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bn라디오교과 2021년 1기 제 6과 하나님 행세를 함(이사야연구 6) - 원고는 본문에 있습니다. 드래그해서 사용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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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과 하나님 행세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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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절
사 25:9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리로다 이는 여호와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우리는 그 구원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리라
서론
이번주 교과 서론에서는 재미있는 예화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어떤 목사가 교만에 대하여 양심을 일깨우는 설교를 하자, 그 설교를 들은 한 여성이 기다렸다가 그에게 말하기를, 자신의 큰 죄를 고백하지 않으면 마음이 너무 괴로워서 견딜 수 없을 것 같다고 했다. 그 죄가 무엇이냐고 묻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교만의 죄를 지었는데요, 저는 며칠 전에 거울 앞에서 저의 미모에 감탄하며 한 시간 동안이나 앉아 있었답니다.’ 그러자 목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 그래요? 그것은 교만의 죄가 아니라 착각의 죄입니다.’”
우리는 이번 교과를 통해 자기가 하나님인 줄 착각하여 교만한 삶을 살다가 멸망에 이른 바벨론의 역사와 또 그 배후에 감춰져 있는 영적 바벨론, 사탄 마귀의 최후에 대해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교과의 제목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이번 교과의 주된 내용은 “교만”입니다. 스스로 높여 자신을 신이라 칭하며 하나님의 백성들을 핍박했던 교만한 바벨론의 멸망을 보면서 그 배후에 존재하는 교만의 본체인 “사탄 마귀”의 정체를 파악하고 더 나아가서는 심판의 주최자로서 바벨론을 멸망시키시고 공의를 세우시는 하나님의 품성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번 교과를 공부하면서 바벨론이나 사탄 마귀처럼 스스로 교만해지기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 되시는 주님만을 기다리는 그리하여 그분께서 베푸시는 구원으로 인해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경험이 있게 되시길 바랍니다.
일요일 – 열국에 임한 심판 (이사야 13장)
“너희는 애곡할지어다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니 전능자에게서 멸망이 임할 것임이로다”(사 13:6).
오늘 우리는 매우 충격적인 성경절을 마주하게 됩니다. 여호와의 날은 구원의 날이요 기쁨의 날이라고 우리는 믿고 기다립니다. 그러나 이사야 13장 6절은 여호와의 날에 전능자에게서 멸망이 임할 것이라고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이사야는 13장부터 23장에 이르기까지 꽤 많은 장을 할애하여 바벨론을 비롯하여 열국들이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계시를 담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을 심판하시겠다고 예언하시는 것일까요? 사실 이사야 당시에 바벨론은 주목 받을만한 큰 왕국이 아니었습니다. 앗수르가 세상을 호령하고 있던 당시이기 때문에 바벨론은 사실 변방에 작은 나라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런 나라를 대상으로 멸망할 것이라는 심판의 경고를 기록해야 했던 이사야는 사랑의 하나님께서 왜 이런 일을 행하실까에 대한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 13:16 그들의 어린 아이들은 그 목전에 메어침을 입겠고 그 집은 노략을 당하겠고 그 아내는 욕을 당하리라
심판의 날에 일어날 일들은 매우 구체적이고 잔인합니다. 우리 역시 이러한 문제들 앞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품성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됩니다. 아무리 공의를 집행하신다는 명목으로 죄악을 심판하신다 할지라도 어린 아이들의 죽음과 연약한 아녀자들의 희생마저 허락하신다는 것이 참 잔인하게 느껴집니다. 사랑의 하나님과는 거리가 먼 듯 한 느낌을 받게 하는 것이지요.
오늘날 우리 교회 내부에서도 재림 전 심판에 대한 문제로 이 곳 저 곳에서 많은 이야기들이 들려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한 이해의 차이에 따라 평생을 몸담아 왔던 교회를 등지는 일들도 벌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심판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까요?
교과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러한 행동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 말씀을 포함하여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 언급하는 모든 성경절은 죄악의 참혹한 본성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는가? 사랑의 하나님이 이렇게 반응하셨다는 사실은 죄가 얼마나 나쁜 것인지를 보여주는 충분한 증거가 아닌가? 우리는 이사야를 통해 이러한 경고를 발하신 분이 용서하고 고치며 호소하고 권고하시는 예수님과 동일한 분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교과 80-81쪽
제가 군시절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제가 모셨던 상관 중에 한 분은 매우 친절하고 상냥하며 인자함이 넘치는 분이셨습니다. 군인 같은 느낌이 사실 잘 안 느껴지는 분이셨지요. 그런데 맨 처음 제가 그분을 뵀을 때는 그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처음 제가 근무해야 하는 곳에 배치되던 날 그분은 한 손에 칼을 들고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한 병사의 발등을 잔인하게 도려내고 있었습니다. 병사는 고통을 참지 못하고 졸도했습니다. 근무처는 온통 피바다였습니다. 그런데 더 신기한 것은 주변에 있는 다른 군인들이 그분을 말리기보다는 오히려 더 돕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과연 무슨 상황이었을까요? 그렇습니다. 제가 근무한 곳은 국군병원 수술실이었습니다. 제 상관은 의사였습니다.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봉와직염이라고 하는 발이 썩어들어가는 무서운 병에 걸린 병사를, 너무나도 썩어져서 마취조차 잘 되지 않는 병사를 살리기 위해 손에 칼을 들고 상처 부위를 도려내는 수술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비추어 우리는 이사야 13장에 심판을 예고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위의 이야기로 모든 것을 다 명쾌하게 설명해 내기에는 그분의 사랑과 공의가 너무나도 광대하지만, 인간의 제한된 지력으로 조금이나마 그분의 품성을 이해하자면, 주님의 심판은 살리기 위한 심판이지 결코 처벌이나 복수를 위한 심판이 아님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그분의 심판이 세상의 왕들처럼 잔인하고 무자비한 것이라면 온 우주 거민들이 결코 그분을 사랑하고 따르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한 병사의 발등을 도려내는 군의관을 옆에서 도우며 병사 살리기에 협력했던 간호장교들과 의무병들처럼, 천사들과 우주거민들이 대쟁투의 핵심인 바벨론의 멸망과 주님의 공의가 세워지는 그 현장을 초미의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며 협력한다는 것 자체가 우리 주님의 심판은 사랑을 기초로 한 “살리는 심판”이라는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교과를 통해 악의 세력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은 죄의 심각성을 증명하며 공의는 곧 하나님의 품성인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시기 바랍니다.
월요일 – 큰 성 바벨론
“열국의 영광이요 갈대아 사람의 자랑하는 노리개가 된 바벨론이 하나님께 멸망당한 소돔과 고모라같이 되리니 그곳에 거주할 자가 없겠고 거처할 사람이 대대에 없을 것이며…”(사 13:19~20).
이사야의 예언대로 변방의 한 나라였던 바벨론은 결국 열국의 영광이자 갈대아 사람의 자랑하는 보석과 같은 존재로 급부상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우리말로는 노리개로 번역이 되어있어서 자칫 바벨론이 그 당시 열국들의 놀잇감처럼 우스꽝스러운 존재였다고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원문에 기록에 따르면 보석으로 해석되는 “티프아라”라는 히브리말을 사용하여 바벨론이 아름답고 영광스럽고 영화로운 존재였음을 뜻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성경절에서 우리가 하나 더 주목해 봐야 할 것은 바로 “자랑”이라는 단어입니다. 히브리말로는 가온[גָּאוֹן]이라는 단어인데 그 뜻은 높임과 위엄을 넘어선 교만이라고 하는 말로 표현되었습니다. 그래서 70인역을 번역한 역자들은 이 말을 번역할 때 “오만”, “거만”으로 표현하여 바벨론이 강대국으로 성장하게 되었을 때 어떤 모습으로 변하여 심판의 대상이 되었는지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아직 강대국의 반열에 오르지 못한 바벨론이 왜 그렇게 잔인하게 심판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역사를 주관하시는 주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바벨론은 성장하여 열방의 자랑거리가 될 것이며 결국은 오만하고 거만한 존재가 되어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신 것입니다. 그 심판받는 방법과 시기까지도 예언해 주시므로 후에 그 예언이 성취되어 역사가 되었을 때에 과연 주님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참 하나님임을 증거하게 하셨습니다.
“페르시아의 정복군이 예기치 않게 바벨론의 수도 한복판을 뚫고 들어감으로 유대인들은 그들의 압박자들이 돌연히 멸망할 것이라는 이사야의 예언이 문자 그대로 성취되는 충분한 증거를 보았다. 이 일은 하나님이 그들을 위하여 열국의 사건들을 통제하고 계신다는 현저한 표징이 되었다”(선지자와 왕, 552).
바벨론의 심판과 멸망은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해방의 날이요 구원의 날이었습니다. 성경에 묘사되어져 있는 심판에 대해서 우리는 어쩌면 아사야 당시의 사람들처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의문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후일에 이 모든 일들이 이루어지고 역사로 남는 그 날에는 과연 주님의 심판이 우리를 살리는 심판이요 우리를 죄에서 해방하신 사랑의 심판이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화요일 – 산왕의 몰락 (이사야 14장)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사 14:12).
오늘 본문의 말씀은 에스겔 28장과 함께 루스벨의 타락과 그가 어떻게 사탄 마귀가 되었는지를 묘사하는 매우 유명한 성경절 중 하나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성경절이 바벨론의 심판에 대해 묘사하는 내용에 포함되어져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사야 14장은 바벨론이 사탄 마귀를 표상하고 있음을 말해줄 뿐만 아니라 바벨론이 사탄 마귀처럼 망하게 할 죄 “교만”의 극치를 달렸던 존재였음을 우리에게 고발하고 있습니다.
바벨론의 왕들이었던 다니엘서 4장의 느부갓네살과 5장의 벨사살은 자존감의 끝을 달리는 교만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지나칠 정도로 오만하여 심지어 “지극히 높은 이”(사 14:14)처럼 되려는 열망을 품었던 것입니다. 실제적으로 그들의 문화를 살펴보면 매해 신년행사에서 자신들이 섬기던 최고의 신 마르둑이 인간으로 현현한 존재가 바로 자신임을 과시하며 신 노릇을 했다는 역사적 근거들을 보게 됩니다.
성경은 하나님 행세를 했던 그들의 말로가 어떻게 되었는지도 소개하고 있습니다. 느브갓네살은 짐승이 되는 심판을 경험하였습니다. 벨사살은 “달아보고 달아보아도 부족하다”라는 판결을 받고 비참한 말로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리고 바벨론은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멸망한 왕국으로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망하게 할 죄 – 교만으로 점철된 바벨론 왕들은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서두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사탄 마귀를 표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당한 심판은 반드시 사탄 마귀에게도 이루어질 확실한 예언임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멸망은 그가 결국은 신이 아니었음을, 이번 교과의 제목처럼, 하나님 행세를 했던 교만한 피조물이었음을 증명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 말씀 앞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나는 어떠한 사람인가? 혹 사탄 마귀를 표상하는 삶, 망하게 할 죄, 교만함으로 내 삶을 꼴 짓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마치 내 인생의 주인이 나인 것처럼, 하나님 행세를 하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됩니다. 교만은 망하게 하는 죄입니다. 겸손함으로 참 하나님이신 우리 주님 앞에 우리의 삶을 내려놓길 기도드립니다.
수요일 – 하늘의 문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는도다” (사 14:14)
수요일 교과는 바벨론의 왕들을 넘어 바벨론 자체가 얼마나 교만한 존재였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이름의 뜻만 살펴보아도 그들이 얼마나 오만하고 거만한 존재였는지를 알 수 있는데요 바벨론 말로 그 성 이름은 ‘바빌리’인데 이는 신의 영역으로 접근하는 장소를 가리키는 ‘신의 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바벨론의 시작은 창세기 11장에 나오는 바벨탑에 그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홍수로부터 멸망당하지 않겠다는 하늘의 약속을 무시하고 땅에 기추를 두어 하늘에 닫도록 성을 쌓에 하늘 문을 열어보겠다는 오만한 정신이 바로 바벨탑의 정신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정신은 단순히 바벨론뿐만 아니라 성경에 묘사되는 많은 강대국들 즉 두로왕과 더 나아가 계시록에 묘사되는 로마와 그 악한 세력들에게 까지 미치게 됩니다. 이 교만한 정신은 사탄 마귀가 가지고 있던 반역의 정신이었습니다. 스스로 높아지려 했던 바벨탑이 무너졌듯이 스스로 높여 구원에 이르겠다는 교만의 정신은 결국 심판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구원에 이르는 하늘 문을 여셨다는 사실을 성경을 통해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창 28:17 이에 두려워하여 가로되 두렵도다 이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이 말씀은 도망하던 죄인 야곱이 하늘로부터 내려온 사닥다리 꿈을 꾼 후에 일어나 고백한 내용입니다. 야곱의 사다리는 하늘에서 비롯되었으며 위에 계신 하나님에 의해 나타났습니다. 야곱은 그 사다리의 한 칸이라도 보태거나 빼지 못했습니다. 오직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은혜로 말미암아 야곱은 구원의 소망을 얻게 된 것입니다.
바벨탑의 정신과 야곱의 사다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행위로 대표되는 대조적인 구원의 경로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모든 참된 종교는 겸손한 벧엘에서의 경험, 야곱의 사다리 정신에 기초해야 합니다. 오늘 교과를 통해 혹 아직도 내 속에서 나를 높이려는 욕망이 꿈틀거리고 있다면 겸허히 우리 자신을 낮추고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봉사하신 겸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본받게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목요일 – 시온의 최후의 승리
“그날에 말하기를…이는 여호와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우리는 그의 구원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리라…”(사 25:9).
우리는 다시 이번주 교과의 기억절 말씀으로 돌아왔습니다. 이사야서 13장에서 27장까지 긴 심판의 역사를 통해 우리는 사탄의 정신인 교만이 많은 강대국들을 멸망으로 이끌었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그분의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사랑과 은혜의 손길을 찾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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