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bn라디오교과 2021년 1기 제 5과 존귀한 평강의 왕 (원고는 본문에 올렸습니다) > 안교교과

사이트 내 전체검색

안교교과

cbn라디오교과 2021년 1기 제 5과 존귀한 평강의 왕 (원고는 본문에 올렸습니다)

페이지 정보

글씨크기

본문

blank.gif


*방송 다운로드 안내:아래를 클릭해주세요

http://file.ssenhosting.com/data1/christian/no5Isaiahbycbn.mp3





* 원고를 본문에 올립니다.



20211기 제 5과 존귀한 평강의 왕

 

기억절 :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9:6).

 

<서론>

이번 과에서는 제목에서 함께 살펴본 것처럼 존귀, 평강이라는 단어에 어울리는 한 존재에 대한 말씀을 살펴볼 것이다. 완전히 기울어버린 국가의 위기 속에서. 그리고 위로와 평강이 필요한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참되고 영원한 평화를 가져다주실 수 있는 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한다.

 

최근에 평화롭다 라고 느낀 적이 언제가 있는지? (설교 끝났을 때..인턴이기에 / 오늘 저녁이 될 것 같음)

우리가 평화롭다 라고 느끼는 그 감정은 너무나도 쉽게 그 평화가 깨질 수 있다. 설교가 또 다시 돌아오면 평화가 깨지고. 방송 녹화일정이 다가오면 또 다시 평화가 깨지는 것처럼 제한적이고 단편적인 평화가 우리 삶 속에 있다. 그러나 오늘 이사야가 91011장을 통해 예언하고 소개하는 분은 우리에게 영원한 평화 궁극의 평화를 가져다 주시는 분이시다.

 

<일요일 : 갈릴리에서 불행이 끝남>

그러나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둠은 이제 사라졌다. 전에는 그가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모욕을 당하도록 내버려 두셨지만, 이후로는 바닷길과 요단 강 저편의 땅과 이방 사람들이 사는 갈릴리를 영광스럽게 하셨다”(9:1, 우리말성경).

 

그러나라는 단어로 9:1이 시작되고 있다. 개역개정판과 개역한글판에는 없지만 우리말 성경에는 있는 이 그러나 라는 단어를 통해 이사야 8장의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가 연출될 것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우리가 지난과를 통해 공부한 것처럼 8장의 후반부에 보면 정말 암울한 남방유다의 모습이 드러난다. 하나님 대신에 이교를 선택한 이들의 절망적인 상태에 대해 기록했는데, 이와는 대조적으로 9:1 에서는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는 때가 올 것이라고 예언한다. 여기서 갈릴리 지역의 사람들이 큰 빛”(2)이라는 특별한 복을 받는 자들로 부각된다. 갈릴리 호수 지역은 이스라엘의 영토 중에서 제일 먼저 정복된 지역이기 때문에 그렇게 묘사되었다. 이사야는 가장 먼저 정복된 지역이 가장 먼저 구원을 볼 것이라는 기별을 선포했다.

 

그런데 이방 사람들이 사는 갈릴리 라는 표현이 조금 낯설다. 갈릴리면 갈릴리지 왜 이방 사람들이 사는 갈릴리라고 기록했나? 개역개정판에는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라고 기록한다. 무슨 이유에서일까? “갈릴리라는 이름은 ”() 또는 회전이라는 의미이다. 솔로몬 시대에 갈릴리지역이 두로까지 확장되었다. 신약 시대에 갈릴리는 전보다 좀 더 넓은 지역을 포함하게 되었다. 이 지역은 이방의 갈릴리로 불렸는데, 그 이유는 이곳에 늘 혼혈족들이 거주했고 단지 적은 수의 유대인들만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사야의 예언은 어떻게 성취되는가?

예수님의 초기 봉사는 갈릴리 지역에서 시작되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리에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고 귀신들렸던 자들을 건지시며 백성들을 치유하심으로 희망을 안겨 주셨다.

 

BC 723/724년에 열 지파가 포로로 잡혀간 이후로 갈릴리는 메시야가 오실 때까지 다른 나라에 정복되었으며 제사장들이나 선지자들의 봉사도 없는 문자 그대로 암흑 가운데 처해 있었다. 지도자의, 인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캄캄한 어두운 세월을 보내게 됐던 백성들에게 마침내 메시아의 출현으로 구원의 빛을 보게 될 것이다.

 

선지자와 왕 373p 에는 이렇게 기록한다.

선지자는 언약의 메시아의 초림 때까지 여러 세기를 내려다보도록 허락을 받았다

흑암을 몰아내는 큰 빛이 오실 것임을 이사야는 본 것이다. 빛이 오실 것이라는 희망의 기별을 전하고 기록할 때 이사야는 얼마나 기뻤을까. 우리도 이 기별을 가진 백성들이다. 우리의 삶의 빛이 되시는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것이라는 복된 소식을 가진 사람들이다. 이 구원의 빛을 가지고 있는 우리는 어둠에 갇혀 두려움에 떨지 않는다. 우리의 삶은 감사가 넘치고 기쁨과 행복이 가득하다. 이 빛이 우리 가운데 가득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 우리를 위한 아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9:6).

 

일요일소지에 이어서 구원자에 대한 예언이 계속해서 주어진다. 한 아기의 탄생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이 아기는 다양한 명칭을 가지고 있다.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 등 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다. 고대 근동 지방에서 왕이나 신들은 그들의 위대함을 나타내기 위해 다양한 이름들을 가지고 있었다.

 

이사야 96절에 나타난 그분이름 중 첫 번째는 기묘자, 모사인데 이 이름은 지혜로움, 친절함 그리고 사려 깊음을 표현한 것으로, 하늘과 땅과 온 우주의 모든 존재들의 환희와 경배와 찬양을 불러일으키는 이름이다(주석).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라는 이름들의 속성을 살펴볼 때 우리는 예수그리스도만이 이 아기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아기를 히스기야 왕으로 해석하려 했으나 이 이름들이 인간에게 적용되기에는 무리가 있다. 오직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이 설명에 적합하신 분이다.

 

이사야는 계속해서 예수님에 대한 예언의 내용들을 기록한다. 우리가 비록 어렵고 힘든 흑암과 같은 시간 속에 살아갈지라도 기묘자 되시는 주님이 계시다. 전능하신 하나님으로서 신성을 가지신 예수님께서 우리게 오실 것이다. 평화를 주시기 위해 오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사야 시대의 절망적인 상황에서 뿐만 아니라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 전쟁과 고통으로 얼룩진 역사의 모든 페이지마다 인류의 유일한 희망은 한 아기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셨다.

 

우리에게도 유일한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우리를 위해 죄 없는 당신께서 희생당하신 그 십자가의 보혈이 우리의 희망이다. 전혀 고통당하실 이유가 없으신 분께서 우리를 위해 고통당하셨고 죽임당할 이유가 없으신 분께서 우리를 위해 죽음을 경험하셨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53:5)

 

이런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다시 오실 것이라 약속하셨다. 다시 오실 것이라 예언되었다. 우리에게 영원한 평화를 주시기 위해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이라 약속하셨다. 우리는 이 기별을 믿는 주의 백성들이다. 그 약속을 굳게 믿고 주님을 기쁨으로 기다리는 우리가 되길 바란다.

 

< 화요일 : 진노의 막대기>

이사야 9장서부터 10장 까지 보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고난을 당하는 장면들이 나온다. 그런데 여기서 보여지는 백성들이 당한 고난들은 레26장에 나오는 저주들과는 사뭇 다른 고난들이다.

 

일단 이사야 9:8-12 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하나님께서는 유다를 침공하려는 에브라임과 아람의 계획이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는 보증을 주셨다. 그들은 이미 어느 정도 실패를 경험했지만 이스라엘은 유다에 대한 공격을 계속했다. 패역과 거만함 속에서 이스라엘의 베가는 이사야를 통해 주신 기별을 거부하고 오히려 아하스를 치려는 자신의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찍혀진 뽕나무 대신 더 비싸고 튼튼한 백향목을 사용하려는 것 이런 것들은 자신의 패역과 하늘의 뜻에 대한 공개적인 반항을 드러내는 것이었다(주석)

 

이런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내리는데 11절에 보면 르신의 대적 앗수르 인들을 이스라엘에 보내실 것이었다. 그리고 아람 사람과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공격할 것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의 몽둥이가 이스라엘에게 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자 여호와께서는 더 큰 심판, 곧 그들에게서 머리와 꼬리, 종려나무 가지와 갈대를 끊으시는 일을 행하셨다. 특별히 나라를 배도의 길로 인도한 사람들에게 임할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돌아오지 않자 19절에 보면 이 땅이 불타리니 백성은 불에 섶과 같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단계적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벌하시는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이런 모습은 레위기 26장에도 기록되어있다.

 

레위기 26장에 보면 만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다른 신들에게로 돌아가면 무서운 형벌을 받을 것이라는 내용이 기록되어있다. 점차 더 가혹해지는, 다섯 개의 형벌이 예고되어 있는데 첫 네 형벌 다음에는 그들에게 7배의 더 나쁜 재앙을 보내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다(18, 21, 24, 28). 아마도 여기서 말하는 “7”은 꼭 수적인 증가를 말하기보다는 엄청나게 혹심한 형벌을 의미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단계적으로 벌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 만일 하나님께서 유다의 멸망을 원하셨다면 그들을 앗수르의 손에 그냥 멸망하게 두셨을 것이다. 그러나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벧후 3:9)신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면서 조금씩 그 보호의 손길을 거두신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끊임없는 사랑과 자비로, 때로는 시련과 어려움으로 우리에게 호소하시는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품 안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자유의지는 참 좋은 것이지만 그 자유에 대한 책임은 선택한 사람에게 있다.

 

계속되는 경고와 고통에도 반복적인 실수를 저지르는 것이 무엇이 있는가?

(간식.. 살찌는 것..다이어트를 하면 잘 빼는데 다시 찜..)

 

교회증언 4179p 에는 이런 글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라고 먼저 경고하심 없이 그의 백성에게 심판을 보내지 않으신다. 그분은 그들을 순종으로 돌이키기 위해 온갖 방법을 사용하시며, 그들에게 회개할 충분한 기회를 주기 전까지는 심판으로 그들의 죄악을 벌하지 않으신다”(교회증언 4, 179)

 

우리에게 끊임없이 호소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더욱 완고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수요일 : 뿌리와 한 가지>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11:1)

 

이새의 줄기에서의 줄기는 문자적으로 그루터기 또는 뿌리줄기를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새의 그루터기는 이새의 아들인 다윗 왕조가 힘을 잃을 것임을 나타낸다. 앞 장에서 앗수르와 유다 두 나라에 대한 심판을 살펴봤덧 것처럼 아름답고 무성한 나무였던 유다는 그들의 죄악으로 인해 베임을 당할 것이었다. 마치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 베임을 당해 그루터기만 남았던 다니엘서 4장에 나오는 느부갓네살 및 바벨론의 모습과도 흡사하다.

 

그러나 이사야는 그루터기만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후손으로 한 왕이 일어날 것을 예언한다. 다윗의 후손으로 일어난 이 왕은 그때까지 다윗과 그의 왕들이 이루지 못한 일들을 성취하실 것이다. 나라가 베임을 당해 그루터기만 남았지만 생명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뿌리로부터 한 가지가 일어나서 무성하게 될 것이었다(주석). 이 새로운 통치자는 다윗 보다 훨씬 더 위대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가져올 평화는 창조의 원형에 이를 평화이기 때문이다.

 

이사야 11장에는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이 함께 나타나고 있다.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초림과 재림이 하나로 결부되어 있는데 구원의 계획은 초림과 재림이 다 있어야 완성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평화를 회복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그분께서는 초림과 재림을 통해 구원의 계획을 완성하셨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루실 평화, 그 완전한 평화를 기대하며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약속은 주어졌으며 그 약속을 믿고 기다리며 이 복된 소식을 전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희망의 기별. 지금 상황이 아무리 베어진 그루터기 같을 지라도 주님께서는 우리의 희망이 되심을 전하는 것이 우리가 가진 기별이자 사명이다. 이것을 잃지 않는 우리 모두가 되길 바란다.

 

<: 주께서 나를 안위하시오니>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12:2~3)

 

이사야 12장은 감사의 시이다. 하나님의 자비와 안위를 찬양하는 시인데 이것은 메시야가 의인들을 압제자의 손에서 구원해 내심을 기록한 앞장의 속편이다. 이 찬양은 미래의 구원을 출애굽한 히브리인들의 구원에 빗댄다(11:16 11장의 마지막).

12:2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라고 노래하는데 이것은 오시는 구원자가 예수님이라는 것을 거의 확실하게 알려준다. 예수님의 이름의 뜻도 여호와는 구원이시다인데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나님은 구원을 베푸실 뿐 아니라 구원 그 자체이시다. 그분은 평화를 가져오실 뿐 아니라 그분 자신이 우리의 평화이시다.

그분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실 뿐 아니라 생명 그 자체이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주실 뿐 아니라 사랑 그 자체이시다.

3:24에는 이렇게 기록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속량함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 즉 구원은 그분 안에 있는 것이고 우리는 은혜와 자비로 그 구원을 받는 것이다. 예수님께 구원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구원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께로 가야 한다. 우리의 구원은 결국 평강과 능력의 왕이신 예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사랑의 호소와 경고들에 반응하여 우리의 구원되시는 그리스도 예수께로 돌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란다.

 

<요약>

이번 과에서 우리는 이사야의 예언을 통해 평강의 왕, 평화와 구원이 되시는 예수님에 대해 살펴봤다. 이사야의 이름의 뜻은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다이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백성들을 흑암으로부터, 고난과 역경으로부터 구원해 주시겠다는 약속을 주셨다. 이 약속은 이새의 줄기로부터 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성취되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약속을 주셨다. 구원 그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이다. 그리고 자기 백성에게 영원한 평화를 주실 것이다. 이 복된 기별을 잊지 않고 전하며, 기도하고 기대하며 기다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Copyright © KASDA Korean American Seventh-day Adventists All Right Reserved admin@kasd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