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bn라디오교과 2021년 1기 제 4과 어려운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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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1기 제 4과 어려운 길
기억절 : “이제 야곱의 집에 대하여 얼굴을 가리시는 여호와를 나는 기다리며 그를 바라보리라”(사 8:17).
<서론>
저자는 4과에서 ‘어려운 길’이라는 제목을 먼저 우리에게 제시해주고 있다. 지난과에 이어 이번 과에서도 역시 남방유다 그리고 아하스 왕은 어려움 가운데 처해 있는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앗수르의 왕인 디글랏 빌레셀과 북방 이스라엘 그리고 수리아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한 나름대로의 처절한 사투를 벌이고 있는 남방유다의 아하스 왕의 행보가 ‘어려운 길’을 걷고 있는 모습을 본문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아하스 왕이 걷고 있던 그 길이 사실은 ‘어려운 길’이 아니었다라고 한다면 어떻게 생각하는가?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는 정말 골치 아프고 어떻게든 몸부림 칠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길은 어려운 길이 아니었는데 누구에게는 어려운 길이 아니었냐면 하나님께는 어려운 길이 아니었다.
함께 그 이유에 대해서 살펴보자.
<일요일: 예언이 성취됨>
“그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 때가 되면 엉긴 젖과 꿀을 먹을 것이라”(사 7:15).
사 7:15절만 기억절로 제시가 됐는데 일요일 소지를 이해하려면 14~16절을 전부 봐야 한다.
(사 7:14)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사 7:15)그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 때가 되면 엉긴 젖과 꿀을 먹을 것이라 까지
(사 7:16)대저 이 아이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기 전에 네가 미워하는 두 왕의 땅이 황폐하게 되리라
하나님께서 아하스 왕에게 하시는 말씀. 지난 과에서 공부한 것처럼 아하스 왕에게 징조를 구하라! 라고 하시자 아하스 왕이 구하지 않겠나이다! 라고 했으나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주신 것이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하시는 말씀. 여기서 핵심적인 등장인물인 ‘임마누엘’에 대해서는 지난 과에서 다루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우리의 궁극적인 임마누엘은 예수님이시고 당시 아하스에게 예언적인 성취의 시의성을 증명했던 이전의 ‘임마누엘’이 있었다는 것을 이제는 잘 알고 있다. 이 임마누엘이 아하스가 직면해 있던 진퇴양난의 상황 속에서 구체적인 연관이 되어 있었는데, 임마누엘이 자라서 악을 버리고 선을 택할 줄 알기 전에 미워하는 두 왕의 땅이 황폐하게 될 것이었다.
그리고 엉긴 젖과 꿀을 먹을 것이라고 이사야는 이야기하는데 이것은 땅은 비록 황무할지라도 그들에게 먹을 것이 떨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생존에는 문제가 없을 것이다 라는 이사야의 예언. 아무튼 수리아와 북방 이스라엘의 세력이 소멸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끝없는 약속이 반복되는 것. 이 이사야의 예언은 기원전 734년경에 주어졌는데 언제 이 예언이 성취됐을까? 정말 바로 성취됐다. 아하스의 뇌물을 받은 디글랏 빌레셀 3세는 북방의 동맹을 붕괴시켜 갈릴리와 요단강 건너편 북방 이스라엘의 지역을 정복했으며, 인구의 일부를 이주시킨 다음, 그 영토를 앗수르의 도(道)에 편입시켰다(기원전 734~733년). 기원전 733~732년에 디글랏 빌레셀은 수리아의 수도인 다메섹을 정복하고 앗수르의 도(道)로 만들었다. 따라서 이사야가 예언한 지 2년이 채 못 되는 732년까지 아하스를 위협했던 두 나라는 확실하게 멸망했다.
하나님의 예언대로 정말 유다의 적들은 무너졌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무엇이냐면 아하스가 앗수르에 의지하지 않았어도 그 예언은 성취될 것이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미 이사야를 통해 유다의 원수들에게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에 대해 예언하셨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하스에게 말씀하시고 싶은 요점은 이것이 어차피 벌어질 일이기 때문에 앗수르에게 의지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사실 아하스는 하나님의 예언을 믿고 그냥 기다리면 됐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더라면 아마 두려움도 사라졌을 것. 아하스는 그에게 주어진 예언의 말씀을 통해 그렇게 강대해 보이는 앗수르마저도 하나님의 도구일 뿐.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어야 했다. 아하스가 이것을 깨달았더라면 그가 걸어야 할 길이 결코 어려운 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됐을 것이다.
아하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생각하기에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아니 하나님이 저렇게 말씀 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왜 저렇게 믿지를 못할까?’ ‘하나님이 이렇게 직접적으로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시는데도 왜 믿지 못하고 저리 방황할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마 10:29~31)
머리털까지 다 세실 정도로 우리에게 사랑과 관심이 많으신데 두려워하지 말라. 라고 말씀하시지만 우리는 두려워할 때가 많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 요즘은 또 코로나로 인한 두려움. 많은 두려움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데 우리도 아하스와 같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는 사람들임을 기억하자.
(아버지 예화......스킵...)
<월요일 : 예견된 결과들>
“앗수르 왕 디글랏빌레셀이 그에게 이르렀으나 돕지 아니하고 도리어 그를 공격하였더라”(대하28:20).
사 7:17~25절을 읽어보면 앗수르가 이스라엘을 힘들게 할 것이라는 말씀들이 기록되어있다. 아하스에게 있어서 수리아와 이스라엘이 제거될 것이라는 말씀은 희소식이었다. 그러나 그 두 나라를 멸망시킨 앗수르가 결국 더 큰 원수가 되리라는 사실은 아하스에게 영 좋지 못한 소식이었다. 사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스라엘과 수리아를 정복한 앗수르가 유다는 정복하지 않고 존중해줄 것이라는 판단은 명백한 오산이었다. 말도 안 되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어떤 말도 안되는 판단들을 내렸습니까? 앗수르를 통해 이스라엘과 수리아를 물리치려는 생각. 그리고 앗수르가 막상 다가오자 두려운 나머지 열왕기하 16장에 나온 것처럼 앗수르의 제단의 모양을 본떠 제단을 쌓고 그 신에게 제사를 드린다.
두려움에 눈이 어두워진 것이다. 어려움이 그의 눈을 가려 말도 안 되는, 어리석은 판단을 하게 된 것이다. 그에게는 이 진퇴양난을 벗어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이 모든 것을 아시고 그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해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의지하는 최고의 방법이 있었다. 그러나 두려움이 눈을 가려 그는 여호와를 바라보지 못했다. 그의 눈에는 수리아와 이스라엘이라는 어려움이 눈을 가리고 있었다. 그에게는 그것이 너무나도 커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눈 바로 앞에 있었기 때문에 커 보이는 것뿐이었다. 바로 눈앞에 있었기 때문에. 그러나 그 어려움 너머에 계시는 하나님은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신 하나님께서 나를 붙잡으라고 말씀하고 계셨다.
우리도 이와 같다. 너무나도 커 보이는 어려움이 우리 눈앞에 있을 지라도 그것이 커 보이는 이유는 눈 바로 앞에 있기 때문이다. 그보다 더 크신 주님께서 그 어려움 너머에서 ‘내게 오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그 길이 정답이다. 그 길은 어렵지 않다.
혹시 우리 눈에 어려움이 너무 커보여 두려움이 가득할지라도 그 너머에 계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그분께서 인도하시는데로 따라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화요일 : 이름에 담긴 의미>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의 이름을 마헬살랄하스바스라 하라”(사 8:3).
이름이 예사롭지 않다. (이름의 뜻 묻기-거룩할 성 에 침묵할 묵)
마헬살랄하스바스 라는 이름의 뜻은 ‘노획물은 신속하고 전리품은 빠르다’ 혹은 ‘빨리 약탈하고 서둘러 노획하라’라는 뜻이다. 이사야는 왜 자신의 아이의 이름을 이렇게 지었을까?
이사야의 아들의 이름, 마헬살랄하스바스는 신속한 정복을 의미하는데 앗수르가 이스라엘을 정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아이의 이름은 세상에 전하는 하나님의 기별이 되어야 했다. 이 아이의 이름에는 하나님의 기별이 들어 있었다. 이 아이가 자라기 전에, 8:4절에 보면 아빠 엄마 라고 부르기 전에 다메섹과 사마리아의 재물이 앗수르 왕 앞에 옮겨진다 기별이 이사야에게 주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는 여전히 희망이 남아 있었다. 10절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이라’ 라는 약속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이름을 주셨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우리는 끝을 향해 달려가는 이 세상 속에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라는 이름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다.
우리도 우리의 삶이 기별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호소가 전해지는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게 주신 마지막 사명을 끝까지 다하는 믿음의 그리스도인, 재림교인이 되어야 한다.
우리에게도 아하스에게 주어졌던 것처럼 분명한 예언들이 있다. 그 모든 예언의 끝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다. 우리는 재림을 기다리는 백성들이다. 우리의 삶이 재림의 기별을 전하는 하나님의 기별자의 삶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수요일 :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면>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고 그를 너희가 두려워하며 무서워할 자로 삼으라”(사 8:12~13).
두려워하는 백성들에게. 낙담한 백성들에게 향한 이사야의 기별은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면 아무것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이 하나님을 무서워하며 벌벌 떠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두려워한다는 것은 그분을 우주의 궁극적인 주권자로 인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과책에 아주 잘 표현되어있다. 만일 그분이 우리 편이시라면, 그분의 허락 없이는 아무도 우리를 건드릴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를 주관하시는 분이 온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그분을 배반함으로 그분의 반대편이 된다면, 달아나봤자 숨을 곳이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배반한 분이 안타깝게도 온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가장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온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그 어떤 것도 두렵지 않게 된다.
우리가 가진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은 존경의 두려움이다. 두려움에도 종류가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해치지는 않으실까 떠는 두려움을 가질 이유가 전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가져야 할 가장 두려운 대상은 바로 하나님.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고 염려해야 한다.
각자가 가진 두려움들이 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 어지러운 세상에서의 삶에 대한 두려움.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면 이 모든 두려움들은 사라질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주관하시는데 어떤 어려움이 나를 삼킬 수 있을까. 이런 믿음을 가지고 두려움 없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자.
<목요일 : 은혜를 모르는 자들의 운명>
“…그들이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 아침빛을 보지 못하고”(사 8:20).
이사야 8:16~22절을 읽어보면 신접한 자와 마술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아하스가 이 이교에 깊이 빠져있었다. 아하스가 결국에는 하나님을 떠나 이교에 빠지고 이방 신들에게 경배하는 선택을 함으로서 그 나라와 백성들 가운데 참담한 결과가 나타난다. 이사야는 이에 대해 분개하고 격분하는 백성들의 모습을 언급한다. 실제로 아하스가 죽었을 때, 그에 대한 존경심의 부족으로 그가 죽었을 때 “이스라엘 열왕의 묘실에 들이지 아니하고 예루살렘 성에 장사”했다.
성경은 이방 종교를 따르는 것에 대해 강력하게 경고한다. 이스라엘 백성중에 박수무당이 되거나 신접한 자가 되면 돌로 쳐 죽이라(레20:27)고 말씀하시기도 하셨고 가나안 땅에 들어갈 백성들에게 요술이나 무당하는자나 그 민족들의 가증한 행위를 본받지 말라(신18:9~11)고 말씀하셨다. 굉장히 엄하게 그리고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그것들로부터 분명하게 구별되라.
그런데 이방종교, 우상숭배, 주술로부터의 분리는 하나님께 대한 충성의 문제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충성한다면 이런 주술과 우상들을 가까이 할 수가 없다.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주인 되심을 알고 그분을 두려워하는 백성이라면 이교의 것들을 가까이 할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느 편에 설 것인지 분명히 하기를 원하신다. 적당히 걸쳐있을 수 없다. 오로지 하나님께 충성된 주의 백성이 되어야 한다.
사실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는 사후 세계, 환생, 죽은 영들의 활동 등의 내용들이 굉장히 익숙하다. 무엇을 통해 익숙하냐면 바로 영화, 드라마 등의 영상매체들을 통해 많이 접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 살면서 이런 내용들이 들어간 영상들을 단 한 개도 보지 않았다고 한다면 거짓말이라고 할 정도로 많은 영상 컨텐츠들 가운데 이런 내용들이 들어 있다. 우리는 그것이 허구인 것을 알지만 분별력이 없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무의식적으로 그런 사상들이 머릿속에 들어오게 된다. 특별히 아직 성장 중에 있는 청년, 청소년들에게 있어서 이런 영상물들은 굉장히 효과적이다. 너무 흥미롭게 잘 만들고 자연스럽게, 눈이 끌릴 수밖에 없는 효과들로 가득찬 영상물을 안 볼 수 없는 시대에 우리 청소년들이 놓여있다. 지금은 막을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최대한 지양해야겠지만 못 보도록 막는 것만이 해답이 아니다. 무엇이 성경적이지 않은지. 어떤 부분이 사실과 맞지 않은지 분명하게 교육해야한다.
<요약>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 그리고 그 아들을 통해서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기별을 선포하시고 예언하셨으며 희망을 주셨다. 그 가운데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하나님뿐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면 이 길은 ‘어려운 길’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하는 길이 될 것이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하는 길에는 두려움이 없다.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과 함께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두려움 없이 이 땅에서 삶으로 기별을 전하는 ‘남은 무리’가 되자.
하나님의 귀한 부르심에 순종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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