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3일(안) - 프라하의 히에로니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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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행/원고/편집: 이명선, 윤청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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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3일(안) - 프라하의 히에로니무스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눅 22:61~62)
열두 사도 중 하나인 베드로는 그리스도께 충성을 맹세했지만 그분이 체포되자 자기는 모르는 사람이라며 예수를 부인했다. 그런 직후 그는 참회의 눈물을 흘렸고 일평생 헌신하며 그리스도를 따랐다(눅 22:31~33; 54~62). 보헤미아의 웅변적인 종교 개혁가이자 얀 후스의 친구인 프라하의 히에로니무스(1365~1416)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옥스포드에서 공부하던 히에로니무스는 교황권에 맞서는 존 위클리프의 가르침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주권과 성경의 권위를 강조하다가 로마 가톨릭의 거센 반발을 샀다. 1415년 4월 히에로니무스는 체포되어 콘스탄츠 공의회에 넘겨졌다. 모진 압력에 진이 빠진 그는 1415년 9월 23일, 이른바 존 위클리프와 얀 후스의 이설을 철회한다는 문서에 형식적으로 서명했다. 그러나 일부 성직자들은 히에로니무스의 진실성에 의문을 제기했고 1416년, 히에로니무스는 재판에 회부됐다.
5월 26일, 히에로니무스는 자신의 철회를 공개적으로 취소했다. 심지어 공의회에서도 자신의 신념을 굽힌 것만큼 괴로운 죄가 없었다고 고백했다. 5월 30일, 공의회는 히에로니무스가 다시 이설에 빠졌다며 그에게 화형을 선고했다. 집행관들은 그의 뒤에서 불을 붙이려 했으나 히에로니무스는 이렇게 말했다. “이리 와서 내 앞에다 불을 붙이게. 그걸 겁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걸세.” 그는 기도하며 죽었다. 그리고 후스와 마찬가지로 그의 재는 라인강에 뿌려졌다.
베드로나 프라하의 히에로니무스처럼 공식적으로 주님과 구주를 부정한 적이 없더라도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의 충성, 그분의 말씀을 향한 헌신, 그분의 교회를 향한 지원은 베드로와 히에로니무스만 못할 수 있다. 어쩌면 결코 지키지 않을 약속을 하나님께 했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이 두 명의 위대한 그리스도인처럼 그리스도와 그분의 뜻을 위해 삶을 바치기로 새롭게 결심하자.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도
정남웅/심은정 선교사 부부(대만)
신좡 행복국제교회의 제자 훈련과 영적 성장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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