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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의 7단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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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창 1:2

그는 "어두운 데서 빛이 비치"(고후 4:3)게 하신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창 1:2) 을 때에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 하시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창 1:3)었다. 이와같이 영적으로 어두운 밤에 하나님의 말씀은 "빛이 있으라"고 하신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사 60:1)고 하신다.

성경은 또 이렇게 말한다. "보라 어두움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우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사 60:2)라.

이 세상을 덮고 있는 어두움은 하나님께 대한 오해의 어두움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품성에 대한 지식을 잃어버리고 있다. 하나님의 품성은 잘못 이해되고 그릇 해석되고 있다. 이러한 때에 하나님께서 주신 기별이 전해져야 한다. 이 기별은 광범위한 감화력과 구원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품성이 널리 알려지게 해야 한다. 이 어두운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의 빛 곧 그분의 인자와, 긍휼과, 진리의 빛을 비춰 주어야 한다. 실물 415


이 우주 만물이 다 공식이 있듯이 우리가 중생하는 데도 공식이 있습니다. 수학적인 공식이 있듯이 진리 안에도 공식이 있고 순서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주는 모두 순서가 있는, 질서의 우주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곡식이 익으려고 해도 봄, 여름이 지나서 가을을 기다려야 하고, 꽃이 피었다가 열매가 맺어서 완숙되듯이, 우리가 중생, 성화되어 승천하게 되는 것도 일정한 공식이 있습니다. 공식도 모르고 중생한다고 무조건 머리를 깎고 기도를 하고 가슴을 쳐 봤자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중생, 성화되어서 하늘에 가는 공식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아버지의 손에서 천지 만물이 완성되어 나오는 공식과 똑같습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었습니다. 왜냐 하면 하나님이 안 계시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지구에 도착하시자 빛이 제일 먼저 창조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하늘이 이루어졌습니다. 세번째는 땅과 물이 창조되고, 동시에 채소와 열매가 창조되었습니다. 네번째는 태양과 달, 다섯번째는 새와 물고기, 여섯번째는 동물과 사람, 일곱번째는 모든 것을 창조해 놓으시고 마지막으로 복을 막 들어붓는 날이었습니다. 우리가 중생되는 공식이 바로 이 공식입니다. 천지 창조와 같은 이 모든 과정이 중생의 7단계인 것입니다.

그렇게 무서웠던 사도 바울이 이 중생의 7단계를 통해 중생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몇백만명씩 나가는 교회에 나가면서

“우리 교회 외로는 다른 교파가 없다.”

고 그렇게 뽐내며 다락방 무리들을 죽이려 쫓아다닐 때에, 종일 사람을 때리고 죽이는 등 참으로 못할 짓을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는 부하들을 데리고 가서

“저놈 잡으라.”

고 고함지르며, 그렇게 사람이 피가 터지고 뼈가 부러져 죽는 현장을 보고 저녁에 들어와서

‘내가 하는 짓이 정말 하나님 백성이 할 짓인가? 이것은 세상의 악인도 못할 일인데 ….’

하며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괴로워했습니다. 그래서 마음의 땅이 혼돈하고 그의 마음은 너무 허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낮에 죽던 사람들과 그 매 맞던 사람들의 얼굴을 생각하니 마음이 혼돈해지고 기쁨과 화평이 다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마음이 텅 비어져서 흑암이 깊은 가운데 침대에 푹 쓰러졌습니다. 왜 그런 지경에 빠졌을까요?

하나님이 없는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몇백만명이 아니라 몇천만명이 모여도 그곳에 하나님께서 안 계시면 마음이 혼돈하고 평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다메섹 도로상에서 하늘빛이 갑자기 쫙 비쳤습니다.

“너, 왜 나를 이렇게 핍박하느냐?”

“주여! 누구시니이까?”

“나는 네가 핍박하고 때리고 죽이는 예수다.”

바울은 깜짝 놀랐고 참예수를 따라가는 백성에게 욕 한마디 하고 눈 한번 흘기는 것도 바로 예수님께 하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친아들과 딸들에게 함부로 대했다가는 큰일나는 것입니다.

그 교단에 하나님께서 계신 줄 알았는데 그때 비로소 하늘을 우러러보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

“다메섹으로 너는 빨리 가라.”

고 해서 그 다락방에 들어가서 어디에 서야 진리의 땅이고, 어디에 서야 빠져 죽는 오류의 물인지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복음의 질서를 구별하게 된 것입니다. 거기서 말씀의 채소와 말씀의 열매를 부지런히 먹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 캄캄하고 혼돈하고 공허하고 흑암이 깊던 사도 바울의 마음의 천지에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의 두 태양이 뜬 것입니다. 그렇게 완악하고 완고하고 무섭던 사람이 그 다음부터는 어디를 가도 하늘 분위기 가운데 서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 다음 그는 새처럼 춤을 추면서, 물고기처럼 국제 선교사가 되어서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벳전1:03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를 찬송할지어다」

하고 아버지와 그 아들을 증거하고 다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람의 형상을 가지고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처럼 뛰었습니다.

“사람이면 다 사람이냐, 하나님 형상을 닮아야 사람이지.”

「우리가 우리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고」

하나님의 형상을 닮지 못한 자는 어떤 성직자일지라도, 아무리 지위가 높을지라도, 아무리 교회를 오래동안 다녔을지라도, 그는 짐승입니다. 하나님 형상을 닮은 자가 사람입니다. 그리고서 마지막에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내 믿음을 지켰으니 내게는 금 면류관밖에 없다.”

고 고백하고 평안히 안식에 들어갔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하여 중생의 7단계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안식일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축복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하나님도 안 계시고 아무 보람도 없는 노예 생활 속에서 매일 두들겨 맞으면서 벽돌만 찍고 있었습니다.

“내가 이 복장을 하고 일생을 이 사람들한테 두들겨 맞고 벽돌을 찍다가 죽으면 내 아들이 이 옷을 입고 또 그러겠지. 그 다음 손자도 그렇게 되겠지.”

그들은 장래가 없어서 마음의 땅이 혼돈했습니다. 그리고 희망도 없었습니다. 흑암이 깊은 가운데 요도 이불도 갤 새도 없이 매일 나팔을 불면 뛰어나가는, 완전히 무질서한 가운데 그들은 앞뒤 가릴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셔서

“얘들아! 내가 너희를 버린 것이 아니다. 내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리라.”

말씀하시며 하늘에서 빛을 비추셨습니다.

그때 그들은

“아하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구나.”

하며 벽돌을 찍다가 하늘을 우러러보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 모세는 그 백성을 잘 인도해서 어디에 서면 영원한 진리의 땅이고, 어디에 서면 오류에 빠져서 또 노예로 팔려가서 죽는지를 전부 가르쳐 주며 말씀의 채소와 말씀의 열매를 먹였습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의 두 태양과 달이 이스라엘 백성을 앞뒤에서 호위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만나를 먹여 주시고 예수님께서는 불기둥 가운데서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 다음에 홍해 바다를 물고기처럼 건너고, 기뻐서 새처럼 춤을 추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사람의 형상을 가지고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처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뛰어 들어갔고, 전쟁은 그쳤으며 그 땅은 태평하게 되었습니다. 비로소 안식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는 누구든지 우리의 마음의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고 흑암이 깊어서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영생의 길인지 알지 못했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오니까 마음속에 빛이 환히 비취는 것입니다. 그때서야 하늘을 우러러 하늘아버지를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디에 서야 진리의 땅이고, 어디 서면 빠져 죽는 오류인지를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어디에 서야 진리의 땅이고, 어디에 서면 빠져 죽는 오류인지를 다 알고 말씀의 채소와 열매를 먹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실컷 먹고 나면 사도 바울처럼 사물을 다 볼 수 있는 눈이 열릴 것입니다. 그리고는 하늘 아버지와 예수님의 두 태양이 우리 마음에 뜨고 새처럼 우리 영혼이 마구 춤을 추며, 그 오그라졌던 영혼이 물고기처럼 마구 꼬리를 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머니와 할아버지조차도 어린이가 되어 물고기가 꼬리치듯이 손놀이로 춤을 추고 그렇게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나갈 때는 사람의 형상을 가지고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처럼 뛰어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유쾌하게 되는 날, 즉 평안의 폐임을 받는 것입니다. 모든 죄의 권세와 사망의 권세를 다 떨쳐 버리고 하늘의 사랑과 화평 가운데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빛 가운데 완전히 서기만 한다면 누가 돌로 쳐 죽일지라도, 어디 가서 고문을 받을지라도, 영창이나 형무소에 갈지라도 환하게 다닐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만 중생하는 것이 아니라, 이 지구 또한 두번 태어나야 됩니다. 우리는 지구에서 영원히 살 텐데 이런 불결한 지구 땅에서 신들이 살 수 있겠습니까? 황태자와 공주들이 살 수 있는 낙원으로 이 지구가 두 번째 태어나야 되는 것입니다. 중생이라는 것은 ‘거듭 중(重)’자로 두번 나온다는 것입니다.

지구가 처음 하나님의 손에서 나온 후에는 사단이 장악해서 우리와 같이 이렇게 망가져 버렸습니다. 주인인 우리가 망가지니까 따라서 망가졌기 때문에 지구도 또한 중생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구가 어떻게 중생하게 되는가?

그것 역시 중생의 7단계로 중생하는 것입니다. 아담이 마귀한테 훌렁 다 뺏기고 하나님 아버지 필요 없다고 하며 죽으러 갈 때에 한 발자국, 두 발자국 걸을 때마다

“너는 정녕 죽으리라.”

고 한 그 죽음의 무덤에 더 가까워지는 걸음이었습니다. 그렇게 정이 좋던 두 부부가 이제는 다투고 싸움만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당신 때문에 내가 죽게 되었소!”

“누가 먹으래요? 나 혼자 먹고 죽게 놔 두지.”

아버지를 떠나면 이렇게 두 사람도 하나가 안 되는 것입니다. 아빠께 돌아오면 천만 명도 하나가 되는데 하늘 아버지를 떠나면 두 사람도 많아 서로 헐뜯고 싸우게 되는 것입니다.

죽음의 길을 가는 그 두 사람의 마음의 땅은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었습니다. 죽음으로 가는 길이니 발걸음을 빨리 디디면 디딜수록 무덤으로 가까이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창세기 3장 15절의 빛을 비추어 주셨습니다.

“아들아, 내가 너를 아주 죽이려는 것이 아니다. 내 아들 예수를 주고 너를 다시 살려 이 낙원으로 데려 오마.”

너무나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정녕 죽는다고 해서 영영 죽는 줄 알았는데 친아빠의 사랑이 다시 살 길을 열어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때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구나.’

하고 하늘을 우러러보게 되었습니다.

그런 다음에 아담은 가정 성소를 꾸며 놓고

“얘들아, 너희들은 이 애비처럼 잘못을 저지르지 말아라.”

또 손자들에게는

“이 할아버지처럼 하지 말아라.”

하며 어디가 진리의 땅이요, 어디에 빠지면 오류에 빠져 죽는지를 일러주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의심함으로 죽게 되었으니 다시는 하늘 아버지의 사랑을 의심치 말고 믿으라고 계속하여 말씀의 채소와 말씀의 열매를 먹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 곁에 계시는 임마누엘로서 우리 곁을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그 다음에 이른비 성령이 내려서 물고기처럼 꼬리 치며 세상을 구원했고, 늦은비 성령을 받고 새처럼 승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형상을 가지고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처럼 뛰면서 저 하늘에 살게 되는데 6천 년이 지나고 7천 년 끝에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 지구도 7단계로 중생되어 나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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