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7일(일) - 나사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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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 러라”(요 12:9~11)
오늘 성경절에서 각 절에 등장하는 ‘나사로’라는 이름 뒤에 붙은 ‘조사’와 명사를 유심히 살펴봅시다.
“나사로도”(9절), “나사로까지”(10절), “나사로 까닭에”(11절).
사실 나사로의 이 이야기는 요한복음 11장부터 읽어야 합니다.
11장을 시작하면서 두 누이를 둔 “어떤 병든 자”가 등장하는데 그의 이름이 나사로입니다.
그런데 그는 하루속히 예수님을 수소문하여 모셔 와야 할 만큼 위중한 병에 걸렸고 결국 죽고 맙니다.
그런데 12장에서 또다시 나사로가 등장합니다.
똑같은 사람이면서도 전혀 다른 사람입니다. 그는 다시 살아났습니다.
건강한 나사로입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예수님만큼 호기심과 흥미를 보이는,
이제 모든 사람의 대화의 중심으로 떠오를 만큼 중요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성경의 이 두 장 사이에 극명한 대조가 일어나고 있습니까?
12장의 나사로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나사로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통해서, 예수 안에서 그가 다시 태어났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나사로도” 관심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9절).
그런데 나사로 사건 이후 나사로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자,
대제사장들이 이번에는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한 것입니다(10절).
이제는 예수님과 나사로가 소위 같은 급으로 취급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받는 대우를 나사로가 받게 된 것입니다.
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이 예수를 믿었기 때문입니다(11절).
시간이 지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던 지상에서의 마지막 주일이 시작되던 첫날,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게 됩니다.
그런데 <시대의 소망>에서는 예수께서 타고 계셨던 바로 그 나귀의 고삐를
나사로가 잡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그 행렬을 멈추게 할 수 없었습니다.
로마의 속박 가운데 있었던 그때에 왕으로 예루살렘에 당당하게 입성하시는
그 행렬을 누구도 멈추어 서게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 행렬의 제일선에 나귀의 고삐를 쥔 나사로가 서 있었습니다.
그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입니다.
그는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는 죽음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이 땅에서 가장 무서운 죽음을 경험한 그로서는 더 이상 어떤 것도
두려울 게 없었던 것입니다. “나사로도”(9절), “나사로까지”(10절) 그 리고 “나사로 까닭에”(1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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