씨가 자라는 것이다. 거룩한 씨가 자라기 때문에 성장하는 매 계단마다 거룩하고 완전한 것이다. 이 교과 서론에서 말한 것처럼 성령께서 열매를 맺게 하신다. 그래서 성령의 열매이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기 때문에 생명의 성령의 주장을 받아서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 아무리 좋은 과수라도 어려서는 열매를 맺을 수 없다. 그러나 그 나무가 자라서 열매를 맺는다. 그 나무 자체가 거룩한 나무이다. 왜냐하면 거룩한 씨에서 자란 나무이기 때문이다. 이 사실에 오해하지 않아야 한다. 우리들을 오해하게 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정말 바른 분별력을 가지고 진리를 옳게 분변해야 한다.


나무는 그 열매로 알듯이 사람도 그 행실의 열매로 알 수 있다.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으로 다른 사람을 속일 수는 있으나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다.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느니라 요 15:5

어린 두 소년이 부모님의 허락을 받지 않고 수영장에 가기 위해 2층 창문으로 뻗어 있는 과일나무를 타고 내려가곤 했다. 어느 날 아버지가 그 죽은 나무를 베어버려야겠다고 하는 소리를 소년들이 듣게 되었다. 이들은 비상 탈출로가 없어질 것을 걱정한 나머지 가게로 달려가서 인조 사과를 사다가 죽은 나뭇가지에 매달아 놓았다. 다음 날 아침이 되었을 때 아버지는 놀라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하룻밤 사이에 어떻게 배나무에 사과가 열렸지?”

가짜에 속을까?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15:1-5

그럼 예수님은 왜 자신을 ‘참 포도나무’로 말씀하시고 계실까?

이는 포도나무의 특징을 가지고 설명하기 위함이다.

알다시피 포도나무는 관상수가 아니고 유실수다.

포도나무는 눈으로 보기 좋으라고 심는 나무가 아니다.

또한 가구를 만들 목재로 사용하려고 심은 나무도 아니다.

포도나무는 오직 열매를 얻기 위하여 재배하는 나무다.

유실수는 눈으로 감상하는 것이 아니고, 먹고 배부름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생명과시다.

예수는 눈으로 감상하는 분이 아니고, 먹고 배부름을 얻어야 할 분이다.

도를 깨우치는 것은 예수를 감상하는 것이고, 사는 것은 예수를 먹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절간에서처럼 도를 깨우치는 것이 아니고.. 예수로 사는 것입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포도나무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

농부는 열매를 얻기 위해서 포도나무를 재배한다.

그럼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포도나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열매를 얻기 위함이다.


‘포도나무’의 의미를 살펴보기로 합시다.

(지금 이스라엘이 ‘포도나무’의 사명을 잘 감당하지 못해서 예수님이 ‘참 포도나무’로 오신 것을 살피는 중이다.)

“인자야 포도나무가 모든 나무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랴 삼림 중 여러 나무 가운데 있는 그 포도나무 가지가 나은 것이 무엇이랴 그 나무를 가지고 무엇을 제조할 수 있겠느냐, 그것으로 무슨 그릇을 걸 못을 만들 수 있겠느냐 불에 던질 화목이 될 뿐이라. 불이 그 두 끝을 사르고 그 가운데도 태웠으면, 제조에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그것이 온전할 때에도 아무 제조에 합당치 않았거든, 하물며 불에 살라지고 탄 후에 어찌 제조에 합당하겠느냐” 에스겔 15:2-5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묻습니다.

“인자야! 포도나무가 다른 나무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건 열매를 맺기 때문이 아니냐!”

라고 하신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포도나무라고 하신다.

열매를 맺어야 할 유실수란 말이다.

하나님이 바라는 삶이 있다는 것이다.

언약 백성으로서 삶이 없다고 한다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종자란 말씀이다. 그래서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할 땐 다른 나무보다 못하다다.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께서 농부가 되시고 예수님이 종자 포도나무가 되셨으니 이와 같은 농사에 실패하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다.

여러분과 나는 이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 열매 맺는 가지라고 말씀하시고 있으니 이 어찌 기막힌 축복이요 영광이 아니겠는가?


내가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 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요한복음 15장 1-8절

가지와 포도나무의 관계를 보면 나무가 가지를 받치고 있다. 가지가 나무를 붙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무가 가지를 받치고 있다. 그리고 나무의 줄기(원 둥치)가 수분과 양분을 공급한다. 가지는 생존과 결실을 모두 다 나무에 의지합니다. 가지는 나무(원둥치)에 붙어 있어야 자기도 살고 열매도 맺는다. 우리와 예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요한복음 10장 28절에서 29절에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들이 예수님 손에 잡혀 있지, 우리들이 예수님을 붙잡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예수님께 주셔서 예수님이 우리들을 붙잡고 있으므로 요동치 아니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이 예수님께 붙어 있으면 예수님의 몸통을 통해서 진액을 받아서 열매를 맺는다.

우리들이 주님 일에 순종하면 주님께서 우리를 친히 붙드시고 모든 것을 인도하시고 주님이 공급하여 주신다. 가지가 스스로 진액을 취해서 꽃 피고 잎이 피고 열매 맺지는 못한다. 가지는 나무(원둥치)에  붙어 있으면 나무가 진액을 공급하여 잎이 피고 꽃 피고 열매 맺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가지와 같아서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주님과 함께하면 우리의 삶속에 잎 피고, 꽃 피고, 열매 맺게 만들어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절대 신앙, 절대 의지함이다. 우리는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성경은

“네가 내 안에, 내가 네 안에 있으면 너희가 열매를 맺는다”

고 말씀한다. 의의 열매도 맺고, 성결의 열매도 맺고, 치료의 열매도 맺고, 축복의 열매도 맺고, 영생복락의 열매도 맺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힘으로 맺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 붙어 있으면 일은 그리스도가 하시고 열매는 우리가 맺게 되는 것이다.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재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현대어 성경 “아버지께서 열매 맺지 않는 가지는 모두 잘라 내시고 열매 맺는 가지는 손질하여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
성령께서 우리 생활을 지배하실 때 그분은 우리 속에서 다음과 같은 열매를 맺게 해주십니다.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의, 진실, 온유, 그리고 절제입니다. 여기에는 율법에 반대되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은 악한 욕망의 본성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입니다. 갈5:22-24
성령의 열매는 아름다운 성품을 뜻한다.

사단은 우리가 아름다운 품성이 건설되지 못하도록 많은 방해를 한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 15:5

사과나무에서 잘려나간 가지를 생각해 보라. 그 가지에 거의 익어가는 사과가 몇 개 달려 있었다고 가정해 보라. 가지는 곧 어떻게 되겠는가?

그 사과들은 어떻게 되겠는가?

사과에 빨간 색을 칠한다고 달라지겠는가?

그 잘려진 가지를 땅에 꽂고 물을 주고 거름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가지를 땅에 꽂아둔다고 해서 계속 더 많은 사과가 맺히겠는가?

그러니 가지가 나무줄기에 붙어 있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가지가 산 포도나무의 한 부분이 된다. 뿌리에서 가지로 생명과 힘과 과실의 풍성함을 전달하는 일은 끊임없이 계속된다. 포도나무에 붙지 않은 가지는 살 수 없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살 수 없으리라고 말씀하셨다. 너희가 나에게서 받은 생명은 계속적인 교통을 통해서만 유지될 수 있다. 내가 없이는 너희는 단 하나의 죄도 이길 수 없고 조그마한 유혹이라도 물리칠 수 없다. 시대의 소망, 675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요 15:8

하나님께서는 그대를 통하여 당신의 품성의 거룩함과 자비와 동정을 나타내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구주께서는 제자들에게 열매를 맺으려고 노력하라고 명령하지 않으신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예수께서는 말씀하신다.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추종자들 속에 거하신다. 이것은 그분의 살을 먹고 그분의 피를 마시는 것으로 나타난바 된 그와 같은 긴요한 연합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영이요 생명이다. 말씀을 받아들임으로 그대들은 포도나무의 생명을 받는다. 시대의 소망, 677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요 15:2

우리 삶에서 이와 같은 전정(剪定)의 과정은 어떤 것일까?

하나님께서는 우리 삶에 닥치는 여러 가지 시험과 고난을 통해 우리의 교만을 낮추시고 이기심을 깎으시며 고집을 꺾으신다. 각자 자신의 삶에서 겪은 전정의 경험을 나누어 보자.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시험의 자리에 두심으로 그들이 위로부터 오는 능력을 신뢰하는지를 보고자 하신다. 분께서는 사람이 보는 것처럼 보지 않으신다. 그분은 자주 인간적인 연결을 끊으시고 사람들이 스스로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계획을 변경시키신다. 사람이 생각하는 것은 그의 영적 혹은 세속적 관심사로 인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해 가져야 할 경험과 모순이 될 수도 있다. 그가 가치 있게 여기는 정로에서 멀리 벗어나 있을 수도 있다.

시험은 이 땅에서 천국에 이르는 날까지 계속 따라다닐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천국에 이르는 길을 좁은 길이라 부른다. 성품은 시험 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종교의 외형을 붙잡고 있는 많은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성향 즉 자신의 길과 교만과 야망을 고집하는 성향에 의해 방해받게 될 것이다. 주님의 허락에 의해 매서운 시험이 그들에게 닥칠 때 그들은 참된 신앙의 결핍과 그리스도의 온유함과 겸손함의 부족을 느끼고 성령의 필요를 절감하게 될 것이다. 엘렌 G. 화잇, 하늘 처소에서, 266



하나님의 손에 들린 전정의 칼


예수께서는 엄숙하고도 친절하게 농부의 의도를 설명하셨다. 가지를 치는 일은 고통을 유발할 것이지만 칼을 대시는 분은 아버지시다. 아버지께서는 난폭한 손으로나 무관심한 마음으로 일하지 않으신다. 땅에 늘어지는 가지들이 있다. 이것들은 줄기가 땅에 붙지 않도록 잘라 버려야 한다. 그것들은 하늘로 뻗어 나아가야 하며 그들을 지탱해 주는 것을 하나님 안에서 찾아야 한다.과실에 전달해야 할 수액을 소모해 버리는 지나치게 무성한 잎들은 잘라 버려야 한다너무 자란 것들은 잘리움을 받아서 의의 태양이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도록 기회를 주어야 한다. 농부는 과실이 더욱 알차고 더욱 많이 열리도록 하기 위하여 해롭게 자라나는 곳을 잘라 버린다. 시대의 소망, 676

전정은 한 나무에서 쓸모가 없거나 해로울 가지들을 잘라내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예수님이 포도나무이고 우리가 가지인데, 전정을 하는 것은 포도나무 가지인 우리 중에 열매 맺지 않거나 열매를 맺는데 방해되거나, 포도나무 자체를 해롭게 하는 가지들을 잘라버리는 작업이 아니겠는가. 이 말씀을 읽어보면 깨끗하지 않아서 잘려나가는 가지가 가룟 유다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요13:10,11을 보라.) 그러므로 이 말씀의 일차적인 적용은 우리 개인의 어떤 허물들을 잘라낸다는 의미이기 전에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정신을 드러내지 않거나 그리스도의 일을 방해하는 존재들을 하나님께서 잘라내실 것임을 가르치는 줄 알 수 있다. 그 다음으로 그리스도인 개인들의 버려야 할 것들을 하나님께서 지적하시고 잘라내게 하신다는 사실에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열매 맺지 않는 가지를 잘라내는 것은 심판과 관련된 말씀이다.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요15:6

그러므로 가지를 자른다는 것을 개인이 가진 부적절한 것들을 자른다는 것에만 적용하는 것은 이 본문을 올바르게 적용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

그러나 이미 말한 대로 개인에게도 적용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모든 내용을 잘 검토하여 기본적 적용과 부수적 적용을 바르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시려고 시련의 전정을 허락하시는데, 이것은 궁극적으로 우리의 영적 유익을 위한 것이다.


이후에 만일 실과가 열면 이어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 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눅 13:9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요15:1-10

과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 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후에 만일 실과가 열면 이어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 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눅13:7-9

열매 없는 과일나무는 찍어버림을 당한다. 우리는 열매를 맺음으로 구원 얻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열매가 없다는 것은 그 속에 구원하는 믿음이 없다는 증거이다.

이 비유의 핵심은 열매를 맺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아닌데, 그것은 행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한 형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맺는 열매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미 그분 안에서 소유한 구원의 실체를 드러내 준다. 열매를 맺는 것은 받은 구원에 대한 외적 표현이다. 그것은 구원 얻는 수단이 아니다. 우리가 이 차이점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조만간 놀라운 열매를 거두었다는 생각 때문에 교만해지거나 우리의 수확이 보잘 것 없다는 생각 때문에 실망하고 포기하게 될 것이다.


저주받은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은 행동화된 비유였다. 바로 그리스도의 면전에서 무성한 잎사귀로 의기양양하던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는 유대 민족의 상징이었다. … 그들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총애를 받아왔으며 다른 모든 백성들보다 의로움을 주장하였다. 러나 그들은 세상을 사랑하고 물질을 탐냄으로써 부패하였다. 그들은 지식을 자랑하였으나 하나님의 요구에는 무식하였고 위선으로 충만하였다. 열매 없는 나무와 같이 그들은 거만한 가지들을 높이 뻗고, 외모로는 화려하고 눈에는 아름다웠으나 ‘잎사귀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장엄한 성전과 신성한 제단, 관을 쓴 제사장들, 인상 깊은 의식들을 가진 유대인의 종교는 과연 외모로는 아름다웠으나 겸손과 사랑과 자비는 부족하였다. 시대의 소망, 582

성경은 어디까지나 열매라고 한다. 열매는 나무의 결실이다. 포도를 맺으려면 포도나무가 되어야 한다. 가시나무가 포도열매를 맺을 수 없다. 그러므로 열매보다 먼저 나무가 되는 일이 중요하다. 그런데 나무는 예수님이다. 우리는 그 예수님께 붙은 그 나무의 가지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 나무에 붙은 가지라면 그도 예수님의 본성을 가진 것이다. 많은 교인들이 예수 나무의 가지는 되지 않고 예수 열매를 맺기 위하여 힘을 다해 애쓰고 있다.


요15: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교회에 다니는 어떤 부인은 오래 전부터 남편이 요구해온 댄스파티에 꼭 한 번만 동행해줌으로 써 남편 마음을 즐겁게 해주려고 결심하였습니다. 왜냐하면 한번쯤 아량을 베풀어서 남편의 요청을 들어주면 결국 남편도 감동되어 계속 교회에 나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 날 저녁 이 부인은 남편을 따라 댄스홀에 가서 함께 춤을 추었습니다.

“여보, 오늘밤은 참으로 즐거웠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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