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4일(월) - 생명의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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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기도력의 교훈>
붙어 있는 것과 연결하는 것은 다릅니다.
진행/원고/편집: 박성원
기도력 묵상원고: https://blog.naver.com/oxo0x0/222525745376
마치는 찬양: 주의 손에 나의 손을 포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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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요일 5:11)
하나님의 아들은 죄와 슬픔과 사망의 그림자로 어두워진 이 세상에 용서와 평화와 영생을 가져오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요 5:26)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리스도를 미워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완전한 순결이 자신들의 극악무도함과 너무도 대비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생명의 주를 배격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을 죽은 자로부터 일으키셨고 인간의 시선으로부터 감추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여전히 인류의 구주이십니다. 그분은 여전히 포도나무요 영적인 생명의 근원이며 유지자이십니다. 은혜와 능력과 구원이 여전이 그분의 충만함에서 비롯됩니다. 비록 그 포도나무가 이제는 보이지 않더라도 그 가지는 눈에 보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시선으로부터 사라지셨지만 그분의 생명과 능력은 그분을 따르는 자들을 통해 드러나고 있습니다.
포도는 여전히 나무에 달려 있습니다. 잎사귀도 생명력도 전혀 없는 잘린 가지를 살아 있는 줄기에 접붙이면 그것이 포도나무의 생명력을 흡수하여 마침내 거기에 순이 돋고 꽃을 피워 열매를 맺습니다. 마찬가지로 죄인이 회개와 믿음으로 자신을 그리스도와 연결시키면 거룩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어서 말과 행동을 통해 거룩한 삶의 열매를 맺습니다.
예수님 속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죄악으로 죽어 가는 영혼들에게 이 생명을 값없이 나눠 주십니다. 그뿐 아니라 그분은 자신의 순결과 특권과 기쁨까지 그들에게 나눠 주십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요일 3:1). 살아 있는 나무에 접붙인 마른 가지는 나무의 일부가 됩니다. 그것은 나무에 붙어 있는 한 살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도 그리스도와 결속되어 있기에 살아갑니다. 그렇게 죄 많은 인간의 본성과 거룩하신 하나님의 본성이 연결됩니다.
『리뷰 앤드 헤럴드』, 1883년 9월 11일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계 3:18)
열성과 순수함과 성결의 모본이 되어야 할 많은 사람에게 영적인 죽음이 임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말이 아닌 행실을 보면 이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들을 영원한 반석에 묶어 두었던 밧줄이 어떤 세력에 의해서 끊어졌음을 그들은 행동으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지도와 나침반 없이 표류하고 있습니다.
참된 증인이신 분께서는 백성이 처한 심각한 상황을 개선하고자 하십니다. …그리스도는 처음 행위로 되돌아오지 않는 자들의 이름을 가지고 더 이상 아버지 앞에 나아가 중재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책망을 받는 한 그들에게는 여전히 희망이 있습니다. 위대한 중보자께서 충분히 해내실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비록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이 탄식할 만한 상황에 있다 할지라도 그들은 꺼져 가는 등불을 가지고 있었던 어리석은 처녀만큼 절망적이지는 않습니다. 그 처녀들은 등잔에 기름을 채울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때 신랑이 왔고, 준비된 자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 자리에 들어갔지만 어리석은 처녀들이 도착했을 때 이미 문은 닫혔습니다. 그들은 너무 늦었습니다. 그러나 참된 증인께서는 미지근한 자들에게 희망이 없다는 식으로 조언하시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상황을 개선할 기회가 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는 기별은 격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뒤로 물러난 교회도 여전히 믿음과 사랑의 금을 살 수 있고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리뷰 앤드 헤럴드』, 1894년 8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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