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석은 처녀는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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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오심은 이 세상 역사의장 어두운 시기에 일어날 것이다. 노아와 롯의 시대는 인자가 오시기 직전 세상의 상태를 묘사한다. 성경은 이때를 가리켜 사단이 모든 능력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살후 2:9, 10) 일할 것이라고 선언한다.
사단의 역사(役事)는 이 마지막 시대의 신속히 증가하는 암흑과 많은 오류와 이단과 기만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사단은 세상을 사로잡을 뿐 아니라 그의 기만으로 소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들에게까지도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큰 배도는 밤중과 같은 깊은 암흑으로 발전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진리를 위한 시련의 밤이요 눈물을 흘리는 밤이요 핍박의 밤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암흑의 밤에 하나님의 빛은 비칠 것이다. 선지 717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그 중에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지라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새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와 너희의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저희가 사러 간 동안에 신랑이 오므로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대답하여 가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마25:1-13
옛적이나 오늘날이나 낮이 되면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중천에 해는 어김없이 떠 있습니다. 낮에는 언제나 밝은 태양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아침이면 동쪽 하늘에 해가 뜨고 저녁이면 서쪽으로 지는 것은 지구 역사이후 수천 반복되 왔습니다.
증언에 나타난 흑암이란 무었일까요?
마음의 어두움 즉 참 하나님을 모르는 어두움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따른다고 수천년간을 양을 잡아 제사를 지내고 있었지만 실상은 하나님 아버지의 품성은 전혀 모르는 무지의 흑암으로 쌓여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에 대해서 무지한 소경이며 귀머거리요 장님이 였습니다.
이러한 불치병에 걸린 중환자를 치료하시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탕자 된 우리로, 잃어버린 하나님 아버지를 알게 함으로 그분의 품에 다시 안기게 하기 위함이셨습내다. 탕자가 잃어버린 아버지를 찾고 그의 품에 안기는 것은 최고의 아름다움이며 최고의 행복이다.
우리는 전에 없었던 방법으로 열 처녀의 비유를 연구할 필요가 있다. 다섯은 슬기가 있었고 다섯은 미련하였다. 슬기 있는 자들은 등과 함께 기름을 갖고 있었다. 원고 140. 1901
비유에서 하늘의 신랑을 기다리는 사람 모두가 주께서 더디 옴으로 다 졸며 잔 것으로 나타나 있지만,
슬기 잇는 자들은 그의 오실 때가 가까웠다는 기별을 듣고 잠에서 깨어나 그 기별에 응답하였다. 그들이 영적 식별력이 다 없어진 것은 아니 였으며 그들이 일어나 그들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꼭 붙들었을 때 그들의 신앙적 경험은 활기가 있었고 풍성하여 졌으며 그들의 애정은 위에 있는 것들에 고정되었다.
그들은 도움의 근원이 어디 있는가를 알았고 하나님(천부)의 사랑에 감사하였고 그들은 성령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마음을 열어 놓았고, 그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그 마음에서 흘러 나왔다.
그들이 등잔 심지를 자르고 손질을 해서 불을 붙여 도덕적 흑암에 쌓여 있는 세상에 한결같은 빛을 보냈다. 그들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마음에 은혜 기름을 가졌기 때문이며 그들의 주님이 그들 앞서 행하신 일 곧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는 일을 하려고 나아갔기 때문이 였다. 사인즈. 1901.6.28
라오디게아 교회는 어리석은 처녀로 예표되었다. 리뷰.1890.8.19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좋은 신임장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모든 싸움과 분쟁(分爭)을 그쳐야 한다. 만약 가장 세련되고 웅변적재능의 소유자라 할지라도 그들의 영혼의 등불이 손질되지 않고 불타고 있지 않으면 하나님은 그들을 받으시지 않을 것이다. 헌신적인 마음과 완전한 굴복이 있어야 한다. 편지.119.1899
미련한 처녀로 대표된 계급은 외식하는 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진리를 존중히 여기고, 진리를 옹호해 왔으며, 또 진리를 믿는 사람들에게 매혹되었다.
그러나 저희는 성령의 역사에 순종하지 않았다. 그들은 반석되시는 예수님 위에 떨어져 저희의 옛 성질을 깨뜨리려 하지 않았다. 이 계급은 또한 돌밭에 떨어진 씨로 묘사된 청중을 대표한다. 그들은 주저하지 아니하고 말씀은 받았으나 그 말씀의 원칙을 실천하지 않았다. 그 말씀의 감화력은 순간적이었다.
성령이 사람의 마음속에 역사하게 되고 이 역사를 당사자가 갈망하고 동의하게 될 때 그의 안에는 새로운 품성이 심어지게 된다.
그러나 미련한 처녀로 대표된 계급은 단지 피상적이고 표면적인 행위만으로 만족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품성을 연구하지도 않고 하나님과 교제하지도 아니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할 줄도 모르고 하나님을 쳐다보고 살줄도 모른다. 하나님께 대한 저희의 봉사는 점차 저하되어 형식화 되고 만다.
"네게 나아오며 내 백성처럼 네 앞에 앉아서 네 말을 들으나 그대로 행치 아니하니 이는 그 입으로는 사랑을 나타내어도 마음은 이욕을 좇음이라" (겔 33:31). 사도 바울은 이런 상태가 예수 재림 직전에 사는 사람들의 특성이 될 것이라고 밝히 말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담후 3:1~5)
이런 사람들은 위태로운 때에 평안하고 안전하다고 부르짖는 자들이다. 저희는 저희 마음을 안심시키고, 위험을 꿈에도 생각지 않는다. 저희가 저희의 혼수상태에서 깨어났을 때에 그들의 부족을 깨닫고 다른 사람에게 가서 저희의 부족을 채워 달라고 간청한다. 그러나 영적 사물에 있어서는 아무도 다른 사람의 부족을 보충해 줄 수 없다. 실물 411
하나님의 은혜는 각 사람에게 값없이 제공된다. "목마른 자도 울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계 22:17)는 복음의 기별이 전파되었다. 그러나 품성은 남에게 나누어 줄 수 없는 것이다. 아무도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믿을 수 없고 아무도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성령을 받을 수 없다. 아무 사람도 성령의 역사의 결과로 이루어지는 품성을 다름 사람에게 나누어 줄 수 없다. "비록 노아, 다니엘, 욥이 거기 있을 지라도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그들은 자녀도 건지지 못하고 자기의 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겔 14:20).
품성은 위기의 때에 나타난다.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는 긴장한 소리가 들리고 졸던 처녀들이 잠을 깨었을 때에 누가 준비되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기다리는 처녀들은 나와 맞으라는 소리를 갑자기 듣게 되었다. 그 중에 어떤 이들이 이 불의의 사태를 위해 준비하고 있었고 어떤 이들은 준비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와같이 지금도 뜻밖의 재난이나 죽음에 직면하게 될 어떤 사태가 생길 때에 과연 그가 하나님의 약속을 참으로 믿고 있었는지의 여부가 판명될 것이며 또 그의 마음이 은혜로 말미암아 보존되어 있는지를 드러낼 것이다. 은혜의 시기가 끝나고 최후의 큰 시련이 임하게 될 것인데 그 때 가서 심령의 부족을 채우기에는 너무 늦게 될 것이다.
열 처녀는 이 세상 역사의 저녁에 신랑을 기다리고 있다. 그들은 모두 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한다. 모두 다 초청을 받고 기름과 등을 가지고 있으며 모두 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 모두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중 다섯은 준비되지 않았다. 그 다섯은 놀라고 당황하면서 연회장 밖에 있게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의 나라에 들어갈 권리를 주장하면서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눅 13:26).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마 7:22).
여기에 대하여
"저가 너희에게 일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나를 떠나 가라"(눅 13:27)
고 대답하신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와 친밀히 사귀지 못했으므로 하늘 나라의 방언을 알지 못하며 하늘의 기쁨도 알지 못한다.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전 2:11).
일찍이 인간의 귀에 들린 모든 말 가운데 가장 슬픈 말은 곧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하는 운명의 선고일 것이다.
그대가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성령과의 교제가 혼인 잔치 때에 그대로 하여금 기뻐하는 무리에 참가할 수 있게 해 줄 유일한 것이다. 성령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는 그대가 그 자리에 참여할 수 없다.
그 빛이 소경의 눈에 보이게 될 것이며, 그 아름다운 음악이 귀머거리의 귀에는 들리게 될 것이지만 그 곳의 사랑과 기쁨은 세속으로 마비된 마음에 아무런 즐거움도 일으킬 수 없을 것이다. 그대 자신이 천국에 들어가 어울려 살기에는 부적합하기 때문에 그대는 천국에서 제외될 것이다. 실물 412,413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공언(公言)하는 사람들이 참 상태에 관한 사실은 그들의 고백보다 크다.
어떤 세력이 영원한 반석에 매달려 있는 닻줄을 끊어 버렸으므로 그들은 항해도표도 없이 나침반도 없이 바다에 표류하고 있다. 리뷰. 1888. 7. 24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는 기별은 두려운 책망이며 오늘날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적용되는 것이다. 1보감 327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요일4:18
그대의 고집이 하나님께서 그대를 통하여 이루시고자 하는 고상한 목적을 좌절시키지나 않을까 두려워하라. 자신의 힘을 의지할까 두려워하고 그대의 손이 그리스도의 손을 놓고 그분 없이 인생길을 걸어 가려고 하지 않을까 두려워하라. 우리는 교만과 자부심을 조장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피해 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첨과 칭찬을 주고받는 일을 삼가야 한다. 아첨은 사단이 하는 일이다. 실물 161
이 말을 함축하면
"그대의 뜻이 그리스도의 뜻에 복종하지 않는 일이 없을까 그대의 선천적 후천적 성별이 그대의 생애를 지배하지나 않을까 두려워하라. 그대의 영혼과 크신 일꾼이신 주님 사이를 자신이 가로막아 장애가 될까 두려워하라. 그대의 고집이 하나님께서 그대를 통하여 이루고자 하시는 고상한 목적을 좌절시킬까 두려워하라. 그대 자신의 힘을 의지할까 두려워하라. 그대의 손을 그리스도의 손에서 거두고 인생 길을 홀로 가다가 사단을 만날까 두려워하라. 죽을까 두려워하라."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계 3:14-17
라오디게아교회는 마지막 말세에 등장하는 세속화된 모습의 교회입니다. 주님은 종말 교회의 성도들의 신앙에 대하여
‘인자가 올때에 믿음을 보겠냐’(눅18:8)고 탄식을 하셨습니다.
종말 교회 성도들의 믿음은 자기 자신에게는 부요한 믿음이라고 자부하고 있지만 주님은 곤고하고 가련한 믿음이라고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라오디게아 “아멘이시요 추성되고 참된 증인”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아멘이란 말은 히브리어로 ‘참으로’란 뜻입니다. 진실과 충성이 없는 라오디게아교회에 주님은 그 참된 모습을 보여주실 필요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충성되고 참된 증인으로 그 사명을 다 이루신 분입니다.
1. 라오디게아교회가 책망 받을 일
칭찬을 받은 일은 한 가지도 없고 모두 책망뿐입니다. 그러나 그 책망 속에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이 깃들여 있고 회개했을 때 그들이 받을 축복이 굉장히 크다는 사실에 많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1) 주님은 그들에게 ‘네가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더웁다라는 말은 주님에 대한 사랑으로 심령이 뜨거워진 심령을 말합니다.
마음과 정성과 생명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생활입니다. 이 신앙은 주님께 대한 처음 사랑에서 나옵니다. 반면에 차다는 말은 신앙적으로 냉담하다는 뜻입니다. 이들은 언제부터인가 영적인 뜨거운 감각이 무뎌졌습니다.
이들은 세상적인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면서 옛사람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이들은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자기들 나름대로는 가장 모범적인 생활을 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다는 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주님이 지적하신 대로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는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2) 주님은 이들에게 ‘더웁든지 차든지’하라는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미지근한 신앙생활은 예수님의 비위를 건드렸습니다. 왜냐 하면 미지근하다는 말은 이것도 저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그 한계가 분명해야 합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분명한 선택의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은 이런 결단이 희미했습니다. 예수님은 마침내 그들에게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고 선언하셨습니다.
(3) 주님은 이들에게 미지근한 생활을 계속하면 ‘내 입에서 토하여 내치리라’는 경종을 내리셨습니다. 그들이 회개함이 없이 그들의 신앙생활이 계속 미지근하여 열매 40 \ 3:14-22 를 맺지 못할 바엔
‘내 입에서 토하여 내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내 입에서 토하여 내치리라’고 하신 말씀은 어떤 징계를 의미하는 것입니까? 이 말씀은 장차 무서운 환난 가운데 던져 넣어서 불같은 시련을 받게 하시어 올바른 신앙을 가지게 하실 것이라는 경종의 말씀인 것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회개치 않고 그대로 미지근한 신앙생활을 한 일에 대한 충분한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4)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의 신앙상태는 주님 보시기에 외식과 거짓과 교만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고백하고 있었던 것처럼 부요했습니다. 성도들은 물질적인 축복을 마음껏 누리고 있었습니다. 먹고 마시고 장사하고 집을 짓고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에 너무나도 풍요로웠습니다. 그러니 교회도 물량적으로 굉장한 바벨탑을 쌓아 올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이야말로 종말 교회의 모습 그대로인 것입니다.
2.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한 주님의 책망
그런데 문제는 주님은 그렇게 인정해 주지 아니하셨다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1) 첫째로 라오디게아 교회는 우리 주님 보시기에 너무나도 가난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제 하나님께 부요한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이 부요는 그들의 재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자가 되는 부요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부요는 환난과 궁핍을 통해서만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은 환난과 궁핍 중에서 신앙적인 연단을 받으므로 성장한 아름다운 믿음(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킵니다.
(2) 다음에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고 흰옷이란 의의 세마포 옷을 말합니다. 이 흰옷은 진실한 회개에서 얻을 수 있는 의의 옷입니다.
(3) 다음에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밝았습니다. 그러나 신령한 것을 바라보는 눈은 어두웠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안약을 사서 발라야 하는 것입니다. 이 안약은 세상 재물에 소경된 사람들에게 주시는 신령한 약인 것입니다(요9:39-41).
네가 열심을 내라 참고 계 3:14-22
세계 1차 대전 때 참전하여 다리를 다친 한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수도사가 되는 것이 소원이었지만 학력 부족으로 수도사가 될 수는 없었습니다. 수도사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그는 간청 끝에 수도원의 요리사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비록 수도사가 아닌 요리사로 수도원에 들어왔지만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는 수도사들이 열심히 공부하고 수도를 하는 동안에 그들을 위하여 주방에서 열심히 요리를 만들었습니다.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그런데, 주방에서 요리를 하던 요리사가 그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습니다. 수도사가 될 수 없었던 그가 어떻게 하여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을 까? 그는 그의 모든 이론을 파기하고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진 자기의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였습니다. 그는 쉬지 않고 기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시장 보러 갈 때에
"주님, 좋은 식품을 값싸게 구입하게 하시어 수도사들이 잘 먹을 수 있도록 해 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했으며, 설거지를 하면서
"주님, 제가 그릇을 씻어 깨끗하게 하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내 마음과 몸을 깨끗하게 씻어 주옵소서"
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심지어 불을 지피면서도
"주님이시여 이처럼 성령의 불이 내 마음 속에 타게 해주옵소서"
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이처럼 그는 무엇을 하든지 열심히 했고 또 그의 모든 생각을 하나님께 복종시키기를 원했습니다. 그 후 많은 세월이 흘러 그는 훗날 수도원 원장까지 될 수 있는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열심 있는 신앙생활을 기뻐하십니다. 따라서 성도는 계속적으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열심으로 섬겨야 합니다.
라오디게아는 빌라델비아 동남쪽 약 72km, 에베소에서 동쪽으로 약 160km 지점에 위치한 도시로서 라이커스(Lycus) 계곡에 있는 여러 도시들 중 하나입니다.
라오디게아는 빌라델비아 동남쪽 약 72km 지점에 위치한 도시입니다. 유명한 의학교가 있는 곳으로 이름이 있었으며, 고대 세계전역을 통해 안질의 치료로 유명했습니다. 또 교통의 요충지로서 모직물 공업의 중심지였으며 소아시아에서 가장 부유하고 번창하는 도시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라오디게아는 금융중심지로 부를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3개의 극장과 3,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경기장은 라디오게아 사람들이 세상 쾌락을 사랑하는 자들이라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이곳에 있던 라오디게아 교회와 교인들 역시 넉넉하여 생활 걱정은 없었으나 주님으로부터 칭찬은 듣지 못하고 책망만 받는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라오디게아 교회는 오늘 현대 교회의 모습이요, 이 시대에 주님을 섬긴다고 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열심을 내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로서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열심을 내는 데 방해하는 요소들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런 요소들이 신앙생활을 산만하게 만들어 열심을 내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산소용접기를 아실 것입니다. 산소용접기는 쇠를 녹이고 절단하며 쇠와 쇠를 강하게 붙이기도 합니다. 그 산소용접기는 불꽃을 가장 가늘게 모아 집중할수록 높은 열을 내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집중이 되지 않고 여기 저기 마음이 산만한 사람에게는 열심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모아야 합니다. 마음을 주님께 모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본문 19절에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고 말씀하십니다. 영적으로 산만케 하는 요소들을 회개하여 열심을 내시기 바랍니다. 열심을 내는 신앙이 되려면, 첫째로 미온적인 신앙을 버려야 합니다
라오디게아의 북쪽에 "히에라폴리" 라는 도시가 있는데 그곳에 섭씨 90도나 되는 "파묵칼레" 라는 뜨거운 온천이 있습니다.
성지 순례시 그곳에 다녀오심 분들의 말을 들어보면 온천수의 석회분과 칼슘분이 바위를 흘러 덮어 마치 흰눈이 덮인 것 같기도 하고 목화꽃이 만발한 목화밭 같기도 하답니다. 여기 "파묵칼레"의 뜻은 목화 성이란 말입니다.
이렇게 뜨거운 온천물이 10Km 떨어진 라오디게아까지 흘러옵니다. 그러면 그 뜨거운 물이 식어 나중에는 차지도 덥지도 않은 미지근해진 상태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미지근해진 물은 온천수에 들어있는 유황냄새가 더 심하게 나기 때문에 누구나 다 토하여 뱉어 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영적 상황을 이 온천수를 비유로 들며 책망하셨습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둘째로 스스로 자만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라오디게아교회는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면서 자만에 깊이 빠져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알고 계시는 것과 전혀 다르게 자신들을 평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은 부자요, 부족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보실 때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두 부족하여 병이 들어 버린 교회였습니다.
셋째로 주님과 교제하며 살아야 합니다.
어느 아버지와 아들이 교회를 갔습니다. 교회에 문을 열고 들어가니 예수님이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는 모습의 그림이 걸려 있었습니다. 어린 아들이 아버지한테 묻습니다.
"아버지, 저 그림은 무슨 내용이예요?"
"예수님이 문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는 그림이지",
"그래요. 그런데 왜 문이 안 열려요?"
아버지는 무심코 대답하기를
"그림이니까 안 열리지".
그런데 아들이 말합니다.
"틀렸어요. 아빠, 집안이 너무 시끄럽기 때문에 예수님이 문 두드리는 소리를 못 들어 문을 못 여는 것 이예요".
여러분의 가정이 시끄럽습니까? 그렇다면 은혜의 소리가 안 들립니다. 부부간에 시끄럽습니까? 사랑의 소리가 안 들립니다. 교회가 시끄럽습니까? 은혜의 소리가 안 들립니다. 내 영혼이 시끄럽습니까? 주님의 음성이 들릴 리가 없습니다. 시끄러우면 은혜의 문을 열 수가 없습니다.
교회의 비극은 주인이신 예수님을 쫓아내고 사람들이 주인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주인의 자리를 차지한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서 주님은 문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면서 문을 열라고 하십니다. 회개는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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