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창길 목사 저 : [성경의 가장 영광스러운 성육신 진리] * 11. 기쁜 소식에 도전한 역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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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쁜 소식에 도전한 역사 이야기
A. 부활하신 예수님이 마리아에게 일러주신 기쁜 소식 이야기
십자가를 지켰던 여자들은 일해 중 첫날 미명에 시체에 사용될 향료를 가지고 골고다의 무덤에서 서로 만나기로 약속하고 각기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그 첫날 미명 막달라 마리아가 제일 먼저 무덤에 도착하였다. 무덤 입구를 막았던 큰 돌이 옮겨졌고 그 무덤 안이 텅 비어 있음을 보고 마리아는 크게 놀랐다. 그녀는, 다른 여자들이 무덤에 오기까지를 그 이상 기다릴 수 없었으며, 이 사실을 제자들에게 알리고자 급히 달려갔다. 그녀가 무덤을 떠난 후에 다른 여자들이 도착하였으며 천사로부터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셨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다.
마리아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무덤의 돌이 옮겨졌고 주님의 시체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보고하였다. 베드로와 요한은 그녀의 말을 확인하려고 무덤을 향하여 급히 달려갔다. 마리아도 그 두 제자들의 뒤를 따랐다. 저들이 무덤에 도착하여 그 안으로 들어갔을 때 주님의 시체가 있었던 자리에 수의와 수건만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그들은 주님이 다시 살아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일이였다. 그러나 요한은 그 수의가 잘 개어져 제자리에 놓여 있는 것을 보고 다시 살아 나리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였다.
베드로와 요한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대로 그 텅 빈 무덤 입구에 홀로 남았다. 그리고 그녀는 가슴 속에서 치밀어오는 슬픔을 참지 못하고 혼자서 울기 시작하였다. 울다가 몸을 굽혀서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 시신의 빈자리에 어떤 사람의 그림자가 있었으며 그녀에게 “왜 우느냐?”하였다. 마리아는 “누가 우리 주님을 가져갔습니다.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하고 돌아섰을 때, “여자여, ”왜 울고 있느냐? 누구를 찾느냐?”하는 다른 사람이 있었다. 그 음성은 너무도 익숙한 음성이었지만 마리아는 눈물로 인하여 그녀 앞에 서계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다만 동산지기인줄로만 생각하고 “여보세요, 당신이 시체를 옮겼다면 어디에다 두었는지를 나에게 말해 주세요, 내가 그분을 모셔가겠습니다.”하였다. 이 부자 집 무덤이 예수님 시체를 모시기에 과분한 장소라면 딴 장소를 구하겠다는 마음을 먹고 한 마리아의 말이었다.
그러자 다시금 “마리아야!”하고 예수님이 부르셨을 때에 그녀의 눈은 밝아져 예수님을 알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녀 앞에 나타나신 분은 죽음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이셨다. “마리아야!”하고 부르신 그 음성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로부터 인류가 들을 수 있었던 최초의 음성이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그분의 음성이나 육신을 버리지 아니하셨으며 또한 인류에 대한 사랑도 버리지 아니하셨다. 그분은 그분을 붙잡으려는 마리아에게 이같이 분부하셨다. “내게 손을 대지 마라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않았다. 이제 내 형제들에게도 가서 이르기를, 내가 나의 아버지, 곧 너희의 아버지, 나의 하나님 곧 너희의 하나님께로 올라간다고 말하여라”(요 20:17)라고.
막달라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가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으며 주님께서 자기에게 일어주신 말씀을 그대로 전하였다. 다른 여자들이 마리아보다 먼저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전하였지만 막달라 마리아가 전한 소식은 더욱 기쁜 소식이었으며 우리 인류에게 큰 기쁨을 주는 소식이었다. 그리스도의 하나님은 곧 우리의 하나님이시오 그분의 아버지는 곧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소식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우리와 꼭 같은 육신을 취하실 것을 자원하셨으며 우리들의 형제가 되어 주셨다. 우리의 구원이란 우리가 그리스도와 형제관계가 맺어짐으로써 얻을 수 있는 구원이었다. 그 기쁜 소식은 1888년 미네아폴리스 총회에서 다시금 재확인되었다.
B. 1888년 미네아폴리스 총회에서 재확인된 기쁜 소식 이야기
태평양 인쇄소에서의 시조 편집인 엘렛 와그너(Ellet J. Waggoner)는 많은 글을 쓰고 책도 여러 권 저술한 저자이었지만 1888년 미네아폴리스 대총회에서 그의 동역자 아론조 존스(Alonzo T. Jones)와 같이 이룬 업적으로 인하여 그의 이름은 더욱 유명하게 되었다. 와그너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란 오로지 그리스도께서 죄의 육신을 취하셨음을 증언하는 복음서에 기초하여 파악하고 경험할 수 있는 진리임을 발표한 재림교회의 최초의 신학자가 되었다.
그리스도는 신성을 가지신 분이시며 그의 신성은 인성으로 가리어지셨다. 그분은 우리와 같이 피와 살을 기지셨으며 유전의 영향을 받는 우리와 같은 육신을 지니셨다. 왜냐하면 그분은 죄의 궁지에 빠져 있는 인류를 구하고자 자원하여 죄의 육신을 취하셨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우리를 이해하고 동정하실 수 있는 우리의 형제요 가족이 되신 그분을 믿고 의지함으로 하나님의 의롭다 하심을 입을 수 있게 되었다. 총회 참석자들의 대부분은 전통적 재림 신앙을 지켜온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인류의 타락한 육신을 취하고 오셨다는 발표를 부정하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리스도가 취하신 육신이란 죄가 없는 육신이 결코 아니었으며 “아브라함의 자손” 또는 “다웟의 자손”으로 성경이 나타낸 바와 같이 타락한 인성에 속한 모든 연약성을 그대로 가진 육신이었다. 그리스도는 죄가 없으신 분이지만 그분에게 죄의 육신이 입혀졌으며 그리고 또한 죄인으로 정죄된 것은 우리가 의롭게 되도록 하기 위하심이었다고 와그너는 선언하였다. 그는 이 사실을 바울의 글을 가지고 확증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분에게 우리 대신으로 죄를 씌우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새번역 고후 5:20)라고.
그러나 그리스도는 육신의 연약함 가운데서 인간 육신이 당하는 모든 고통을 경험하셨지만 한순간도 죄의 욕망에 사로잡히지 아니하셨다. 오늘 우리들은 어떻게 죄의 경향과 유혹들을 이겨낼 수 있겠는가? 만일 우리가 진정으로 불경건과 세상 정욕을 정복하기를 소원한다면 그분은 우리들에게 신성의 능력이 얼마만큼 필요한 것인가를 아시는 분이시므로 우리가 구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들에게 주실 수 있음을 와그너는 설교하였다.
그리고 또한 그는 우리가 죄의 권세를 정복할 수 있는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들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는 죄의 육신으로 오셔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는 사실도 설교하였다. 그리스도는 그 육신에서 죄를 정복하실 수 있었으므로 이제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분의 능력을 허락하실 수 있게 되었음을 설교하였다. 그리하여 죄의 육신에서 죄 없는 생애를 사신 그리스도가 친히 경험하신 그 같은 거룩한 능력은 그분을 마음에 모시고 있는 신자들이 유혹을 극복하며 죄의 권세를 정복할 수 있도록 하는 능력이 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의 경험은 자연적으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게 되는 것이라고 와그너는 결론하였다.
16세기 종교 개혁을 인도한 루터(Martin Luther)에게 있어서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란 순전히 우리 몸 밖에서 이루어지는 법적 거래에 불가하였지만, 와그너에에 있어서 그것은 한 발자국 더 나아가서 법적인 거래인 동시에 우리 몸 안에서 우리를 의로운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그리스도의 은혜로우신 역사-형제관계까지 포함되었다는 데에 있었다. 그리하여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마리아에게 일러주신 “기쁜 소식”은 1888년 총회에서 와그너에 의해서 다시금 재확인되었다. 이처럼 “기쁜 소식”이 재확인되었을 때에, 암흑의 세력은 거저 있지 아니하였으며 그 “기쁜 소식”에 도전하는 거룩한 육체운동을 일으켰다.
C. 기쁜 소식에 도전한 거룩한 육체운동 이야기
거룩한 육체운동이란 1898년과 1899년 사이에 인디아나 합회의 교회들에서 시작한 운동이었다. 그 운동은 전도 목사 데이비스(S. S. Davis)의 가르침으로 시작되었으며 그의 가르침은 그 당시의 합회장 도넬(R. S. Donel) 이하 여러 동역자들의 지지를 얻었으며 순식간에 인디아나주 전역으로 확장되어 갔다. 그 운동의 지지자들로 구성된 인디아나 합회 행정위원회는 그 거룩한 육체운동을 승인하고 있었다.
그 거룩한 육체 운동은 전통적 재림교회의 그리스도론을 반대하였으며 그 운동의 명칭과 같이 그리스도는 아담의 타락하기 이전의 인성 즉 거룩한 육체를 가지신 분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분은 겟세마네 동산의 고난을 통하여 그 거룩한 육체를 가질 수 있게 되었으며 그분의 뒤를 따라가는 사람들도 그분이 가지신 그 거룩한 육체를 가질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죄가 없는 육체 수준에 도달할 수 있게 되었을 때에 에녹이나 엘리야와 같이 죽음을 맛보지 않고 승천할 수 있게 된다고 선전하였다.
인디아나 주의 교회들에 퍼져가고 있는 그 괴상한 가르침의 진상을 조사하기 위하여 베틀클릭에 본부를 두고 있었던 그 당시의 대총회는 1900년 9월 13-19일, 헤스켈(S. N. Haskell)과 브리드(A. J. Breed)를 인디아니 주에서 열리는 그들의 천막 집회로 파송하였으며 거기서 일어나고 있는 사항들을 조사하고 보고토록 지시하였다. 거룩한 육체운동을 조사한 헤스켈은 조사 결과를 대총회에 보고하였으며 그리고 또한 방금 호주의 체류를 마치고 귀국하여 캘리포니아 주 엠스하벤에 체류하고 있었던 엘렌 화잇에게도 보고하였다. 그녀는 그 보고로 인하여 크게 놀라지 아니하였다. 왜냐하면 그녀는 인디아나 주에서 어떠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계시를 통하여 이미 알고 있었으며, 사실은 그 일로 인하여 호주 체류를 앞당기어서 일찍 귀국하였기 때문이었다.
헤스켈의 보고를 받은 대총회는 행정처리가 시급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이 문제를 1901년에 개최될 대총회의 한 의제로 삼기로 결정하였으며 그 대총회의 강사로서는 엘렌 화잇과 함께 “기쁜 소식”을 재확인시킨 와그너를 선정하고 그 기괴한 교리를 논박하며 교단의 공식 신조를 재확인시켜 줄 것을 요청하였다.
1901년 4월 16일의 대총회의 단상에 선 와그너는 “죄의 육신을 가진 처녀 마리아로부터 출생한 사람이 어떻게 거룩한 육체를 가질 수 있으며, 그녀의 소생이란 우리들과 같은 죄의 경향을 가진 똑 같은 육신이 아니겠습니까?” 하는 질문을 가지고 강론을 시작하였으며 그러한 이단의 주장은 바로 가톨릭의 가르침과 같은 것임을 인식시키고자 하였다. 그리고 그는 그의 강론의 결론으로서 “진실로 마귀가 하고자 하는 일이란 그러한 조작한 이야기를 가지고 인류의 구세주 예수와 그분이 구원하려 오신 인류와의 사이에 넘어갈 수 없는 큰 구렁을 마련해 두려고 하는 수작입니다”하고 선언하였다.
와그너가 거룩한 육체 운동을 규탄한 다음 날 단상에 선 엘렌 화잇은 와그너의 신학적 논란을 반복하기보다 “거룩한 육체”라고 부르는 그 명칭에 오류가 있음을 지적하였다. “여러분들 중의 한 사람도 지금 거룩한 육체를 가진 사람이 없습니다. 지구상의 한 인간도 거룩한 육체를 갖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우리는 육신의 완전을 주장할 수 없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남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람을 위하여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그분의 피의 믿음을 통하여 모든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에 이를 수 있습니다.”
둘째로, 엘렌 화잇은 거룩한 육체 옹호자들이 나타내는 소리 지르며 광신적인 시위 행위에 잘못이 있음을 지적하였다. “우리가 진리를 가졌다는 사실을 세상에 확신시키고자 하여 행한 시위 행위였다면 그것은 아무런 효과를 얻지 못할 일이었습니다. 더욱 요란하고 소리를 지르는 일은 성화의 증거나 혹은 성령을 받았다는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난폭한 시위 행위는 오로지 불신자들의 마음 가운데 혐오감을 일으킬 뿐입니다.”
와그너의 기별과 엘렌 화잇의 증언은 즉시 반응을 나타내었다. 바로 그 다음 날 그 운동의 두 주요 지도자였던 합회장 도넬과 전도 목사 데이비스는 저들의 잘못을 약 300여명이 모인 회중 앞에서 고백하였다. 다른 대표들과 인디아나 합회 임원들 역시도 합회장의 뒤를 따랐다. 그리하여 1888년 미네아폴리스 총회에서 재확인된 “기쁜 소식”은 거룩한 육체 운동으로 더욱 확고하게 되었으며 재림교회의 세계적 복음 사명-셋째 천사의 기별로서 더욱 견고하게 서게 되었다. 그러나 그 거룩한 육체운동 다음으로 있었던 신 신학의 도전은 우리 교단의 교역자들과 평신도들이 그 도전에 희생이 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들을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더욱 고차원적이며 더욱 무서운 도전이었다.
D. 기쁜 소식에 도전한 신 신학 이야기
20세게 중엽에 재림교회가 미국 복음주의 교회의 유혹을 받아들이고 신 신학을 받아들인 데에는 그 시대의 사회적인 요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19세기에서 20세기로 접어드는 시대의 북미대륙의 사회적 환경은 극적으로 변화되어 가도 있었다. 미국 사회는 신속히 산업화되고 도시화되었으며 청교도 정신은 사라져가고 더욱 세속적이며 실용주의 사상이 지배적이 되었다. 유럽 대륙에서 이주하는 많은 이민자들을 통하여 세속적인 사상들이 미국 사회에로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특히 진화론과 성경고등비판은 세속적인 정신을 가지게 된 미국인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으로 오신 사실을 공공연히 거부토록 인도하였다. 자유주의 신학이 팽창해가고 고등비판을 환영하였으며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한 전통적 가르침을 배척하였다. 세계1차 대전(1914-18)이 끝날 즈음, 이러한 시대적 경향에 반발하는 프로테스탄트 복음주의자들은 소위 근본주의운동이라고 하는 보수주의적인 운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현대주의에 저항하는 이러한 보수주의 운동은 성경의 축자영감과 무오설,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그리고 부활을 옹호하였다. 재림신자들은 미국 복음주의 교회들이 옹호하는 이러한 보수주의 사상이 저들의 신앙이나 기질에 가까운 사상이 아닌가 하였다. 그러나 미국 복음주의교회들은 재림교회를 여호와증인, 모르몬교, 크리스천 사이언스 등과 같이 이단 종파로 취급하는 것이 마음에 부담이 되고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어떤 재림신자들은 자신들이 복음주의 교회들로부터 이단시 되는 일을 매우 부끄럽게 생각하였으며, 1888년 이래 율법 이상으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옹호하는 재림교회가 언제까지 크리스천 세계에서 이단시 되어야 할 것이 마당한 일인가? 이러한 신분을 가지고서도 과연 세 천사의 기별을 선포할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들을 품게 되었다. 바로 이러한 시기였던 1955년과 1956년 사이에 복음주의교회의 두 사람, 마틴과 반하우스 그리고 재림교회의 두 사람, 프름과 앤더선은 도합 18회의 화합을 한 후에 재림교회의 그 두 사람은, 특별 성경연구회나 대총회 결의 없이, 복음주의가 유혹하는 신 신학을 받아드리는 큰 실수를 범하게 되었다.
재림교회의 두 사람이 받아들인 복음주의가 유혹한 신 신학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그것은 재림교회가 그 때까지 100여 년 동안 고수해왔던 보수적인 교리, “그리스도가 죄의 육신을 취하셨다”를 버리고 “그리스도는 죄가 없는 육신을 취하셨다” 혹은 “그리스도는 아담의 범죄 전의 죄 없는 육신을 취하셨다”는 사상을 받아들이게 된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교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막달라 마리아에게 일러주신 기쁜 소식 “나의 아버지, 곧 너희의 아버지, 나의 하나님 곧 너희의 하나님께로 올라간다.”에 도전하는 사상이었으며 이 새로운 사상을 셋째 천사의 기별을 옹호하는 재림교회 선구자들은 신 신학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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